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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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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읽다, 천문(天文)

 

 


 

 

천문(天文)은 말 그대로 하늘의 문자, 하늘의 메시지다. 오늘날의 천문학은 천체 자체의 운행원리를 분석하는 학문이지만, 전통시대의 천문학은 별자리를 통해 하늘의 문자를 읽어내어 인간사회에 적용하는 해석적인 학문이었다.

하늘은 전통시대 사람들에게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였다. 경제 생산의 대부분을 농업에 의지하던 자연경제에서 하늘의 움직임은 한해 농사의 시작과 기점, 풍흉을 가늠할 수 있는 도구였다. 동시에 일상성을 벗어난 움직임, 이를 테면 자연재해로 인한 재이(災異)나 혜성의 출현 등은 인간 세상에 보내는 하늘의 메시지로 받아들여졌다. 그것은 하늘을 대신하여 인간세상을 다스리는 국왕의 통치에 대한 하늘의 평가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천문학과 역법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하늘은 전통적으로 숭배의 대상이었다. 나라를 세우고 다스리는 이들은 하늘의 아들[天子]로 여겨졌고, 폭군을 몰아내는 이들은 하늘의 명[天命]을 통해 왕조교체를 정당화하였다. 이것은 충분히 타당한 이유로 받아들여졌고 이를 통해 天命이라는 말이 가지는 무게는 배가되었다. 이처럼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는 하늘과 국가를 연결시켜 보았는데, 중국에서는 일찍이 하늘의 별자리에 지상의 통치체계를 대입시켜 해석하는 방법을 정립하였다. 가장 오래된 천문지인 사마천의 사기』 「天官書에 이러한 관념이 잘 드러나 있다.

한나라의 태사령(太史令)이었던 사마천은 98500여개의 별을 지상세계의 관료체제와 국가 안의 사물들에 대응시켜 오관체제로 체계화 하였다. 이후 천관서의 오관체제는 한서진서』 「천문지와 수나라 보천가(步天歌)를 거치며 동아시아 천문 체제의 전형을 만들었다. 이렇게 완성된 천문서들이 하늘을 읽는 매뉴얼의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천문서가 마련된 이후로 하늘의 변화를 읽어내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별의 변화가 관측되면 천문서라는 매뉴얼에 따라 그 별이 상징하는 지상세계의 일을 예견하면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황제의 침대를 상징하는 천상(天床)’이라는 별자리에 불길한 별로 여겨지는 객성(客星)’이 스쳐 지나갔다면 황제의 신변에 위험한 일이 이러날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매뉴얼에 없는 변화가 일어났더라도 유사한 사례를 찾아 해석하면 된다. 따라서 천문에 대한 해석이 정립된 이후로는 이를 해석하는 능력보다 해석할 수 있는 권한이 더 중요해 졌다. 해석할 능력이 있다고 해서 아무나 하늘의 메시지를 읽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명[天命]을 받은 제왕만이 그리고 그의 명을 받은 자 만이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늘의 문자를 읽어내는 천문학은 지배자에 의해 독점되어 제왕학으로 칭해졌는데, 우리 사서에서는 그러한 사례가 나타나지는 않지만 대명률에 따르면 허락되지 않은 자가 천문학을 공부하는 것은 처벌 대상이었다.

천문학과 더불어 역법의 발달도 오래 되었다. 하늘은 시간과 계절에 따라 항상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일정하게 움직이는 하늘의 궤적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계산식이 필요한데 이것이 역법(曆法)이다. 천문지와 함께 역사서의 첫 머리에 등장하는 역지(曆志)가 바로 일월오성의 운행과 궤도 등에 대한 천문학 상수와 계산치들을 정리한 내용이다. 따라서 천문학은 역법과 함께 짝을 이룰 수 밖에 없었는데, 천문이 현상에 대한 해석을 중시하는 학문이었다면 역은 철저히 산술적인 계산에 기반한 수리천문학에 가까운 것이었다.

