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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조선의 인구관리와 통제 방법 : 오가작통법




 

 


1. 무릇 민호(民戶)는 그 이웃을 따라 가구의 많고 적음이나 재력의 빈부를 막론하고 5()마다 1()으로 삼되 5가 가운데 지위와 연세가 높은 자로 통수(統首)를 삼아 통 안의 일을 관장하게 한다.

1. 5가는 반드시 이웃에 모여 살면서 농사를 서로 돕고출입에 서로 지키며질병에 서로 구호하게 한다사정에 불편한 경우가 있어 비록 울타리를 맞대고 살 수 없더라도 반드시 닭·개 짖는 소리가 서로 들리고 부르면 서로 응할 수 있어야 하며전과 같이 독립 가호로 떨어져 사는 일이 없이 서로 보호하고 서로 기댈 수 있도록 한다.

1. 통 안의 사람으로서 남자 16세 이상인 자는 또 반드시 신상호구서(身上戶口書)를 갖되 아무 도아무 현읍아무 면아무 리아무 역아무 성명나이 얼마를 하나의 두꺼운 종이에 써서 이정과 이유사가 서명하고 관사에서 도장을 찍으며 출입할 때마다 주머니에 찬다이것이 없는 경우에는 관문(官門)에 들어가거나 송정(訟庭 재판정)에 나갈 수 없으며이를 신부(身符 신분증)로 삼는다잃어버린 경우에는 이유서를 관에 제출하고 종이 1장을 바치면 관에서 다시 발급한다만약 본래 이를 갖지 아니한 자는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을 적용하여 처벌한다.

1. 앞으로 호적의 호구(戶口)에도 반드시 아무 리아무 통 제 몇 가호를 호단(戶單첫줄에 써서 조사에 편리하게 하여 부정을 방지한다.

1. 통패에 성명이 기재되어 있지 않은 자는 곧 백성 수에 들어 있지 않은 사람이므로 소송을 하여도 접수하지 않으며 죽어도 살인죄가 없다.

1. ·리의 백성은 서로 보호하고 지키며 혼인·장례에 서로 돕고환란에 서로 불쌍히 여기며착한 일을 서로 권면하고 악한 일을 서로 경계하며소송과 싸움을 말리고 믿음을 지키고 친목을 다져 선량한 백성이 되도록 한다만약 효도하지 않고 우애하지 않으며 주인을 배반하고 살인을 하며 풍속을 손상하고 도둑질과 무도한 등의 일이 있는 경우에는 반드시 이와 면에 고하여 본 고을에 알려서 범한 죄의 경중에 따라 엄히 다스리도록 한다.

1. 통 안에 사기·절도를 한 부류와 내력이 분명하지 않은 사람이 있는 경우에도 곧 고발하도록 하되통과 이에서 관수(官守)에게 보고하여 조사해서 다스리게 한다만약 보고를 빠뜨리고 숨기다가 일이 끝내 발각이 된 경우에는 통임(統任)을 중벌로 다스리고통 안에 죄를 연좌(連坐)시킨다본통에서는 이미 보고하였으나 이에서 덮어두어 고발하지 않은 경우에는 아울러 제서유위율을 적용하여 처벌한다.

1. 역을 피하는 백성은 옮겨 왔다가 옮겨 가는 등 주거가 일정하지 않아 현재 큰 피해가 되고 있다이 통법(統法)을 제정한 뒤에는 타읍으로 이주하는 백성은 반드시 어떠한 이유로 어느 지방으로 간다는 것을 갖추어 보고하면 통에서 이로 보고하고이에서 고을에 보고하여 그 이주를 허가받은 뒤에 비로소 옮기며새로이 이주한 지방에서도 전 거주지 고을의 이주허가문서를 확인한 뒤에 비로소 받아들인다이것이 없는 자는 곧 간민(奸民)에 해당하므로 법에 의하여 잡아 조사하고 구분하여 정착하게 한다받아들여서는 안 됨에도 받아들인 경우에는 양계인물용은율(兩界人物容隱律)을 적용하여 처벌한다.


