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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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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은 왜 『불씨잡변(佛氏雜辯)』을 썼을까?


 


 

 


불가의 걸식하는 것에 대한 변

사람에게 있어서 먹는다는 것은 큰 일이다. 위로 천자와 공경대부는 백성을 다스려서 먹고 살고, 아래로 농부공장상인들은 힘써 일해서 먹고 살며, 가운데인 선비는 들어가면 효도하고 나오면 공경하며 선왕의 도를 지키고 후일의 학자를 기다림으로써 먹고 산다. 이는 옛 성인들이 하루라도 구차하게 먹으면 안된다는 것을 알아서, 위로부터 아래에 이르기까지 각각 그 직()을 가지고 하늘의 양육을 받음으로써 백성이 범하는 것을 방지하는 바가 지극하였다. 이러한 경우에 속하지 않은 자는 간사한 백성이니 왕법으로 반드시 죽여서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다.

 

食之於人 大矣哉 上而天子公卿大夫 治民而食 下而農工商賈 勤力而食 中而爲士者 入孝出悌 守先王之道 以待後之學者而食 此古之聖人 知其不可一日而苟食 故自上達下 各有其職 以受天養 其所以防民者至矣 不居此列者 姦民也 王法所必誅而不赦者也

 

금강경에 이르기를, “그 때 세존께서 식사 때가 되어 옷을 입고 바리때를 가지고 사위성에 들어가 그 성 안에서 걸식하였다.” 하였다. 대저 석가모니라는 사람은 남녀가 같이 사는 것을 옳지 않다고 하며, 인륜의 밖으로 나가서 농사일을 버리고, 삶을 사는 근본을 끊고는 그런 도로써 천하를 바꾸려고 생각한다. 그 도와 같은 것을 믿으면 천하에 사람이 없어질 것인데 과연 빌어먹을 사람인들 있겠는가? 천하의 음식이 없어질 것인데 빌어먹을 음식인들 있겠는가석가모니라는 사람은 서역 왕의 아들로, 그의 아버지의 자리를 옳지 않다고 하여 거하지 않았으니, 백성을 다스리는 자가 아니다. 남자가 밭갈고 여자가 베짜는 것을 옳지 않다고 하여 없앴으니, 힘써 일한 것이 뭐가 있는가? 부자, 군신, 부부도 없으니, 또한 선왕의 도를 지키는 자도 아니다. 이런 사람이 하루에 쌀 한 톨이라도 먹으면 모두 구차하게 먹는 것이다. 그 도와 같은 것을 믿으면 지렁이처럼 아예 먹지 않은 뒤에야 가능할 것이니, 어찌 빌어서 먹는단 말인가? 또한 먹는 것이 자기 힘에 달려 있으면 옳지 않다고 하는데, 빌어먹는 것은 옳다는 것인가? 부처의 말은 의()도 없고 이()도 없는데 책을 펴면 곧 보이기 때문에 여기에 논하여 변박하는 것이다.

 

金剛經曰 爾時世尊食時 着衣持鉢 入舍衛城 按舍衛 波斯國名 乞食於其城中 夫釋迦牟尼者 以男女居室爲不義 出人倫之外 去稼穡之事 絶生生之本 欲以其道 思以易天下 信如其道 是天下無人也 果有可乞之人乎 是天下無食也 果有可乞之食乎 釋迦牟尼者 西域王之子也 以父之位 爲不義而不居 非治民者也 以男耕女織 爲不義而去之 何勤力之有 無父子君臣夫婦 則又非守先王之道者也 此人雖一日食一粒 皆苟食也 信如其道 誠不食如蚯蚓然後可也 何爲乞而食乎 且食在自力則爲不義 而在乞則爲義乎 佛氏之言 無義無理 開卷便見 故於此論而辨之

 

부처는 애초에 걸식하면서 먹고 살 뿐이었으나, 군자는 오히려 의()로써 꾸짖고 조금도 용납함이 없었다. 지금은 화려한 전당과 중층의 집에 풍족한 옷과 후한 음식으로 편안히 앉아서 그것을 누리는 것이 왕 노릇하는 자의 봉양과 같고, 널리 전원(田園)과 노비를 두고 문서와 장부가 구름처럼 많아 공문서보다 더하고, 분주히 공급하기는 공무(公務)보다 엄하다. 그의 도()가 이른바 번뇌를 끊고 세간을 떠나 청정(淸淨)하고 욕심 없다는 것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앉아서 옷과 음식을 소모할 뿐 아니라, 좋은 일이라고 거짓 핑계대어 갖가지 공양에 음식이 낭자하고 색색의 비단을 잘라 당번을 장엄하니, 대개 평민 열 집의 재산이 하루아침에 소비된다. 아아! 의리를 저버리니 이미 인륜의 해충이 되었고, 하늘의 물건을 함부로 써버리니 실로 천지의 큰 좀벌레로구나.

