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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진 정치의 시작, 조선의 양전과 『경자양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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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고등학교 국사]

Ⅳ. 경제 구조와 경제 생활 → 3. 근세의 경제 → [1] 경제 정책  (바로가기)

 

[고등학교 국사]

Ⅳ. 경제 구조와 경제 생활 → 4. 근대 태동기의 경제 → [1] 수취 체제의 개편  (바로가기)

 

 

 

좌사간 김효정(金孝貞) 등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신들이 가만히 생각건대 어진 정치(仁政)는 반드시 경계(經界)에서 시작되는 것이니, 경계가 바르게 된 이후에야 국가가 넉넉해지고 백성들이 풍족해질 수 있습니다. 이에 국가에서 일찍이 토지를 양전(量田)하여 장부를 만들고 (토지의 등급을) 3품으로 나누며, 이웃한 필지들의 위치를 파악하니, 땅을 숨겨두거나 겸병(兼幷)하는 폐단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중략) 신들이 생각건대, 양전은 중대한 일입니다. 작은 실수라도 있다면 어찌 이것이 일시적인 해로움일 뿐이겠습니까. 장차 백성들이 두고두고 원망하게 될 것이니, 이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左司諫金孝貞等上疏曰, 臣等竊謂, 仁政必自經界始, 經界正, 然後裕國足民之道得矣. 是以國家曾量土田, 勒成載籍, 分三品, 定其四標, 隱占兼幷之弊, 由玆以絶.


… (중략) … 


臣等以謂, 量田大事也. 小有失中, 則豈特一時之害. 將貽小民永世之怨, 不可不慮也.


『세종실록』 1428년(세종 10) 9월 4일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에서 품의하기를,


하나. 우리나라는 고려의 오랜 방식에 따라 토지를 세 등급으로 나누고 사방의 길이만 잴 뿐 면적을 계산하지 않습니다. 토지의 비옥도가 남, 북이 다름에도 전품(田品)을 나눌 때 팔도를 통틀어 계산하지 않고 오직 도별로 나눌 뿐입니다. 이처럼 세 등급으로 전품을 구분하는 방법에는 비옥함과 척박함의 기준이 통일되어 있지 않고, 납세의 경중에도 큰 차이가 있어서, 부자는 더욱 부유해지고 가난한 자는 더욱 빈곤하게 되니 이는 심히 옳지 않은 일입니다. 만약 여러 도의 전품을 전체적으로 살펴 6등급으로 나눈다면, 전품이 바로잡히고 수세가 균등해 질 것입니다.

 

… (중략) …


하나. 각 도의 감사(監司)는 개별 고을의 연분(年分)을 살펴 정하되, 재해를 입은 것 이외에 곡식이 실한지 부실한지 보아야 합니다. 비록 (고을 내의 작황이) 모두 같은 것은 아니겠으나, 전체를 합하여 10분(分)의 비율로 삼아 전실(全實)일 경우를 상상년(上上年)으로 하고, 9분실(九分實)을 상중년, 8분실을 상하년, 7분실을 중상년, 6분실을 중중년, 5분실을 중하년, 4분실을 하상년, 3분실을 하중년, 2분실을 하하년으로 정하도록 합니다. 수전(水田)과 한전(旱田)은 각기 등급을 매겨서 ‘어느 현(縣) 수전은 무슨 년, 한전은 무슨 년’ 이렇게 아뢰도록 합니다. 1분실은 (앞에 거론한) 아홉 개 연분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니, 마땅히 조세를 면해야 합니다.

 

 

田制詳定所議以爲,


一. 本國因高麗之舊, 三等之田, 皆用方面之數, 不計實積. 地之膏塉, 南北不同, 而其田品分等, 不通計八道, 只以一道分之. 故三等田, 膏塉不同, 納稅輕重頓異, 富者益富, 貧者益貧, 深爲不可. 若通考諸道田品, 分爲六等, 則庶幾田品得正, 收稅以均.


… (중략) …


一. 各道監司, 每邑審定年分, 災傷外, 禾穀實不實. 雖不同, 摠合而十分爲率, 以全實爲上上年, 九分實爲上中年, 八分實爲上下年, 七分實爲中上年, 六分實爲中中年, 五分實爲中下年, 四分實爲下上年, 三分實爲下中年, 二分實爲下下年. 水田旱田, 各分其等, 以某縣水田爲某等年, 旱田爲某等年以啓. 一分實, 則未及九等之分, 當免租稅.


『세종실록』 1444년(세종 26) 11월 13일

 

 

 

왜 양안을 만들어야 했는가?


농경사회에서는 토지와 노동이 주요 생산 요소이다. 작물을 길러낼 수 있는 땅, 그리고 이를 일궈낼 수 있는 사람이 필수적인 것이다. 동시에 이들은 농업국가의 주된 재원이기도 하다. 토지와 노동의 생산성을 파악하고 그 생산력에 따라 과세하는 것은 여타 세원을 마련하는 것에 비해 편리하면서도 합리적이었다.