    

一 凡民戶隨其隣聚 不論家口多寡 財力貧富 每五家爲一統 而以五家中有地位年歲者 爲統首 以掌統內之事爲白齊

一 凡五家必聚居作隣 使之耕耘相助 出入相守 疾病相救 其或勢有不便者 雖不得隔籬居生 亦必鷄犬相聞 呼召相應 無或如前獨戶離居 以爲相保相資之地爲白齊

一 統內之人男丁十六歲以上者 又必有身上戶口 書某道某縣邑某面某里某役某姓名年歲幾許 書之一厚紙 里正里有司着銜官司印之 每出入囊佩之 無此者不得入官門就訟庭 以爲身符 其或見失者 具由呈官納紙一張 自官改給之 若元不持此者 論以制書有違之律爲白齊

一 自今戶籍戶口中 亦必以某里某統第幾家 書諸戶單首行 以便考覈 以防奸僞爲白齊

一 凡姓名不載統牌者 卽不在民數之人 訟不得理 死無殺罪爲白齊

一 凡統里之民 相保相守 婚喪相助 患難相恤 善相勸勉 惡相告戒 息訟罷爭 講信修睦 務爲良善之民 如有不孝不悌 叛主殺人 傷風敗俗 盜賊不道等事 必告于里面 聞于本縣 以爲隨罪犯輕重 而懲治之地爲白齊

一 統內如有奸僞偸竊之類 來歷不明之人 亦令登時發告 自統里轉報於官守 以爲査治之地 若或漏報欺隱 事終發覺 則統任重究 統內連罪 若係本統已先報知 而里中掩覆不告者 竝論以制書有違之律爲白齊

一 避役之民 移來移去 不定厥居 爲卽今大害 旣已立此統法之後 則凡民之移去他邑者 必須具呈因何事理 指何地方 自統報里 自里報官 許其移去而後 始去 新移地方 亦見其舊居官許移文書 然後始爲容接 無此者卽係奸民 依法囚推 仍爲區劃安揷之地 其不當容受 而容受者 以兩界人物容隱之律 罪之爲白齊


『비변사등록』 숙종 1년 9월 26일

    



■ 조선시대 호구관리의 목적과 방법

인구의 파악과 관리는 국가의 운영에 필수적인 요소이다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각종 세금을 걷을 때 인구수가 중요한 기준이 되기도 하고복지정책을 시행할 때에도 인구수와 개개인의 상황에 대한 파악이 선행되어야 한다특히 인구의 파악과 관리가 중요하게 부각되는 분야는 국방이다군대 유지를 위한 병사는 보통 한 국가 내에서 일정한 나이대의 남성(과 여성)이 근간을 이루기 때문에병사의 모집을 위해서는 국가의 정확한 인구 파악이 선행되어야 한다인구관리는 국가가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 꼭 수행해야 하는 국가의 업무라고 할 수 있다.

인구관리가 국가의 업무인 것은 현대의 국가는 물론 전근대의 국가에서도 마찬가지였다현대 국가에서는 발달된 기술과 행정력으로 비교적 정확하게 인구 파악과 관리가 가능하다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생체 인식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개개인의 용모파악과 이동경로를 데이터 자료로 집적할 만큼 인구관리 기술은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전근대 국가에서는 현대 국가만큼의 기술과 행정력이 갖추어져 있지 않았지만국가나 문화권마다 독특한 인구관리 방식이 있었다일례로 중세 유럽에서는 로마제국의 성장과 함께 세속권을 넘어서는 권력을 가지게 된 가톨릭 교회의 교구가 곧 행정구역이 되어교구에 속한 신자들은 자연스레 교적에 등재되어 관리되었다국가의 행정력이 교회가 가진 종교적 힘에 의지하여 유지된 사례이다.