역법은 춘추시대에 이미 ‘197閏法이라 하는 윤달배치법을 확립하는 등 일찍부터 발달하였다. 197윤법은 19(태양)년 동안 7달의 윤달을 설정하는 방법이다. 이러한 방식을 토대로 한무제 원년에(기원전 105) ‘태초력이라는 역법이 시행되었는데, 이후 우수한 역법의 반포는 왕조성립의 요건이 되었다. 이것은 하늘의 움직임을 읽고 때를 밝혀 시간의 기준을 마련하는 것이 제왕에게 독점된 권한이기 때문이었거니와, 이러한 관념이 관상수시(觀象授時), 수명개제(受命改制)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하늘의 메시지를 읽는 천문학이 제왕에 의해 독점된 학문이었듯, 하늘의 운행을 보고 정확한 때를 알려주는 역법 역시 제왕의 의무였던 것이다.

 

 

 

 

천문학의 제도화

 

우리나라의 경우 천문에 관한 내용이 별도의 기록으로 묶인 것은 조선초 기록된 고려사가 처음이다. 삼국사기사기와 같은 기전체양식으로 쓰여졌지만 가운데 천문과 역에 관한 내용은 없다. 본기에 천문관련 기사가 산재하지만 굳이 의 일부로 엮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문학이 제도화되어 있다는 단서는 충분히 찾을 수 있다. 고구려의 경우 고분 천장에 그려진 천문도를 통해 4세기 이전 이미 천문사상이 수용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일자(日者)’라고 하는 별도의 천문 관원을 둔 사실도 확인된다. 백제는 5세기 초부터 중국의 원가력(元嘉曆)을 도입해 사용하였고, 신라는 7세기 중반 첨성대와 누각전(漏刻典)을 설치하였으며 삼국통일 이후에는 당의 인덕력(麟德曆)을 시행하는 등 두 나라 역시 천문과 역에 대한 이해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천문이 역사서에 별도의 로 수록된 것은 조선 초 수찬된 고려사에 이르러서였다.

고려시대에는 천문을 담당하는 부서인 태사국과 태복감은 국초부터 설치되어 있었다. 이것이 1308(충렬왕 34) 서운관으로 합병된 이후 여러 차례 개편되어 조선 초까지 이어졌고, 1466(세조 12)에 관상감으로 확대 개편되어 1894년 근대적 기상관측소인 관상소가 설치될 때까지 존속하였다. 관상감은 예조의 하부관서로, 천문지리명과학의 세 부서와 부속기관인 금루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관상감에서 풍수(지리)나 택일(명과)을 함께 다루었던 이유는 전통시대 달력에 관련 내용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당시 달력은 오늘날과 다를 바 없이 천문학적 계산에 따라 정해진 날짜와(역일曆日), 연월일시의 시간과 24가지 방향을 지배하는 각종 길흉신이 활동하는 상황(역주曆注)을 함께 기록해 두었는데, 이에 따라 소위 손 없는 날과 같은 것들이 정해지므로 관상감에서 택일과 풍수를 함께 맡았던 것이다.

 

 

 

 

조선의 관상감

 

관상감 천문학부서 관원의 주요 임무는 역서의 편찬과 간행, 일월식의 예보에 관한 일이었다. 이 중에서도 특히 매년 정기적으로 이루어지는 역서의 편찬과 간행이 가장 중요했다. 이곳에서 간행하는 역서는 크게 일과력(日課曆)과 칠정력(七政曆)으로 구분된다. 일과력은 오늘날의 달력과 같이 1년 동안의 날짜와 길흉을 담은 책이고, 칠정력은 칠정(七政) 즉 해오성의 천체의 운행 도수 데이터를 담은 책으로 요즘의 천체력과 유사한 것이다. 일반인에게는 필요 없는 칠정력은 왕과 세자에게 바치는 것 그리고 관상감에 비치하는 용도로 소량만 인쇄되었고, 일과력은 대소신료를 포함한 일반인에게 배포되었다.

