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희가 쓴 가장 중요한 기초 학습서
- 『소학(小學)』 -
사진 : 『소학집주』 (一簑古181.1-So25)
원문과 번역
1. 『내칙』에 말하였다. “자식이 부모를 섬기되, 닭이 처음 울거든 모두 세수하고 양치질하며, 머리를 빗고, 머리싸개(縰)를 쓰고, 비녀를 꽂고 상투를 하고, 머리카락에 먼지를 털고, 관을 쓰고, 갓끈을 매어 늘어뜨리고, 현단복(端)을 입고 슬갑(韠)을 차고 띠를 매고, 홀을 꽂으며 좌우에 작은 용품들을 차고, 각반을 매고 신을 신고 끈을 맨다”
1. 內則曰 子事父母 雞初鳴 咸盥漱 櫛縰笄總 拂髦 冠緌纓 端韠紳 搢笏 左右佩用 偪屨著綦 『禮記』「內則」
며느리가 시부모를 섬기되 친정부모를 삼기듯이 하여, 닭이 처음 울거든 모두 세수하고 양치질하며, 머리를 빗고, 머리싸개(縰)를 쓰고, 비녀를 꽂고, 상투를 하고, 옷을 입고 띠를 매고, 좌우에 작은 용품들을 차고, 향주머니를 매고, 신에 끈을 맨다.
婦事舅姑 如事父母 雞初鳴 咸盥漱 櫛縰笄總 衣紳 左右佩用 衿纓綦屨
부모와 시부모가 계신 곳에 나아가되, 계신 곳에 이르면 기를 낮추고 소리를 부드럽게 내며 옷이 따뜻하신지 추우신지를 여쭙고, 병들어 아프거나 피부병으로 가려우시면 공손히 만져드리고 긁어드리며, 나아기서나 들어오시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여 공손히 부축하여 붙들어드린다.
以適父母舅姑之所 及所 下氣怡聲 問衣燠寒 疾痛苛癢 而敬抑搔之 出入則或先或後 而敬扶持之
세숫물을 올릴 적엔 어린이는 대야를 받들고 장성한이는 물을 받들어 물을 부어 세수하시기를 청하고, 세수를 마치시면 수건을 드린다. 잡수시고 싶어하시는 것을 여쭈어 공손히 올리되, 얼굴빛을 온순하게 하여 받들어서 부모와 시부모가 반드시 맛보신 뒤에야 물러나온다.
進盥 少者 奉槃 長者 奉水 請沃盥 盥卒授巾 問所欲而敬進之 柔色以溫之 父母舅姑必嘗之而後 退
남녀가 아직 관례를 하지 않았거나, 비녀를 꽂지 않았다면, 닭이 처음 울 때 모두 세수하고 양치질하고, 머리를 빗고 머리싸개(縰)를 매고, 머리카락에 먼지를 털고, 머리를 뿔 모양으로 묶고, 향주머니를 매고, 새벽에 부모님을 뵙고 무엇을 잡수시고 싶으신지 여쭈어서, 이미 잡수셨다면 물러나오고, 잡수시지 않으셨다면 장자를 도와 음식 장만을 보살핀다.
男女未冠笄者 雞初鳴 咸盥漱 櫛縰 拂髦 總角 衿纓 皆佩容臭 昧爽而朝 問何食飮矣 若已食則退 若未食則佐長者視具
『소학집주』 권2, 明倫 第二
| 『소학』은 어떤 책인가 |
『소학』은 남송대(南宋代) 주희와 그 제자인 유청지 등이 편찬한 기초 학습서이다. 『소학』은 유학이 과거시험 준비를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는 현실을 바로잡고, 당시 널리 유포된 불교・도교에 대응하고자 편찬되었다. 주희는 만년에 접어들어, 어린이와 처음 공부를 시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종래의 문헌들을 보완하고 정리하며, 자신의 학문을 집약하였는데, 『소학』은 그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서적이었다.
