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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을 위한 필수 참고서, 『만기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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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 들어가며 |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서 왕과 관리들은 많은 정보가 필요했습니다. 오늘날처럼 인터넷도 없던 시대에 어떻게 정보를 얻을 수 있었을까요? 조선 후기 순조 때에 만들어진 『만기요람』은 서울 관청의 수입과 지출을 기록한 책으로, 특히 재정과 군사 분야의 정보가 담겨 있습니다. 그럼 『만기요람』을 살펴보면서 당시 조선 사회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알아볼까요

 

 

| 학습목표 |

 

▶ 『만기요람』을 만든 목적을 알 수 있다.

▶ ‘삼정의 문란’이 나타난 배경을 이해할 수 있다.

 

 

| 배경지식 |

 

『만기요람』은 1808년(순조 8)에 완성된 책으로 당시 재정과 군사 분야의 여러 현황을 파악해서 왕의 국정 업무를 보조하기 위해서 만든 자료이다. 이 책은 당시 왕이었던 순조의 지시로 만들어졌으며, 책임자는 국가재정을 관장하던 호조판서 서영보와 교육·문화 업무를 관장하던 부제학 심상규이다. 국가를 통치할 때 가장 중요한 재정과 국방 업무에 대해 필요한 모든 자료를 세세하게 갖춤으로써 국왕이 국가통치의 기본 틀을 바르게 인식하고 효율적으로 국정 운영을 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도록 했다.

 

 

 

1. 『만기요람(萬機要覽)』이라는 제목은 무슨 뜻일까요

 


만기요람 (奎 1151-v.1-11, 奎 2441-v.1-11)

 

‘만기’라는 단어는 『서경』이라는 유교 경전에 등장합니다. 중국의 하 나라를 세운 우 임금의 참모 중에 고요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그는 임금에게 “제후들에게 편안함과 욕심을 가르치지 마시며 삼가고 두려워하소서. 하루 이틀 사이에도 만기입니다.”라고 조언을 했습니다. 여기서 ‘만기’는 ‘만 가지 기미(낌새)’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글 전체의 맥락을 통해서 살펴보면, 왕이 하는 말과 행동이 그 시작은 사소해 보이지만 그것이 온 나라와 천하에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왕은 모든 말과 행동을 조심스럽게 해야한다는 의미인 것이죠. 그래서 옛날 동양 사회에서는 ‘만기’라는 단어를 ‘왕의 국정업무’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했습니다. 『만기요람』을 쉽게 풀이하면, 왕의 국정 업무에 중요한 참고문헌이라는 뜻이 됩니다.

 

 

2. 『만기요람』은 누가 만들었을까요

 


 

『만기요람』은 당시 왕이었던 순조의 지시로 만들어졌습니다. 왕을 위한 국정 참고서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국가 통치의 가장 중요한 두 기둥이 되는 재정과 국방 관련 내용을 담도록 했습니다. 이 책을 편집한 책임자는 국가재정을 담당하는 호조판서 서영보(1759-1816)와 교육·문화 업무를 담당하는 부제학 심상규(1755-1838)였습니다.

 

서영보는 증조부 때부터 3대에 걸쳐 정승을 배출한 명문 가문 출신입니다. 정조 때 과거에 장원급제한 뒤 청나라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정조 때부터 언론을 담당하는 부서의 책임자를 두루 거친 뒤, 순조 때에 국가 재정을 담당하는 호조판서를 맡게 되면서 『만기요람』 편찬의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심상규도 서영보와 같은 해에 과거에 급제했는데, 정조 임금으로부터 ‘상규’라는 이름을 하사받을 만큼 많은 총애를 받았습니다. 학문적으로는 북학파와 뜻을 같이해서 상공업을 장려해 백성의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 일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그는 『만기요람』을 편찬한 3년 뒤에 병조판서를 담당했는데, 이 때 평안도에서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서 이 사건을 진압하는 책임을 맡기도 했습니다.

 

 

3. 『만기요람』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까요

 

『만기요람』은 「재용편」 6권과 「군정편」 5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재용’은 오늘날의 경제와 통상 분야에 해당하고, 군정편은 국방과 외교 분야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재용편」에는 궁중에 필요한 경비와 조달 방법, 세금의 대상과 방식 및 세금면제 사항, 그리고 세금으로 걷는 곡식의 운반과 관리의 봉급, 그 외에도 각종 재정정책 및 관련 부서의 업무, 국내외 상업 등도 함께 소개되어 있습니다. 또한 「군정편」에는 각 부대 및 관련 부서의 체제와 운영, 교통 및 통신, 군사요충 및 방어시설, 국방에 관계된 다양한 사실 등을 밝혀 놓았습니다.


