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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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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지식정보 모음집

- 『고사촬요(攷事撮要)』 -

 

 

 


사진 : 고사촬요』 ( 一簑古貴327.51-Eolga)

 

 

 

 

 

지식과 정보를 얻는 방법

 

사람이 지식과 정보를 얻는 데에는 다양한 방법이 있다. 알고자 하는 내용에 정통한 사람에게 직접 질의를 하는 방법이 있는가 하면 글과 책과 같은 문자 매체를 참고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현대에는 문자에서 영상으로 확대된 범위의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전통시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기간 동안 가장 보편적으로 활용되어왔던 방법은 뭐니뭐니해도 책을 통해 얻는 방식이 아닐까 한다.

책 중에도 지식과 정보를 모으고 정리하여 찾아볼 수 있게 하는 것 자체가 편찬의 목적인 책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유서(類書)이다. 동아시아 유서의 기원은 중국에서 찾을 수 있는데, 사물을 포괄하되 분류를 하여 각 세목 아래에 그에 관한 문구를 집록하는 체재였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중국에서 들어온 유서들을 참고로 지식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국내외의 책들을 두루 섭렵하여 유서를 활발히 펴내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에서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유서로 꼽히는 것이 바로 1554(명종 9) 어숙권(魚叔權)이 펴낸 고사촬요(攷事撮要)이다. 고사촬요는 조선시대 대외관계의 기본원리인 사대교린(事大交隣)과 관계된 내용을 중심으로 하지만 그밖에도 여러 분야의 지식과 정보를 담고 있다. 이 글은 고사촬요의 세 가지 측면을 축으로 살펴볼 것이다. 먼저, 이 책이 첫 간행 시점에서 성립된 부동의 저작물이 아니라 여러 차례의 변모와 함께 이어져갔음을 살펴보고, 나아가 그렇다면 이 책에는 실제 어떤 내용들이 실려있었는지, 그리고 이 책이 당대 사람들에게 어떻게 인식되고 있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 책의 독특한 점은, 어숙권의 원찬 이래 200여 년간에 걸쳐 수 차례의 증보가 있었으며 그 증보의 때마다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고사촬요의 간행과 증보

 

           

연도

편찬자·증보자

체재

 

1554(명종 9)

어숙권

불명

 

1585(선조 18)

허봉

·2

 

1612(광해 4)

박희현

·2

 

1636(인조 14)

이식

··3

 

1674년경(현종 15년경)

증보자 불명

··3권 및 부록

 

1734년 전후(영조 10년 전후)

증보자 불명

4

 

1771(영조 47)

서명응

15

 

출처 : 정호훈, 2013 조선 관료에게 필요한 모든 지식을 담다」 규장각 교양총서 9 실용서로 읽는 조선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엮음·정호훈 책임기획), 글항아리, 23면 표의 일부를 인용

 

 

어숙권이 편찬한 최초의 고사촬요의 내용이나 체재는 1554년 간행된 해당 판본이 현재 전하지 않아 확인할 수 없다. 다만 가장 가까운 시기의 후속 판본들을 통해 가늠해보는 것이 가능할 뿐이다. 특기할 점은 임진왜란 이전의 고사촬요초기 버전에서는 조선 전국의 각 지방이 소유하고 있는 책판 목록을 실어두고 있었다는 점이다. 임진왜란 후의 책들에서는 이 부분이 삭제되었다. 전란 중에 많은 책판들이 소실되거나 훼손되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빠지는 내용이 있는가 하면 더해지는 내용은 더 많았다. 증보를 거듭하면서 다양한 분야에 속하는 지식과 정보가 보태졌고 분량은 늘어났다.

 

 

 

 

사대교린관련 내용이 많았던 까닭은

 

원 편찬자인 어숙권은 조선 명종대의 학자로, 호는 야족당(也足堂), 본관은 함종(咸從)이다. 어숙권은 승문원(承文院) 이문학관(吏文學官)으로 오래 일했는데, 승문원이란 사대교린(事大交隣)에 관한 문서를 담당하는 관서였다.

어숙권이 쓴 고사촬요서문을 살펴보면 이 책의 편찬의 동기와 경위를 알 수 있다. 고사촬요는 중국의 사림광기(事林廣記)거가필용(居家必用)(원대 널리 보급된 백과사전류의 서적이다-필자)의 편찬 취지에 입각해 조선의 제왕역년기(帝王歷年紀)요집(要集)(두 책 모두 편찬자는 미상이다-필자)을 근거로 하고 당시의 사정에 맞게 보태어 편찬한 것으로, 사대교린에 관한 것을 위주로 하고 기타 일용에 관한 것을 부수적으로 정리하였다고 한다. 두 책을 전거로 삼고 널리 살피고 현재 실행하는 것을 참고하되 조선시대 사회에 있어 향대부와 서리는 물론 누항에 사는 선비에 이르기까지 응당 알아두어야 하는 가장 절실한 것을 추려 책을 폈다는 것이다. 여기서 사대교린이 위주가 된 것은 앞서 살펴보았듯 어숙권이 승문원과 연이 있었던 것과 관련지어 생각할 수 있다.