『소학』은 간행 초기에는 주희의 제자들 사이에서만 읽히던 책이었다. 하지만 원대(元代)에 주희의 학문이 국가에서 공인되면서 널리 유행하게 되었다. 원(元) 세조는 당시 국가의 중심 교육기관이었던 국자학에 입학한 생원들에게 반드시 『소학』을 읽게끔 했는데, 이 과정에서 『소학』은 중국 전역에 퍼져나갔다.
| 『소학』은 어떤 내용인가 |
사진 : 『소학집주』(一簑古181.1-So25) 016a,b쪽
『소학』은 내・외 2편으로 나뉘어져 있다. 내편은 입교(立敎)・명륜(明倫)・경신(敬身)・계고(稽古)로 4권이, 외편은 가언(嘉言)・선행(善行)으로 2권이 나뉘어져 있어 총 6권이으로 된 책이고, 전체 386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중 입교・명륜・경신편은 대부분이 유교 경전에서 나온 말들을 모은 것인데, 입교편은 스승의 입장에서 제자에게 가르쳐야 할 것들이 쓰여져 있다. 구체적으로는 태교부터 할 일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남성은 그 후로 관직에 나아가는 과정까지 해야 할 것들이, 여성은 결혼 시기까지 배워야 할 것들이 기록되어 있다. 동시에 제자의 입장에서 배워야 할 자세가 기록되어 있는데, 중국 고전에 나오는, 반드시 배워야 하는 기본 소양들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명륜편은 오륜(부자・군신・부부・장유・붕우)에 대해 다루고 있고, 경신편은 마음을 수양하는 법[心術]・위엄있는 거동[威儀]・의복・음식에 대해 다루고 있다. 계고편은 고전의 순임금에서 공자 시기까지 유교경전에 나오는 인물들 중 입교・명륜・경신에 해당하는 것들을 모은 것이다. 외편의 가언편은 한~송대에 이르는 현인들의 중요한 어구들을 모아서, 계고편의 내용을 보충하고 있다. 선행편은 한~송대 인물들의 모범되는 행적을 모아 제시한 부분이다. 그 중 핵심이 되는 부분은 명륜・경신편인데, 전체 386장 중 명륜은 226장, 경신은 120장을 차지하고 있고, 그 내용 또한 오륜 등 유교윤리의 핵심인 것으로부터 이를 알 수 있다.
『소학』은 유교 경전의 인용・편집으로 이루어진 책이었다. 주희는 『소학』의 서두 부분을 제외하고는 스스로의 의견을 쓰지 않았다. 그 대신, 내편에는 『예기』 『논어』 『맹자』를 중심으로 유교 경전을 인용했고, 외편에는 북송대의 유학자 정호(程顥)・정이(程頤) 형제를 중심으로 한 유학자들의 인용문으로 내용을 구성해 내편을 보충하였다.
『소학』의 인용은 주희가 『소학』 저술에서 어떤 학문적 고민을 거쳐갔는지를 보여준다. 주희는 『소학』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입장이 『예기』로 대표되는 고전에 충실한 것임을 보여주고자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주희는 『소학』에서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고전의 구절과, 이후의 유학자들의 서술들을 요령껏 배치하는 것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간접적으로 드러냈다. 특히 주희는 『예기』・『논어』・『맹자』와, 북송시기 유학자 정호・정이 형제를 중요하게 인용했다. 그 결과 주희의 『소학』에서는 『예기』와 정호・정이의 글들이 동시에 크게 다루어지게 되었다. 이 과정을 통해 『소학』에는 주희의 말이 거의 없었지만 주희의 생각이 자연스럽게 표현될 수 있었던 것이다.
주희가 『소학』을 통해 강조하고자 한 것은 일상생활의 윤리적 실천을 기초로 한 심신의 수양이었다. 『소학』은 그 내용상 주희의 심성・예에 대한 핵심적인 문제의식을 담고 있는 만큼, 아직 미성숙한 아동에서부터, 이들을 가르쳐야 할 성인들에 이르는 광범위한 대상까지를 대상으로 한 책이었다. 이에 따라 특히 조선의 『소학』 보급과정에서는 아동들뿐만 아니라 성인들까지도 『소학』의 내용을 익히곤 했다. 『소학』의 보급은 지식인 개인・집단의 차원에서는 송나라 시기의 불교적 자기수양을 대신할 수양의 방법을 가르치는 효과를 가졌고, 지역사회 및 국가의 차원에서는 일상적인 윤리를 준수하면서, 자연스럽게 지배층들에게 순응하게 되는 효과까지 기대하였다.
| 중국의 다양한 『소학』 주석서들 |
사진 : 『소학집성』(古181.1-H11s) 052a,b쪽
『소학』은 주희가 처음 저술한 이래, 오랜 기간에 걸쳐, 다양한 주석서로 그 뜻이 해설되었다. 이들은 모두 『소학』을 정확히 이해하기위해 쓰여졌다. 하지만 주희의 『소학』도 그랬던 것처럼, 각각의 주석서가 쓰여진 시대, 주석을 쓴 사람들의 관심사에 따라 주석서별로 그 해석의 초점 또한 서로 달랐다.