 

佛氏其初 不過乞食而食之耳 君子尙且以義責之 無小容焉 今也華堂重屋 豐衣厚食 安坐而享之 如王者之奉 廣置田園臧獲 文簿雲委 過於公卷 奔走供給 峻於公務 其道所謂斷煩惱出世間 淸淨寡欲者 顧安在哉 不惟坐費衣食而已 假托好事 種種供養 饌食狼藉 壞裂綵帛 莊嚴幢幡 蓋平民十家之產 一朝而費之 噫 廢棄義理 旣爲人倫之蟊賊 而暴殄天物 實乃天地之巨蠹也

 

佛氏乞食之辯


 

 

이단을 제거하는 것에 대한 변

주자가 말하기를, “부처의 말이 더욱 이치[]에 가까워서 진리를 크게 어지럽힌다.”고 하였으니, 이것을 이른 것이다. 내 어둡고 용렬함으로써 힘이 부족함을 알지 못하고, 이단을 물리치는 것으로 나의 임무로 삼은 것은 앞서 열거한 여섯 성인과 한 현인의 마음이고자 함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그 설에 미혹되어 모두 빠져 버려 사람의 도가 없어지는 데 이를까 두렵기 때문이다.

 

朱氏曰 佛氏之言 彌近理而大亂眞者 此之謂也. 以予惛庸 不知力之不足 而以闢異端爲己任者 非欲上繼六聖一賢之心也 懼世之人惑於其說 而淪胥以陷 人之道至於滅矣

 

闢異端之辯

 

 


위 사료는 정도전의 불씨잡변(佛氏雜辯)내용 가운데 불교를 비판하는 가장 격렬한 논조가 담긴 불씨걸식지변(佛氏乞食之辯)벽이단지변(闢異端之辯)의 일부분이다.

 

■ 『불씨잡변의 저자, 정도전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고려말에서 조선초를 살다간 정치인이자 사상가로, 이성계를 도와 역성혁명을 성공시키고 조선을 개창한 주역 중 한 명이다. 그는 뛰어난 식견과 정치적 감각을 바탕으로 고려말 이래 개혁 정치를 주도하고 사찬법전(私撰法典)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을 지어 국정 운영에 필요한 제반 사항을 정리하는 등, 조선왕조의 설계자라는 평가가 있을 정도로 조선 건국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정도전의 문집으로 삼봉집(三峯集)등이 남아있는데, 여기서 삼봉(三峯)’은 그의 호이다.

 

■ 『불씨잡변의 집필과 간행

정도전은 만년에 그 최후의 저술로 불씨잡변을 집필하였으며 이는 조선초기 불교 배척의 논리를 담은 대표적 책으로 평가된다. 1398(태조 7)불씨잡변을 완성하고 권근(權近)으로부터 서문까지 받아두었는데, 완성한지 수개월 만에 이른바 왕자의 난으로 알려진 사건 때 이방원에게 정도전이 죽임을 당하면서 책으로 출간되지 못하였다.

불씨잡변의 원고는 정도전 사후 인척인 한혁(韓奕)에게 전해져 보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혁이 성균관 동료이자 훗날 연산군의 외할아버지가 되는 윤기견(尹起畎)에게 이를 보여주었는데, 그 내용에 크게 감명 받은 윤기견이 예천의 수령으로 있던 1456(세조 2)에 자신의 발문을 덧붙여 책으로 간행하였다. 이로써 불씨잡변은 저술된 지 58년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빛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불씨잡변1465(세조 11) 삼봉선생집, 1791(정조 15) 삼봉집에 합편되어 간행되면서 단독저술이 아닌 삼봉집의 일부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규장각에는 1791년 간행된 삼봉집여러 종이 소장되어 있다.

책 제목과 관련하여, 1791년 간행본에 佛氏雜辨으로 수록되어 불가의 잡다한 이론들을 분변한다는 의미로 알려져 온 경향이 있으나, 1456년의 초간본 불씨잡변과 책 안의 소제목들로 미루어 원래의 제목은 佛氏雜辯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란 맹자호변(好辯)’을 본받은 것이며, 언행(言行)의 옳고 그름과 진위를 가리는 문체의 한가지이기도 하다. 불씨잡변은 불교를 물리치고자 의도적으로 저술된 글임을 알 수 있다.