조선왕조에서 인구관리는 왜 필요했으며인구관리 방식은 어땠을까조선에서 인구는 세수를 확보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었다조선에서 정부는 백성에게 세금을 걷을 때 토지와 호구(戶口)를 기준으로 삼았다. ‘호구는 오늘날의 가구와 비슷한 개념인 와 인구와 비슷한 개념인 를 합한 말이다정부는 토지에서는 곡식(田稅전세) ‘에서는 국가 운영에 필요한 공물(貢物)을 걷고, ‘에서는 노동력인 역()을 징발하였다군사력의 유지는 특히나 역의 징발과 관련이 깊었다조선후기에 들어서는 양인 남자의 역은 바로 군역(軍役)’으로 인식되었다역의 정확한 징발을 위해서는 정확한 호구관리가 선행되어야 했다조선의 정부는 건국 초기부터 호구를 기록하는 호적을 만들어 3년에 한 번씩 호구 조사를 하는 것을 원칙으로 정했다조선시대의 호적은 국가재정을 떠받치는 세수를 위해 의미있는 존재즉 호역(戶役)과 신역(身役)을 지는 인정(人丁)을 파악하고 이들을 통제하기 위한 장부였다.

그러나 3년마다 호적을 정비하고 이를 바탕으로 세수를 확보한다는 기본 원칙은 잘 지켜지지 않았다호적을 만드는 작업 자체도 엄청난 물력과 인력을 요구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바뀌어 기록되어야 하는 정보는 제대로 반영되지 않고 이에 따라 호적 자체의 신빙성은 시간이 가면서 점점 낮아졌다더군다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문서의 소실 및 대규모의 인구 상황 변화로 호적에 있는 정보는 거의 유명무실의 상태가 되었다이를 만회하고자 인조대에는 호패법(號牌法)을 실시하여 급한대로 양인 남자에 대한 파악과 통제를 시도했으나 잔인한 법이라는 평가 속에 난항을 거듭하다가 결국 중지되었다.



■ 조선후기 전쟁의 영향과 17세기 오가작통법 시행 논의

두 번의 전쟁으로 조선의 경제적 기반은 거의 붕괴 상태나 다름없이 무너졌다전쟁 이후 본격적인 국가 재건 작업은 효종대부터 이루어졌다그것은 조선의 경제적 기반을 복구하고 국가 재정을 튼실하게 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것이었다여기에 더하여 북벌의 기치 아래 군사적 기반을 확충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로 부각되었다효종 즉위 이래 시행된 양병 정책들은 신설된 중앙군영의 군사 확보와 속오군의 정비가 뒷받침 되어야 했다이는 자연스레 군사 숫자의 증가를 필요로 하였다그러나 효종대에는 유난히 자연재해가 극심하였고전쟁 이후 국가의 경제기반이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들에게 해가 된다는 이유로 군액의 증설이 쉽게 되지는 않았다대신 조선 정부에서 주력한 부분은 기존에 정해졌던 군액을 충실하게 채우는 일이었다군역의 대상자인 양정(良丁)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호구조사가 선행되어야 했다호구조사를 위한 호적의 정비와 호패법은 이미 인조대에 시행하기에 부적합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군액을 채우기 위한 방식 중 효종대 후반 거의 합의점을 본 것은 바로 오가작통법이었다오가작통법은 조선 전기 세종대의 기록에 처음 보이고 단종대에 처음 실시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경국대전의 완성과 함께 법제화 되었으나본격적으로 시행이 검토된 것은 효종대 후반이었다효종대의 군사력 강화의 필요성은 군액 확보 시도의 동력이 되었으나백성의 어려움을 근거로 이에 반대하던 분위기를 전환시킨 것은 산림(山林)이었던 송시열(宋時烈)의 출사였다송시열은 병자호란 이후 조선에 만연했던 청나라에 대한 반감을 국가정체성 및 국가경영의 방향을 결정하는 이데올로기로 활용하는 데에 주도권을 가진 인물이었다따라서 송시열이 군사력 강화의 필요성에 동의하며 그 방법의 하나로 내세운 오가작통법은 진지하게 고려될 수 있었다그러나 효종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오가작통법은 다시 중단되었다이후 구체적인 조항의 마련과 함께 실제 시행이 된 것은 숙종대인 1675년이었다.