조선전기까지만 하더라도 천문학과 관상감의 관직은 환영받지 못하였다. 과거시험의 문과급제자 출신의 관료들에게 천문학은 천착해야 할 학문으로 여겨지지 못하였고, 주로 음양과와 같은 잡학 출신의 중인관료들이 담당하는 천문관직 역시 높은 대우를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까지 중인출신의 관원들은 복잡한 역법계산을 해낼 정도의 수준이 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나라에서는 문인 관료들을 훈련 시켜 역서 편찬 프로젝트를 담당시켰다. 이렇게 문인 관료 가운데 젊은 인재를 발탁하여 잡학을 훈련시키고 관청의 제조직을 맡게 하여 프로젝트를 주도하게 하는 제도를 잡학겸수관이라고 한다. 하지만 많은 문인 관료들이 잡학겸수관을 기피하였으므로 이 훈련을 마친 문인 관료에게는 특진이나 요직에 우선 기용되는 특혜를 주었다.

칠정산내외편이라고 하는 훌륭한 역서가 편찬된 세종대에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당시 관련 프로젝트를 주도하였던 정초, 정인지, 이순지, 김담 등은 모두 문인 관료로, 세종의 명에 의해 천문역산 공부를 시작하여 해당 프로젝트를 수행하였다. 우리나라는 중국의 역서를 수입해 사용하였는데, 중국 본토를 중심으로 계산된 것인 만큼 천체운행의 도수가 한양에서 바라본 것과 차이가 있었다. 따라서 절기나 일월식 등의 계산에 약간의 차이가 있었는데, 일월식과 같이 하늘의 이변(異變)이 보이는 날에는 국왕을 비롯한 전국의 관청에서 구식례(救食禮)를 거행해야 했으므로 실제 하늘의 변화를 정확하게 예측하는 일은 자못 중요한 것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세종대에 원의 수시력법과 명의 대통력법의 장점을 아울러 칠정산법을 고안하였던 것이다. ‘칠정산법이란 칠정의 운행을 계산하는 계산법이라는 뜻인데, 내편은 수시력법과 대통력법을 통합해 만든 계산법으로 날짜를 정할 때 사용하였고, 외편은 아라비아식 역법인 회회력을 적용한 계산법으로, 일월식을 계산할 때 사용하였다. 이러한 작업에 문인 관료들을 훈련 시켜 투입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조선전기에는 관상감 관원들이 아직 전문직화 하지 못한 상황에서 관련프로젝트가 외부 관원들에 의해 수행되는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일례로 세종대 천문프로젝트에 해결사로 나섰던 장영실 역시 관상감 소속이 아닌 상의원(尙衣院) 소속이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조선 후기에 들어서며 변화하기 시작한다. 조선 후기가 되면 삼력관이라고 하는 전문적인 천문역산가 관료집단이 형성되고, 학문적 관심사가 다변화 하면서 천문학도 주목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제왕학에서 실용학으로

 

조선후기 천문학은 분명 전기와 다른 지위를 가졌다. 전통시대 달력 제작은 천체도수를 계산하여 날짜를 정하는 역일(曆日) 작업과 각 시간과 방향에 활동하는 길흉신의 상황을 적은 역주(曆注) 작업을 통해 이루어진다. 역주는 해석의 영역으로 한나라 이래 천문학이 정립된 이후 크게 달라지지 않았던 반면, 역일과 관련한 분야에서는 지속적인 발전이 이루어졌다. 동아시아 천문학의 발전은 대부분 역일에 관한 영역 즉 수리천문학과 관련한 부분에서 이루어졌다. 조선에서도 이와 관련하여 중인층 가운데 전문지식을 가진 천문역산가 집단이 형성되는가 하면, 사대부들 또한 천문과 역산에 대한 깊이 있는 지식을 탐구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변화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17세기 새롭게 만들어진 삼력관이라는 관직이다. 삼력관은 효종 5(1654) 시헌력서가 공식 역서로 바뀐 이후 만들어졌다. 원래는 관상감내 천문학부서의 산직(散職) 관원이기 때문에 별도의 임무를 맡지 않으면 녹봉을 받을 수 없었다. 하지만 30~35명의 정원 가운데 대부분이 여러 사업에 장기간 차출되어 있었고, 천문학 교수직을 비롯한 녹관직에 임명되었으며 북경사신 일행에 포함되거나 상위 녹관직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에 다른 산직들과 달리 많은 경우 녹관직에 진출해 있었다. 특히 매년 10월마다 꼬박 1년이 소요되는 역서편찬을 위해 삼력청에 차출되는 인원만 24명이었으므로 삼력관 중에 임무를 맡지 못하는 이는 거의 없었고, 정해진 임기도 없는 까닭에 은퇴를 하지 않는 한 삼력관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렇게 천문역산가라는 직종이 다른 잡직에 비해 특권적인 대우를 받았기 때문인지 조선 후기 음양과 합격자 추이를 보면 합격자를 배출하는 집안이 몇몇 명문 가문으로 모아지는 현상이 발견된다. 이것은 천문역산이 가학(家學)의 풍토 안에서 세전 되어 전문가집단에 의해 독점되었음을 의미한다.