중국에서 편찬된 『소학』에 대한 주석・해설서는 다양하다. 하지만, 고려・조선에 전파되는 큰 흐름까지를 생각하면 가장 중요한 것은 원대 하사신(何士信)이 편찬한 『소학집성』과 명대 정유(程愈)의 『소학집설』이다. 하사신이 편찬한 『소학집성』의 주석에서는 예절의 유무로 야만과 문명이 나뉜다는 부분이 강조되었다. 그에 비해 정유의 『소학집설』의 주석에서는 국가가 강조되었고, 가부장제도 크게 부각되었으며, 『소학집성』에 비해 정호・정이・주희의 학문론이 더 강화되었다. 이들 주석서들은 세종대에는 『소학집성』이, 성종대에는 『소학집설』이 유행하였다.
| 『소학』의 고려・조선 보급과정 |
사진 : 『소학집설』(古貴181.1346-J868s-v.4) 0007,0008쪽
『소학』은 원 간섭기 무렵부터 한반도에 전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 말부터 이색・이숭인 등의 유학자들에 의해서 그 내용이 중시되었다. 공적인 영역에서 『소학』 교육이 강조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 건국 이후부터이다. 원에서 온 귀화인 출신 지식인인 설장수는 태조대 사역원 제조로서 역관 양성의 기초교양으로 『소학』 학습을 강조하였으며, 정종대에는 역관 양성의 교재로 사용하기 위해 『소학』을 구어체로 풀이한 『직해소학』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소학』은 태종대 권근이 올린 「권학사목」을 거쳐 문관 교육의 기초로 강조되었다. 권근은 『소학』을 서울과 지방의 학교에서, 지배층에서 서민의 자제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배워야하며, 생원시에 응시하기 위해 외워야 하는 필수 과목으로 강조하였다.
그러나 『소학』은 조선 초기까지 유생들에게 크게 호응을 얻지 못했다. 15세기 초 중앙 조정에서는 『소학』을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형식적으로만 읽는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학교의 생도들은 『소학』이 일상의 일만을 가르치는 유치하고 진부한 것이라 생각했고, 당시까지의 과거시험에서 문장 짓기인, 제술(製述)이 훨씬 중시되었던 것도, 『소학』이 유생들에게 큰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한 이유였다.
그럼에도 조선 조정에서는 지속적으로 『소학』을 널리 보급하기 위한 시도를 이어나갔다. 세종대는 『소학집성』을 도입해 본격적으로 활용했다. 세종 7년에는 『소학집성』을 중국에 가는 사신을 통해 100질을 구입하는 등, 적극적으로 판본의 수량 확보에 주력하였고, 국내의 간행 또한 지속적으로 시도되어, 세종 17년 4월에는 1만여본을 간행할 것이 건의되기도 하였다.
『소학』은 15세기 말에 이르러 중앙의 교육・과거제도를 넘어 지역의 지식인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이 당시에는 성종 22년(1491) 『소학집설』이 조선에 도입된 이후 사림들에게 주목을 받았다. 당시 남효온 등을 중심으로 한 김종직의 제자들은 ‘소학계’라는 친목 모임을 만들어, 『소학』에 관심있는 사람들을 모아 『소학』을 배우고 가르쳤다. 특히 그 일원이기도 하였던 김굉필은 스스로를 ‘소학동자’라고 자칭할 만큼 적극적으로 『소학』을 삶과 학문의 중심으로 삼고자 했다. 『소학』의 보급은 이들의 제자였던 조광조에 이르러 더욱 활성화되었는데, 조광조는 중종대 정치 현장의 중심에서 활동하면서 국왕과 대신들에게 적극적으로 『소학』 을 배우게 권장하였다. 이에 따라 중종 11년(1516) 『소학』교육이 전국적으로 추진되었다. 중종은 “송대에 주자가 『소학』을 저술한 덕택에....영원히 스승들은 이 책으로 가르칠 수가 있고, 배우는 사람들은 이 책을 본받아 익힐 수 있다. 일상의 인륜(人倫)에 절실하고 교학의 본령이 되는 것 중에 이 책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고 하여, 소학의 중요성을 다시금 확실시하였다. 나아가 같은 교서를 통해 『소학』을 시급하게 간행・보급하여 전국의 학교와 시골 촌락까지 학습할 수 있게끔 하였다. 스승이 후진들을 가르칠 때는 물론, 가족 내에서 부모형제가 아이들을 가르칠 때, 조정에서 과거를 보는 때에 이르기까지 『소학』을 우선시하도록 강조하였다.