그런데 『만기요람』은 국가 재정 및 국방과 관련된 주요 사안들을 수치를 통해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어서 조선 시대의 빅데이터와 같은 기능을 담당했습니다. 예를 들면 국왕의 일상식사에 들어가는 수많은 식품 중 1년에 멥쌀은 14석 2두 4승, 메기장쌀은 2석 1두 8승 6홉, 대구는 588마리였는데 그 중에서 대구는 한 마리에 7전 2푼으로 거래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당시의 최고 정예부대였던 훈련도감의 주력 병력은 기마병이 833명, 총기병이 2,440명, 창검병이 738명이었고 그밖에 장교에게 딸린 군졸 1,230명 등으로 구성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 『만기요람』이 만들어졌을 무렵에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1800년에 정조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순조는 열한 살에 왕위를 물려받게 됩니다. 순조가 정치를 직접 수행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에 증조 할머니뻘이었던 정순왕후 김씨가 4년 동안 수렴청정(나이 어린 왕이 즉위했을 때 성인이 될 일정기간 동안 왕대비나 대왕대비가 국정을 대리로 처리하던 일)을 실시했습니다. 순조는 15세가 되던 해부터 정치적 결정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자, 많은 의욕을 보였습니다. 순조가 『만기요람』을 만들도록 지시한 1808년에는 전국에 암행어사가 파견되고, 왕이 관청의 실무자들을 직접 만나서 각종 국가 문제를 의욕적으로 해결하던 때였습니다. 『만기요람』은 수렴청정에서 벗어난 ‘청년 순조’의 열정을 엿볼 수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러나 여러 일을 한꺼번에 다루거나 여기저기를 바쁘게 돌아다니며 열정적으로 노력했던 순조의 의욕은 몇 년 지나지 않아 건강이 나빠지면서 한풀 꺾이게 됩니다.

 

 

2. 『만기요람』을 통해 조선 정부는 무엇을 이루려고 했을까요

 

『만기요람』은 순조가 국정을 직접 운영하면서 재정과 군사 부문의 주요 현황을 파악하려고 한 결과물입니다. 재정과 군사를 파악하는 것이 왜 그토록 중요했을까요? 재정과 군사는 국가의 가장 중요한 자원이었고, 이 자원들을 전국적으로 조사해서 그 전체 규모를 파악할 수 있는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한다면 이를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객관적 근거를 손에 넣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각종 통계자료와 고급 정보에 근거해서 국가의 행정업무가 결정되는 것처럼 조선시대에도 객관적이고 체계적인 데이터에 의해서 국가정책을 결정하고자 노력했습니다. 특히 영조와 정조 때에 오면 이 데이터에 기반해서 국가 재정을 중앙에서 더욱 효율적으로 관리·운영하려고 했고 이를 통해 국가 운영의 주도권을 가지려고 했습니다. 『만기요람』도 국가 재정에 대한 데이터베이스를 정리해서 중앙집권적 재정 시스템을 한층 더 강화하기 노력으로 볼 수 있습니다.

 

 

3. 『만기요람』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재정시스템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요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백성들에게 세금을 부과하기 위해 토지와 호구를 조사했습니다. 토지를 조사해서 만든『양안』과 호구를 조사해서 만든 『호적』은 세금을 부과하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양안과 호적은 전국을 대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많은 비용이 들었습니다. 3년마다 한 번씩 호적을 만든다는 규정은 비교적 잘 지켜졌지만, 20년마다 한 번씩 만드는 양안의 경우는 한 번 정해지면 오래토록 피해를 볼 수도 있었기 때문에 규정대로 작성되지 못했습니다.

16~17세기부터 세금이 부과되는 근거가 대부분 토지로 바뀌자, 조선 조정과 중앙 관청은 새로운 형태의 세금 부과 방식을 생각하게 됩니다. 굳이 지방의 실태를 낱낱이 조사해서 파악하는 것보다 각 지방에서 감당할 수 있는 재정을 총액 단위로 지정하는 정책을 추진한 것입니다. 지방에 할당된 세금 액수만 꼬박꼬박 올라올 수 있다면, 양안이나 호적을 굳이 철저하게 작성할 필요는 없게 됩니다. 그 결과 양안이나 호적과 다른 유형의 자료, 즉 총액 통계 또는 총액 데이터베이스라고 할 만한 책들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죠. 『만기요람』은 이러한 변화를 반영한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조선시대에도 백과사전을 만들었나요

 

『만기요람』은 왕을 위한 필수 참고서, 혹은 백과사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왕을 위한 백과사전뿐만 아니라, 양반 자신의 관심사를 반영하는 다양한 종류의 백과사전이 등장했습니다.

 

‘유서(類書)’라고 불렸던 동양의 백과사전은 서양의 백과사전과 여러 차이점이 있습니다. 백과사전이 어떤 특정한 학문이나 사실에 대해서 체계적인 설명을 하는 것과 달리, 유서는 옛 사람들이 이미 서술했던 내용을 뽑아 항목별로 모으는 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백과사전을 만드는 서양의 전문가는 과거의 지식을 토대로 자신의 의견을 반영해서 각 항목을 작성하지만, 유서의 편찬자는 단지 과거 사람이 작성한 원문의 순서에 따라 이를 기록할 뿐 자신의 견해는 첨가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우리나라도 중국의 영향을 받아 일찍부터 많은 유서가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짐작되지만, 지금까지 알려진 것 가운데에서 가장 오래된 유서는 1554년(명종 9)에 어숙권이 편찬한 『고사촬요』라고 합니다. 이 책은 조선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는 22개 항목의 일반 상식을 모은 것입니다.