삼려관은 전문가로서 조선후기 천문학 발전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654년 시헌력의 반포와 완성을 주도한 것도 삼력관들이었다. 이들은 정기적으로 북경에 파견되어 최신의 천문 역산서를 구해오거나, 독자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역산문제를 배워오는 임무를 맡았다. 1650년 초 북경에서 시헌력의 핵심적인 내용을 배워 오는 임무를 수행한 관상감 관원 김상범이 없었다면 시헌력 시행은 여러 난간에 부딪혔을 것인데, 이것은 조선후기 관상감의 천문역산가 집단이 조선전기 관상감의 중인출신 관료들과는 사뭇 다른 전문성과 지위를 획득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해석을 중심으로 하던 천문학이 점차 실용적인 역법 계산 위주의 학문으로 변화한 것은, 이곳에서 만들어진 달력이 관리되는 모습을 통해 명확히 느낄 수 있다. 역서는 관상감을 통해 약 일년간 만들어져 국왕에게 바쳐진다. 이때 만들어진 역서는 오늘날의 달력과 같은 일과력 그리고 천체력과 유사한 칠정력으로 조선초에는 대략 5,000부 정도 간행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국왕을 통해 궐내 부서와 고위 관료들 그리고 전국 관아에 하사품으로 배포될 뿐 일반인에게 돌아가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조선후기에 이르면 간행 부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1791(정조 15)에는 무려 29만부를 간행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1876(고종 13)에는 35만부를 간행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30여만권 가운데 고위 관료와 관아에 배포된 것은 약 15%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대부분이 관상감 사건(觀象監私件)’이라 하여 관상감에서 독자적으로 처리되었다. 관상감은 역서의 편찬 외에도 출판과 판매까지 담당하고 있었는데, 인쇄된 역서가운데 일부를 팔아 관청 운영비로 충당하였고, 팔고 남은 나머지는 관원들의 지위에 상응하게 차등 지급하였다. 이렇게 관상감 관원들에게 지급된 역서는 다시 개인적으로 판매되어 생계에 보탬이 되었다. 당시 권당 가격은 시장논리로 책정되었는데, 이에 따라 어느 정도의 부수를 인쇄해야 적절한지에 대한 논의가 심심치 않게 등장할 정도였다. 이것은 천문학에 대한 접근조차 제한되고, 역서는 왕의 하사품이었던 이전 시대와는 분명 다른 양상이다. 이제 천문과 역은 왕의 독점으로부터 벗어났고 요순 임금의 관상수시관념은 이상적인 것일 뿐, 역서가 상품으로 거래되는 사회로 변화한 것이다.

 

 

 

 

참고문헌

 

문중양, 왕의 허락을 얻어 하늘을 관찰하다 조선의 천문역산가, 조선 전문가의 일생규장각 교양총서 4, 글항아리, 2010

전용훈, 과학과 미신의 이중주 -전통시대 최고의 실용서 역서曆書, 실용서로 읽는 조선규장각 교양총서 9, 글항아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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