고려대학교에 소장되어 있는 1576년 을해자본 고사촬요를 보면, 앞부분은 명나라 및 조명관계의 역사를 서술하는 대명기년(大明紀年)이라는 대목으로 시작되고 사대교린과 관계된 내용으로 일본 사신을 접대하는 예(접대왜인사례), 일본 사신들이 상경하는 경로(왜인조경도로), 여진 사신을 접대하는 예(접대야인사례) 등이 연달아 실려있다. 조선과 명과의 사대관계, 조선과 일본·여진 등의 교린관계를 망라하고 있어 승문원에 오랜기간 근무했다고 하는 원저자의 배경을 잘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이후 증보가 있을 때마다 국제관계와 정세가 변해갔기 때문에 사대교린에 관한 내용의 정도도 일련의 변화를 겪었다. 대명기년은 그 기록의 하한선이 증보 때마다 변동이 생겼다. 병자호란으로 명과의 관계가 단절되게 된 이후의 증보판의 경우에는 대명기년자체가 삭제되지는 않았으나 그 하한은 인조 13년으로 고정되었으며, 접대야인사례와 같은 내용은 현실적으로 쓰이지 않는 내용이 되었다.

이렇듯 사대교린에 관한 내용으로 책이 시작되고 또 많은 비중을 차지했던 점에서, 고사촬요가 유서, 즉 백과사전류의 도서임에도 사대교린에 관한 책이라고 일컬어진 경우가 간혹 있었던 이유를 짐작케 한다. 고사촬요는 시대가 요구하는 지식이나 정보가 달라짐에 따라 수 차례 증보되는 가운데 사대교린에 관한 내용이 아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그 내용이 낡고 예전의 것이 되면서 다른 지식 정보들의 비중이 높아져 갔다.

 

 

 

 

행정실무와 일상생활에 미치는 유용한 지식들

 

고사촬요에는 사대교린 관련 외에 또 어떤 지식·정보들이 실렸을까? 규장각에 소장된 17세기 중반에 간행된 고사촬요 판본(청구기호 가람327.51-Eolg-v.1-3)을 토대로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자.

먼저 행정실무와 관련된 여러 정보들이 집적되어있다. 예를 들어, 양전법(量田法)을 토지 측량에 쓰는 자 그림을 동원하여 설명해둔 것이나, 형벌인 태형(笞刑장형(杖刑)과 관련하여 속전을 받을 때의 규정, 양형에 있어 감등(減等)할 때의 지침, 행형(行刑)을 금하는 날, 매매의 제한, 결송(決訟)의 기한과 같은 내용이 실려있다. 실무에 참고할 수 있는 실용지식들이 간단한 매뉴얼의 형태로 열기되어 제공되고 있는 것이다. 산수법이라는 항목 하에 구구수(九九數)라고 하여 지금의 구구단과 같은 것도 실려있는데, 이 역시 실무와 관계된다고 할 것이다.

 

 


고사촬요』 〈산수법-구구수(算數法-九九數)〉 

가람327.51-Eolg-v.3073b-074a

 

 


고사촬요』 〈양전법(量田法)〉 

가람327.51-Eolg-v.3030b-031a

 

 

고사촬요에는 약초의 사용이나 치료에 관한 실용적 지식 또한 담겨 있다는 점에서 조선시대 한의학 서적 중 하나로 언급되기도 한다. 여러 병증을 다스리는 요법들이 실려있기 때문인데, 이질·학질을 다스리는 법, 흉복통을 다스리는 법, 더위 먹음을 다스리는 법 등 질환을 치료하는 법이나 두창 경험방(經驗方), 우역(牛疫)을 다스리는 법까지 폭넓게 수록하고 있다.

식생활과 관련된 내용도 보인다. 아래를 보자.

 

 

소국주(小麴酒)는 깨끗이 쓿은 멥쌀 1말을 매 씻어가루를 만들어 

질그릇 동이에 담고 정수 2병을 붓고 끓인다.

골고루 섞이도록 고르고 식은 뒤에 빻은 누룩 15홉과 섞는다.

7일째가 되면 깨끗이 쓿은 쌀 2말을 전과 같이 잘 씻어 두고,

먼저 물을 끓여 쌀 1말당 물 2병을 고루 섞고 식힌다.