 

조선의 본격적인 유서는 1614년(광해군 6)에 이수광이 편찬한 『지봉유설』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지봉유설』은 천문, 지리, 역사, 정치, 경제, 경학, 시문, 언어, 기예, 식물 등 당대 지식인이 갖추어야 할 인문적인 교양과 생활사 및 자연에 관한 거의 모든 지식을 담고 있습니다. 이수광은 348종의 옛 책을 참조하면서, 상고시대부터 조선조 당시까지 2,265명이나 되는 인물을 소개했습니다. 이 책은 당시의 중요한 지식을 가득 담고 있는 점에서도 중요하지만, 경제적인 문장과 과학적인 서술로 말미암아 실학사상의 연구를 위해서도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은 순수하게 성리학만 연구했던 동시대의 학자들에게 잡학이라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현실의 문제가 더욱 복잡해져갔던 조선후기 지식인들에게 그의 백과사전은 많은 후속작이 탄생하는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지봉유설』의 뒤를 이어 이익의 『성호사설』,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 등 여러 백과사전류의 책이 등장한 것이죠. 이러한 글쓰기는 서양의 다양한 학문까지 두루 탐구하는 개방성과 함께 성리학 이외의 학문에 대한 포용성을 보여주었습니다. ‘조선의 백과사전’들은 실천적이고 실용적인 학풍, 즉 실학이 조선후기의 사상계에 일정하게 자리를 잡는 데 주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삼정의 문란’은 왜 일어났을까요?

 

『만기요람』이 만들어졌던 순조 연간은 세도정치가 시작되던 시기였습니다. 세도정치는 순조·헌종·철종의 3대 60여 년간 외척을 비롯한 특정 가문들이 국정 운영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시기입니다. 정치에서는 소수의 가문이 정치를 독점하면서 관직을 사고 파는 등의 여러 문제가 발생했고, 경제에서는 ‘삼정의 문란’이라고 불리는 세금 제도의 문제가 커집니다. ‘삼정’은 조선 후기 국가재정의 3대 요소인 전정·군정·환곡을 말하며, ‘문란’은 오늘날의 용어로 부패에 해당합니다. 우선, 국가 재정의 핵심이 어떻게 부패하게 되었는지 그 내용부터 살펴봅시다.

 

‘전정’은 토지에 매기는 세금입니다. 그런데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 시기는 양전을 실시하지 않고 필요한 액수를 총액으로 지방에 할당하는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중앙에서 해당 지방에 총액을 내려 보내면, 지방 관리가 자율적으로 세금을 분배했기 때문에 공정하지 못한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지방관들은 힘없는 일반 백성들에게는 세금을 거둘 수 없는 토지까지 포함해서 세금을 거두었고, 힘 있는 양반의 토지에 대해서는 면세의 혜택을 주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부정부패가 생겨났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힘없는 백성들의 몫이 되었습니다.

 

‘군정’은 성인 남자들이 군대에 가는 대신 내던 세금을 말합니다. 양반들은 갖가지 방법으로 이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그들이 빠져나간 몫만큼 가난한 농민들에게 부담이 가중되어서 큰 어려움을 겪게 했습니다.

 

19세기에 가장 큰 문제가 된 것은 바로 ‘환곡’입니다. 원래 환곡은 가난한 농민을 구제하기 위해서 식량을 빌려주고 약간의 이자를 덧붙여 되돌려 받던 제도였습니다. 그런데 환곡이 국가기관의 재정을 확보하는 수단으로 변질되면서 환곡의 이자가 점점 높아져 갔습니다. 국가 기관들은 앞을 다투어 환곡을 설치해 이익을 챙기려고 하였고, 농민들이 부당하게 운영되는 환곡을 빌리려고 하지 않자 강제로 곡식을 분배해주고 높은 이자를 거두는 일이 공공연하게 일어났습니다.

 

얼핏 보면 삼정의 문란은 나쁜 관리들의 욕심 때문에 일어난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탐관오리라고 불렸던 나쁜 관리들의 욕심이 일차적인 원인이었죠. 하지만 그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중앙 정부가 필요한 경비를 총액 단위로 지방에 요구하는 한편, 이 금액을 거두는 방법에 대해서는 지방 관리들에게 자율권을 보장했기 때문입니다. 지방의 관리가 정해진 액수만큼의 세금을 꼬박꼬박 보낸다면, 그가 어떤 방식으로 세금을 거두더라도 중앙 정부의 입장에서는 큰 문제가 아니었고, 탐관오리들은 이러한 빈틈을 이용했던 것입니다.

 

 

| 정리 |

 

▶ 『만기요람』은 재정과 군사 분야의 각종 자료를 모아서 왕의 국정운영을 뒷받침한 참고서입니다.

▶ 영조와 정조는 국가 재정을 중앙에서 더욱 효율적으로 관리·운영하려고 했고 이를 통해 국가 운영의 주도권을 가지려고 했습니다. 『만기요람』도 국가 재정에 대한 데이터베이스를 정리해서 중앙집권적 재정 시스템을 한층 더 강화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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