숙종 즉위 직후조정에서는 군역과 관련하여 호구조사를 강화하고 군역을 담당할 양정(良丁)을 확보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이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지속적으로 시도한 군액 확보 시도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다. 17세기 효종대 현종대를 거치면서 조선 정부는 빠른 속도로 호구수와 군액에 대한 파악 정도를 이전 수준으로 회복하였다조선 정부는 이렇게 파악된 군역 대상자들을 중앙 정부의 통제력 속에서 누락이 없이 확보하기 위하여 효종대 이래 논의된 오가작통법을 본격적으로 시행하였다윤휴(尹鑴)가 주도하여 오가작통법의 구체적인 시행 방식을 공표한 오가통사목(五家統事目)은 21개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그 면모를 자세히 알 수 있다.



■ 인적자원의 통제 수단오가작통법

숙종대의 오가통사목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오가작통법 시행의 우선적인 목적은 호구특히 역의 대상이 되는 양정의 확보와 통제였다여기에 더하여 오가작통은 그 자체로 민인의 편제 단위라는 의미도 있었다각각의 통이 면리(面里)의 하위 조직으로써호적에도 각 호구가 속한 통을 기록하도록 명시 되어있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무릇 민호(民戶)는 그 이웃을 따라 가구의 많고 적음이나 재력의 빈부를 막론하고 5()마다 1()으로 삼는다라는 위의 오가통사목의 첫 번째 조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오가작통이란 말 그대로 다섯 가를 한 통으로 묶은 조직이다이렇게 5가를 1통으로 하는 최소 편제단위를 설정하고 이 조직을 책임질 우두머리(統首)를 정한 이유는국가가 인적자원의 이탈 및 은닉을 방지하여 안정적으로 세수원을 확보하기 위해 그 책임을 통수에게 지운 것이다호구를 보다 효율적이고 확실하게 통제하기 위해서이다.

보다 용이한 통제를 위해서는 한 통으로 묶은 가호끼리 인접한 위치에 있어서 서로를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그렇기 때문에 오가통사목에서는 되도록 5가는 닭이나 개가 짖는 소리가 들릴 정도의 이웃에 모여 살면서 서로 돕고 감시하도록 규정하였다. ‘독립 가호로 떨어져 산다면 감시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기 어렵기 때문에 같은 통 안에 속한 가호들끼리는 인접해 거주하도록 규정하였다가호끼리의 물리적 거리를 규정하는 것 말고도 백성의 이탈을 방지하기 위한 통제 수단은 다양하게 규정되었다.

우선 거주지를 이전할 때에는 반드시 옮겨가는 지방과 그 이유를 통 내에서부터 관청까지 보고하고이주에 대한 허락을 받아야 했다그렇게 하여 거주지를 이전하면 옮겨간 지방의 관청에 이주허가문서를 보이고 이것을 확인받은 다음에 정착할 수 있었다만약 이러한 절차를 생략한 채 국가의 통제를 벗어난 사람이 있다면 처벌하고 정착해서 살게 하였다거주지의 이전이 국가의 감시하에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는 백성의 유랑이나 도망으로 인하여 국역(國役)의 대상이 감소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이는 역의 징발을 피하기 위해 고의로 거주지를 옮겨 다니면서 생활하는 경우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조선 정부는 이런 사례가 많이 생긴다면 역 징발에 어려움이 생기므로 최대한 미연에 방지할 필요가 있었다.