조광조・중종이 주도한 『소학』 보급 또한 기묘사화 후 당대의 정치적 반대자들에게 반발을 샀다. 하지만 중종대 『소학』 교육의 추진은 이전까지와는 다른 의미로 크게 발전된 정책이었다. 중종대부터 『소학』을 반드시 익혀야 하는 이유・목표가 체계화되기 시작했고, 관학을 넘어 향촌의 어디서나, 가족공동체 내에서까지 『소학』을 가르쳐야 한다는 주장으로 발전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 『소학』과 관련된 사업으로는 중종 13년(1518)간행된 『번역소학』 간행 또한 주목된다. 당시의 정치를 주도하던 기묘사림들은 『소학』을 한문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게까지 보급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소학집설』을 근간으로 언문으로 이를 풀이한 번역서가 출간되었던 것이다.
사진 : 『소학제가집주』 (一簑古貴181.1-So25a-v.6) 002a,b쪽
결국 『소학』은 선조대에 이르러 조선에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 결과 선조대 이황・이이 등에 의해 재차 『소학』 보급이 정책적으로 추진되었다. 이황은 『성학십도』 속 「소학도」를 포함하여, 성리학의 전체 체계 내에서 『소학』의 위상을 정립하였고, 새로운 주석서 『소학집주』를 편찬하였다. 이이의 『소학제가집주』(이하 『소학집주』)는 『소학집설』에서 보다 국가의 힘을 덜 강조하였고, 가부장제에 대한 관심은 적극 반영하였다. 나아가 주희 이후 등장한 천리(天理) 인욕(人欲)과 같은 개념 또한 더욱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소학집주』는 그 편찬 이후 조선에서의 새로운 『소학』 관련 주석서의 표본이 된다. 그 외에 선조대에는 『소학언해』가 새로운 소학 언해서로 간행되었다. 이는 종래 『번역소학』보다 주희가 제시한 원문의 가치를 더욱 중시하는 방식으로 수정되었다. 종래 의역이 섞여있던 『번역소학』을 당시의 사정에 맞게 원문의 의미를 살린 직역 위주로 전환하였고, 『번역소학』에서 『소학집성』의 방식이 일부 차용된 것이 더욱 『소학집설』에 가깝게 변개되는 등 원문에 더욱 가깝게 번역되었다.
현종대 이후로는 선조대의 『소학』서술들이 수정・보완되는 과정을 겪는다. 이후 『소학집주』가 숙종대 어제 서문을 첨부하고 일부 수정을 거쳐 다시 간행되었고, 현종대에는 『소학언해』가 『소학집주』의 서술에 더욱 가깝게 또 다시 수정을 겪었다. 영조대에는 『소학훈의』가 『소학언해』의 수정을 참고하여 새롭게 편찬되었고, 『소학언해』가 또다시 『어제소학언해』로 다듬어지기도 했다.
이처럼 『소학』은 조선시기 전체에 걸쳐 그 보급에 대한 고민이 이어진 책이었다. 『소학』은 비록 15세기 초에는 지식인사회의 호응이 미진했고, 16세기 이후부터 국가・사회 전반에 걸친 적극적인 간행이 이어졌지만, 그럼에도 중앙 관료들을 중심으로, 조선의 실정에 걸맞은 『소학』의 주석서를 채택・편찬하고, 이를 보급하고자 하는 의지는 꾸준히 이어지고 있던 것이다.
| 참고문헌 |
김준석, 1981, 「조선전기의 사회사상-『소학』의 사회적 기능 분석을 중심으로」, 『동방학지』 29
정호훈, 2014, 『조선의 소학』, 소명출판
이정민, 2013, 『조선시대의 『소학』 이해 연구』,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윤인숙, 2016, 『조선 전기의 사림과 소학』, 역사비평사
진원, 2017, 『주자의 소학론과 한·중에서의 변용』, 민속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