토지와 인구에서 세금을 거두어내는 구체적인 방법은 다양한 세제로 발전해 나갔다. 조선은 여러 가지 선택지 가운데 조용조(租庸調) 체계를 도입하였다. 조용조는 당나라의 부세 제도로, 조(租)는 토지에서 거두는 전세(田稅)를, 용(庸)은 개별 인신에게 부과하는 역(役)을, 조(調)는 호(戶)에서 수취하는 공물(貢物)을 의미한다.


조용조 제도를 원활하게 운용하기 위해서는 땅과 사람에 대한 파악과 관리가 필수적이었다. 이에 조선은 양안(量案)과 호적을 만들었다. 호적은 신역(身役)을 담당할 개인들을 기록할 뿐 아니라, 이를 호로 묶어서 파악한 장부이다. 즉, 호적을 참고하면 역과 공물 수취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한편 전세의 수취 근거는 양안을 작성함으로써 마련하고자 했다. 양안은 일종의 지세(地稅) 장부로, 개별 필지를 실제로 살펴보고 그 모양과 크기, 토질 등을 파악하는 양전(量田)이라는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다. 이 때 양전 대상은 오직 농경지에 한정되어, 현재 경작 중이거나, 경작된 이력이 있는 필지들만이 양안에 오르게 되었다. 생산력이 확인된 토지만이 과세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해당 토지가 곡물을 생산해 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전세 수취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어려웠다. 땅이 있으니 세금을 내야한다는 설명은 과세하는 입장에서도, 납세하는 이들에게도 설득력을 지니지 못했던 것이다. 이에 조선은 왕토(王土)사상을 강조하게 되었다.


 

양전의 이념적 근거


『시경(詩經)』에 ‘普天之下, 莫非王土, 率土之濱, 莫非王臣’이라는 구절이 있다. 하늘 아래 왕의 땅이 아닌 곳이 없고 땅 끝까지 왕의 신하가 아닌 이가 없다는, 이른바 왕토사상을 대표하는 서술이다. 왕토사상에 입각해 과세의 근거를 설명해보면 다음과 같다. 천하의 모든 토지가 임금의 것이므로, 왕은 영역 내의 모든 토지와 인민을 복속시킬 권위를 갖게 되며 그 대신 이들을 보호할 의무를 지닌다. 한편 백성들은 왕의 땅을 골고루 나눠받아 생계를 유지할 뿐 아니라 그 비호를 받게 된다. 이에 대한 대가로 조용조, 즉 세금과 노동력을 상납하게 되는 것이다. 전국의 모든 경지를 조사하고 전세를 수취하는 것은 그것이 본래 왕의 땅이라는 설명으로 정당화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임금이 토지에 대한 세금을 마음대로 거둬들일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앞서 제시한 1428년(세종 10) 『세종실록』에서 나왔듯, 임금은 항상 ‘어진 정치는 반드시 경계에서 시작된다(仁政必自經界始)’는 말을 유념하고 있어야 했다. 이는 『맹자(孟子)』에 나오는 구절인데, 주자(朱子)는 이를 해석하면서 ‘경계란 땅을 다스리고 토지를 나눠주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인정(仁政)을 베푸는 군주가 되기 위해서는 단순히 왕토를 다스릴 뿐 아니라 이를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며 살아갈 터전을 만들어 주어야 했던 것이다. 이처럼 조선시대의 토지는 왕토로서 국가 재정의 근간이 됨과 동시에 백성들의 생활 기반이기도 했으므로 임금은 항상 이를 고려하며 부세 부담을 조정해 나가고자 했다.


 

조선 초기 전세 제도


양전은 고려시대에도 실시되었다. ‘백성에게서 수취할 때에는 법도가 있어야 한다(取民有道)’는 태조의 유훈에 입각하여 운영된 전시과(田柴科) 체제 역시 양안이 있어야 작동할 수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토지의 등급을 상, 중, 하로 구분하여 각기 다른 액수의 전세를 부과하였는데, 이 때 전품(田品)을 나누는 기준은 휴한(休閑)의 빈도였다. 당시에는 한 번 경작하고 나면 1~2년을 묵혀야 다시 농사지을 수 있는 땅이 많았다. 따라서 휴한의 빈도에 따라 전품을 매기고, 전세 부담을 조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고려 후기로 갈수록 매해 경작할 수 있는 곳이 늘어나면서 새로운 전품 기준을 마련할 필요성이 높아졌다.