통 안의 16세 이상의 남성은 반드시 자신의 거주지와 이름 및 나이를 적은 신분증을 관청에서 공증을 받아서 지니고 다녀야 했다이것이 없다면 관청에 공적인 일이 있을 때나 소송을 할 일이 있을 때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다한마디로 한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람이 된다는 의미였다이것은 통 내의 구성원 정보를 기록한 통패(統牌안에 없는 사람의 경우 소송을 할 수 없으며 타인이 그를 살해해도 죄가 아니라고 하는 데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국역의 의무를 질 대상으로서 국가의 통제 안에 있지 않으면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통 내의 사람 중 범죄의 이력이 있거나 출생과 신분 등의 정보가 분명하지 않은 경우가 있다면 책임자인 통수가 반드시 관청에 보고해야 했다만약 이런 규정을 무시하고 보고하지 않는다면 그 책임은 모두 통수가 지고 통의 구성원이 연대책임을 지도록 했기 때문에통수는 통 구성원에 대한 지속적인 감시와 보고를 게을리할 수 없었다.

오가통사목의 조항은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국가의 인적자원 통제 기능이 집적된 것이었다조선후기 지방 통치제도의 성격은 중앙집권력의 확대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발달했다고 이해되곤 하였다중앙이 지방의 자원을 통제하여 일원적인 통치체제를 구축하려는 시도는 면리제와 같은 행정구역의 세분화와 향촌 단위까지 내려가는 지배기구의 성립이라는 조선후기 역사적 현상에 의하여 증명된다달성하려 하는 목표였다오가작통법의 시행도 이런 중앙집권력의 강화라는 맥락에서 이해되었다지방 곳곳까지 중앙정부의 대민통제가 미치는 제도의 시행이라는 의미가 오가작통제를 이해하는 방식이었다.

그렇다면 현실적으로 오가작통법을 시행한 조선은 국가 시스템의 통제와 감시가 백성들의 삶을 관통하는 침투력이 높은 국가였을까어떤 제도의 시행 목적과 시행 결과의 역사적 의미는 다른 차원이다오가작통제 시행 목적과 계획이 담긴 오가통사목은 그 자체로는 조선정부의 양정의 안정적 확보를 위한 집권력 강화 의지를 읽을 수 있다그러나 향촌사회 지배를 위하여 해당지역 사족들의 협조가 필수적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조선정부의 대민 침투력의 레벨에는 한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이러한 현실을 반영하듯 오가통사목에는 통 내부의 가호 단위끼리 상호 협동을 통한 자족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장려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통 내의 가호들은 농사일을 서로 돕고 농기구나 소를 서로 빌려주는 등 생산을 위한 협동 단위로 지정되었다또한 토목공사가 필요한 사안이 생기면 노동력을 조직하여 마을단위로 해결해야 했는데도랑이나 둑을 건설하고 다리를 건설하거나 길을 놓는 일이 여기에 해당했다이러한 자구력이 실효성이 있으려면 평소 교육을 통하여 이들끼리의 협동심이나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을 키울 필요가 있었기에 오가통사목에서는 향약의 자치규율(덕업상권환난상휼예속상교과실상규)의 4대 강목을 차용하여 통치의 효율성을 꾀하였다도덕심을 장려하는 조항은 범죄를 예방하고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을 키워 백성의 거주지 이탈과 은닉을 방지하는 효과를 노린 것이다.

오가작통제는 조선 정부가 인적자원특히 군역자원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양정의 파악과 통제를 위해 실시한 제도이다이것은 행정력을 영토 곳곳에 최대한 침투시켜야 하는 조선 정부의 입장에서 볼 때통을 활용하여 정부가 수행해야 하는 일을 대리하게 하면서 인적자원의 누락을 방지한다는 점에서 효율성을 가진다이는 집권력의 한계가 있었던 전근대 국가의 통치 방식 중 하나였다.


 

오영교, 2001, 조선후기 향촌지배정책 연구혜안.

손병규, 2007, 호적(1606-1923) - 호구기록으로 본 조선의 문화사휴머니스트.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 개인의 견해이므로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의 공식적 의견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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