먼저 빚은 술밑과 섞어 독에 넣는다.

3·7일이 되어 맑게 가라앉은 뒤에 쓴다.

 

 

기록의 상세함의 정도로 보자면 지금 당장이라도 따라 만들 수 있는 레시피라고 하기에 손색이 없다.

그 밖에 창고를 만들거나 고칠 때의 길일, 입학의 길일, 벌목할 때의 길일, 노비를 들일 때의 길일 등 다양한 경우의 택일 요령을 다룬 선택(選擇)항목도 있으며, 풍수지리가 일반에 널리 참고되고 있었던만큼 길한 방향에 관한 내용도 실려있다.

이렇듯 조선 사람들에게 있어 관직생활은 물론 일상생활에 유용한 실용적인 지식들이 풍부하게 실렸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이웃 국가들의 관심을 받게 된다. 현종실록의 현종 5년 윤63일 기사에 따르면 왜인이 고사촬요를 구입하고자 하였는데 허락지 않은 일이 있고, 영조 24년 통신사 사신단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온 조명채의 사행록 봉사일본시문견록(奉使日本時聞見錄)에는 고사촬요여지승람, 징비록이 이미 일본에 들어와있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이 입수하고자 노력했던 책 중에 고사촬요가 있었던 것에는 교린관계를 맺고있는 일본에 대한 기술이 담겨있다는 사실도 영향을 미쳤겠으나 그 안에 담긴 지식정보들이 실제로 조선사회를 파악하는데 긴요한 내용들로 구성되었다고 인정받았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중국으로 역시 이 책이 전래된 정황이 보인다. 선조실록선조 31105일 기사에 우리나라의 묘호는 천조인(天朝人, 명나라 사람)으로서 모르는 이가 없고, 여지승람고사촬요가 중국으로 몹시 많이 흘러 들어갔습니다라는 내용이 실려있다. 지리서 여지승람, 유서 고사촬요는 나란히 이웃국가에서 조선의 사정을 파악하기 위해 입수하고자 바랐던 책들이었다고 하겠다.

 

 

 

 

고사촬요에서 고사신서

 

그렇다면 고사촬요의 개별 기술 수준이 뛰어났을까? 그렇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책에 기술된 내용의 오류나 미비의 지적은 실록이나 여러 문집들 속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고사촬요의 변모의 양상은 18세기에 가서 큰 전기를 맞는다. 1771(영조 47), 서명응은 고사촬요를 크게 개편하여 내놓는다. 서명응은 정조의 스승으로도 잘 알려져있는데, 그의 가문에서는 이러한 유서 편찬의 전통을 이어가게 된다. 아래의 범례를 보면 서명응의 문제의식이 잘 드러난다.

 

 

고사촬요는 중국과 조선 사이 사신이 오고간 사실이 절반을 차지하나,

인사에 긴요한 것은 많이 빠져있다

어숙권이 이문학관으로서 사대문자(事大文字)를 찬술하는 일을 맡아 

상고하는 책을 만들고자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지금은 모두 생략하고 인사에 매우 중요한 것으로 대신했다.

 

(서명응, 고사촬요범례)

 

 

구성은 천도문, 지리문, 기년문, 전장문, 의례문, 행인문, 문예문, 무비문, 농포문, 목양문, 일용문, 의약문 등 12개 항목으로 하여 그야말로 크게 탈바꿈했고, 15권의 분량에 담겼다. 그리고 마침내는 고사신서(攷事新書)라고 하는 새로운 제목을 붙임으로써 성격을 분명히 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고사촬요라는 책은 명종대 처음 세상에 나온 이래로 오랜 시간에 걸쳐 내용이 더해지거나 빠지거나 하면서도 생명력을 지니며 이어졌다. 그것은 실용서적으로서 기존 틀의 유용함이 널리 인정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이 책을 펼쳐놓고 참고하면서도 그 내용이 정확한지 여부를 확인하는 작업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러한 지식활동과 지적탐구의 태도는 이 책의 증보가 끊임없이 나오게 한 원동력이었다. 나아가 조선후기 더 많은 유서들이 활발히 편찬되어 나오는 데 상당한 밑거름이 되었다.

 

 

 

 

 

 

참고문헌

 

김치우, 1972 攷事撮要版種考」 『한국비브리오1.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엮음, 2013 규장각 교양총서 9 실용서로 읽는 조선, 글항아리.

심경호. 2018 조선시대 지식정보 휘집 편찬물의 연구를 위한 초보적 탐색」 『한국사상사학59.

경석현. 2021 18세기 후반 攷事十二集의 편찬 경위와 내용」 『한국문화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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