조선 초기 과전법(科田法)이 시행될 때 까지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고려의 방식을 활용해 토지 등급을 상, 중, 하로 나누고 있었는데, 휴경하는 필지들이 줄어들면서 전품 구분은 더욱 어려워졌다. 조선 초 실시된 양전에서 대다수의 필지는 하 등급으로 분류되었다. 이는 쉽사리 전품의 차등을 두기 어려웠던 현실을 반영한다. 이러한 상태가 지속된다면 국가로서는 재정 확보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조선은 전국에 관원을 파견해 풍흉 여부와 작황을 점검하여 조세 수취액을 조정하는 답험손실법(踏驗損失法)을 따르고 있었는데, 이는 일관된 기준을 유지하기 어려운 방식이었다.


이에 세종은 공법(貢法)을 마련하여 이상의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했다. 공법의 핵심은 앞서 살펴본 1444년(세종 26)의 『세종실록』 기록에 나오는 전분(田分)6등법, 연분(年分)9등법이다. 우선 전분6등법에서는 토지의 등급을 1~6등급으로 세분화하고, 그 기준을 토지 비옥도의 차이로 바꾸었다. 또한 기본 수취 단위인 1결(結)의 절대 면적을 등급별로 다르게 설정하면서 토지 생산성에 따라 부세 부담을 조정하였다. 『전제상정소준수조획(田制詳定所遵守條劃)』(奎9915)에 그 세세한 방식이 설명되어 있다.


연분9등법은 기존의 답험손실법을 대신하는 것으로, 당해 연도의 풍흉 정도를 고려하여 上上~下下의 9단계 중 하나로 각 고을의 연분을 정하고 그에 해당하는 세율로 전세를 거두는 방식이다. 가장 작황이 좋은 상상년에는 1결 당 20두(斗)를, 최하인 하하년에는 1결 당 4두를 수취하도록 했다. 이후 조선은 공법의 내용을 토대로 전국을 양전해 나갔다.


 

양전 과정과 결부법(結負法)


『경국대전(經國大典)』 「호전(戶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모든 토지는 6등급으로 나누고, 20년마다 다시 양전한 후 양안을 만들어 호조(戶曹), 각 도, 각 고을에 보관한다.’

‘실 면적 1평방척(尺)을 1파(把)으로 보고, 10파를 1속(束)으로, 10속을 1부(負)로, 100부를 1결(結)로 한다.’


우선 첫 번째 항목에서, 조선이 법적으로 20년마다 새로 양전할 것을 규정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양전에서 전분을 정하고, 그를 토대로 개별 고읍의 연분을 파악해 차등 수세하다가 20년이 지나면 다시 양전하여 토지 등급과 소유주 등을 수정해 나갈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규정은 대체로 지켜지지 못하였다. 전국 단위의 작업은 막대한 비용이 소모되어, 대개는 농업이 발달한 충청, 전라, 경상의 삼남 지방 위주로 양전이 시도되었다. 양전 주기 역시 20여 년을 훌쩍 넘어서서, 심할 때에는 1720년(숙종 46)의 경자양전(庚子量田) 이후 1898년(고종 35)의 광무양전(光武量田) 때까지 180여 년 간 중앙 정부 주도의 양전이 시행되지 않기도 했다. 그럼에도 ‘20년마다 다시 양전한다’는 내용을 법전에 실어두고, 이후 양전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이들의 근거로 두고두고 활용되었던 것은, 주기적인 양전을 통해 생산력에 걸맞은 수준의 전세를 수취하고자 하는 국가적 의지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양전은 크게 세 단계로 진행된다. 우선 타량(打量)을 하는데, 이는 야외에 나가 실제로 토지를 측량하는 것이다. 들판에서 전답의 가로, 세로 길이를 재고 등급을 판별한다. 다음은 해부(解負) 단계로, 타량한 결과를 가지고 숫자 계산에 능한 사람들이 개별 필지의 결부(結負)를 계산하는 것이다. 이 때 결정된 결부수는 곧 해당 토지의 전세 기준액이 된다. 마지막은 양안을 작성하는 정안(正案)이다. 면 별로 양안을 만드는데 평균적으로 1개 면 당 50일, 1개 군현 당 7개월 가량 소요되었다. 세 부를 만들어 호조, 도, 읍에 하나씩 보관하도록 했다.


양안에는 각 필지의 가로 세로 길이, 등급, 결부수 외에도 천자문 순서로 매겨지는 자호(字號), 1부터 시작되는 지번(地番), 도형으로 표시되는 전형(田形), 양전 진행 방향, 이웃 필지들의 정보인 사표(四標), 주인과 작인의 이름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 중 핵심이 되는 것은 전세액의 기준인 결부수라고 할 수 있다.