 

■ 『불씨잡변의 구성

불씨잡변의 전체 구성을 살펴보면 ① 「불씨윤회지변(佛氏輪廻之辯), ② 「불씨인과지변(佛氏因果之辯), ③ 「불씨심성지변(佛氏心性之辯), ④ 「불씨작용시성지변(佛氏作用是性之辯), ⑤ 「불씨심적지변(佛氏心跡之辯), ⑥ 「불씨매어도기지변(佛氏昧於道器之辯), ⑦ 「불씨훼기인륜지변(佛氏毁棄人倫之辯), ⑧ 「불씨자비지변(佛氏慈悲之辯), ⑨ 「불씨진가지변(佛氏眞假之辯), ⑩ 「불씨지옥지변(佛氏地獄之辯), ⑪ 「불씨화복지변(佛氏禍福之辯), ⑫ 「불씨걸식지변(佛氏乞食之辯), ⑬ 「불씨선교지변(佛氏禪敎之辯), ⑭ 「유석동이지변(儒釋同異之辯), ⑮ 「불법입중국(佛法入中國), ⑯ 「사불득화(事佛得禍), ⑰ 「사천도이담불과(舍天道而談佛果), ⑱ 「사불심근연대우촉(事佛甚謹年代尤促), ⑲ 「벽이단지변(闢異端之辯)19개 편목으로 이루어져 있다. 앞부분의 ~15편목은 불교에 대한 정도전의 견해이며, ~4가지 편목은 진덕수(眞德秀)대학연의(大學衍義)에서 발췌 수록된 것이다.

 

 


 

 

■ 『불씨잡변의 내용과 의의

불씨잡변은 성리학의 입장에서 불교를 철저하게 비판한 역작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나, 그 내용을 분석했을 때 정도전이 불교에 대한 깊은 이해 위에서 주장을 전개했다기보다 당시 사치하고 부패한 불교의 사회경제적 상황을 비판하고 불교를 배격하려는 목적 하에 기술된 정치적 저술이라는 견해가 강하다.

이 저술은 대체로 유교적 가치관에 입각하여 불교는 그와 다르므로 부당하다는 논지를 전개하고 있으며 이를 효과적으로 주장하기 위해 정통과 이단의 틀을 세우고 있다. 그 대표적 내용이 위에서 원문을 제시한 불씨걸식지변벽이단지변이다.

불씨걸식지변, 불교 승려들의 수행 방식인 걸식, 즉 탁발을 구차스럽게 먹으면서 의리를 해치는행위로 규정하고 있다. 정도전의 주장에 의하면 이러한 삶은 인륜의 밖으로 나가 부자, 군신, 부부의 의를 모두 져버린 행위라는 것이다. 이런 지적은 글 후반부에서 그 의도가 잘 드러난다. 불교의 교리는 청정하고 욕심이 없는 것인데 많은 토지와 노비를 거느린 채 사치스러움을 향유하던 당시 불교의 타락상에 대해, ‘인륜의 해충이요[人倫之蟊賊], 천지의 큰 좀벌레[天地之巨蠹]’라는 표현까지 사용하며 신랄하게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정도전은 불교가 생산 활동에 종사하지 않는다는 점, 각종 의례 설행에 있어 비용의 낭비가 심하다는 점 등의 현실적 측면을 공격하였다.

또한 벽이단지변에서, 유학자의 입장에서 불교가 이단임을 천명하고 있다. 특히 불교의 교리는 주자의 지적처럼 이치에 가까워 진리처럼 보이므로 사람들을 현혹하고 있으니, 이런 이단에 미혹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경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정도전은 여말선초 왕조교체기의 개혁적 정치사상가로, 새로운 왕조의 정치체제와 권력구조의 기본 골격을 완성한 것으로 평가되는 인물이었다. 이 시기는 불교가 사람들의 정신세계와 사회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던 시기였으며, 정도전 역시 불교계의 여러 인사와 친분을 쌓은 흔적이 여럿 남아있다. 그러나 위화도 회군을 기점으로 역성혁명을 추진하면서 정치적 입장이 변화하고 불교 배척에 적극적인 모습을 드러내며, 기존에 교유하던 불교계 인사들과 거리를 두는 것이 확인된다. 특히 정도전 만년에 집필되어 불교 배격을 이론화한 불씨잡변은 그러한 성향을 잘 보여준다. 정도전의 불씨잡변은 불교에서 유교로의 사상적 패러다임의 전환을 적극 도모한 것으로 평가되나, 1398년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정도전이 숙청되면서 그 사후 58년 후에야 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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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 개인의 견해이므로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의 공식적 의견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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