결부는 조선에서 사용한 전세의 과세 단위로, 미리 마련해 둔 계산식에 토지의 절대 면적과 등급을 대입하여 산출해 내도록 하였다. 위에 제시한  『경국대전』의 조항 중 척과 파, 속, 부, 결의 관계에 대한 것은 결부수를 어떻게 계산하는지에 대한 설명이다. 절대 면적만을 가지고 과세할 경우, 토지의 생산성에 따른 차등 수세가 어려워진다. 이를 해결하고자 조선은 생산량 기준 단위인 결부를 활용한 것이다. 벼 한 줌을 1파라고 할 때 10파는 1속, 10속은 1부, 100부는 1결로 지칭되었고, 전품별로 벼 한 줌을 생산해 낼 수 있는 절대 면적을 모두 1평방척이라고 설정해 두고 1~6등급마다 각기 다른 길이의 양전척(量田尺)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여섯 종류의 자를 들고 다니며 길이를 재는 대신 비례식을 이용해 결부를 계산했다. 필지의 절대 면적이 10,000평방척일 경우, 1등전이면 1결로, 2등전이면 85부, 3등전이면 70부, 4등전이면 55부, 5등전이면 40부, 6등전이면 25부로 환산하여 결부수를 정하였다. 이후 1결당 몇 두를 내야 하는지 연분이 정해지면 필지별 전세 액수가 자동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결부법을 사용한 것 역시 토지의 생산성에 따라 세액을 산정함으로서 균세(均稅)의 이념을 달성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조선시대 양전 시행의 한계와 의미


생산력을 반영하는 결부 단위로 전세 납부 기준액을 결정하고, 매년의 작황을 살펴 고을마다 적절한 연분을 지정하며, 주기적으로 양전을 실시해 현실과 장부 사이에 차이가 없도록 조정한다. 이것은 공법을 마련한 이들이 구상했던 이상적인 전세 수취 방식이었다. 왕토를 백성들의 터전으로 내어주고, 다시 국가는 그들로부터 적절한 수준의 조세를 균형 있게 수취할 수 있는 방안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 양전은 많은 비용과 인력이 투입되는 어려운 작업이었다. 결부제가 제 기능을 다하기 위해서는 처음 전품을 공정하게 매겨야 함은 물론이고, 이후 이를 정기적으로 조정해주는 과정이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몇 십 년 동안 재조정을 시행하지 못한 지역이 늘어만 갔다. 양안과 현실 사이의 괴리가 심화되었던 것이다.


장부가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면서 국가의 전세 수입도 확대되지 못하고 있었다. 토지 등급이 실제와 맞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연분 책정마저 관행화, 형해화 되어가고 있었다. 각 고을이 전세 부담을 낮추기 위해 너나할 것 없이 작황이 좋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연분은 점차 하향평준화 되었다. 결국 1635년(인조 13) 영정법(永定法)이 시행되면서 연분9등법은 혁파되고 전세는 영구히 1결 당 4두를 납부하는 것으로 고정되었다.


이렇듯 양전을 이상적으로 실시하고 국가의 전세 수입을 확충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끝까지 양전을 통한 ‘어진 정치’의 구현을 포기하지 않았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전국 단위 양안인 경자양안(庚子量案)을 보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18세기 초반 조선은 영정법의 영향, 연이은 자연 재해 등으로 전세 수입의 확보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에 1720년(숙종 46) 경자양전이 시행되었다. 양전의 시대적 배경을 감안한다면, 조정에서는 가급적 많은 양의 재원을 마련해 두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라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실제 양전 내용은 이와 상이한 것이었다.


경자양전을 실시하기 위한 사목 중에는 새로 전품을 매길 때 기왕의 전품과 1등급 이상 차이나지 않도록 하라는 지침이 있다. 다시 말해, 실제 비옥도를 정확하게 반영해 전품을 설정하려고도, 무조건 높은 등급을 매겨 세입을 확대하려고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항심(恒心)은 항산(恒産)에서’ 나오므로, 백성들이 먹고 살 길은 어느 정도 트여준 상태에서 국가 역시 약간의 재조정을 통해 재정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의도였다. 이러한 구상은 ‘균(均)’이라는 표현으로 표출되곤 했다. 경자양전 당시 조선은 양전 담당 관리의 명칭을 양전사(量田使)에서 균전사(均田使)로 변경하였다. 또한 양전 결과를 보면 기존에 국가가 파악하고 있던 총 결부수와 새로 조사한 결부수에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이 역시 양전이라는 것이 단순히 국가가 백성들로부터 많이 거둬들이기 위한 작업이 아니라, 총 세입은 크게 늘지 않더라도 부담을 고르게 만들어 균세의 이념을 실현해 보고자 했던 노력이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고 하겠다.

 

 

#조선전기 #세종실록 #경자양안 #양전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 개인의 견해이므로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의 공식적 의견과는 무관할 수도 있습니다.

 교과서 찾아보기의 교과서 자료 출처는 국사편찬위원회의 우리역사넷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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