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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시노비감공급대사목』, 노비의 신공감액과 공노비 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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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내용

 

참고문헌

 

 

『내시노비감공급대사목

 

 

 

[중학교 국사]

. 조선사회의 변동 > 2. 세도 정치와 농민의 저항 > [1] 세도 정치는 어떤 폐단을 가져왔는가 

 

[고등학교 국사]

. 사회 구조와 사회 생활 > 4. 근대 태동기의 사회 > [1] 사회 구조의 변동


 

 

노비공의 폐단은 양역보다 심하니 시노비(寺奴婢)로서 말하자면 비()는 혹 늙을 때까지 시집가지 못한 자가 있으며 노()는 혹 머리를 깎고 중이 되는 자가 있고, 양민의 마을에 쉽게 거주하지 못하는데 이르니 그 무궁한 원한은 족히 위로는 하늘의 조화로움을 방해할 만하다. 그러므로 변통의 논의가 이미 오래되었다.

    

奴婢貢之弊 有甚於良役 以寺奴婢言之 婢或有到老未稼者 奴或有削髮爲僧者 至不容居於良民之村 其爲窮寃 足以上干天和是白乎等以 變通之論 蓋已久矣

    

혹은 노비의 이름을 파하고 양정으로 고쳐 삼아야 한다고 하고 혹은 비공이 더욱 불쌍하니 마땅히 먼저 감해주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노비법은 기자로부터 비롯되어 행해진 지 수천 년이고 인륜과 기강이 의지하는 바이자 명분이 관련된 바라 멀리 내다보는 뜻에 있어 결코 가볍게 혁파를 논의할 수 없다.

    

或以爲宜罷奴婢之名 改以良丁是如爲白乎㫆 或以爲婢貢尤矜 當先減給是如爲白乎矣 我東奴婢之法 刱自箕聖 行之累千年 倫綱之條寄也 名分之條係也 其在經遠之慮 決不可輕議革罷

    

지금 우리 성상이 이미 양역을 감필하는 법을 행하였으니 노비공의 법을 고쳐 노는 한 필, 비는 반 필로 공사천에 일체로 시행하여 식례로 정한다. 지금부터 수십만의 빈잔한 노비가 고르게 성택을 입어 남자는 처를 얻고 여자는 지아비가 있어 자연히 각자 삶에 따라 조화로움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今我聖上旣行良役減匹之法 改定貢法 奴爲一疋婢爲半疋 公私賤一體施行 永爲定式 從今以往 累十萬貧奴殘婢庶 幾普霑聖澤 男而有妻 女而有夫 自可以各遂其生導 迎和氣是白乎矣

內寺奴婢減貢給代事目

 

 

 

 

 

국가에 신공을 바치는 공노비

조선왕조는 모든 백성을 양인과 천인 두 범주로 구별하는 양천제(良賤制)를 실시하였다. 노비는 국가기관 또는 개인에게 예속된 신분으로 천인의 대다수를 차지하였으며, 이들은 소속처에 역()을 질 의무가 있었다. 노동력을 직접 바치거나 그에 상응하는 경제적 대가를 신공(身貢)이라는 이름으로 바쳤는데, 이는 조선의 사회·경제를 떠받치는 중요한 기반이었다.

노비는 소속처에 따라 국가에 속한 공노비와 개인에 속한 사노비, 부담하는 역의 종류에 따라 앙역노비(仰役奴婢)와 납공노비(納貢奴婢)로 나뉘었다. 앙역노비는 주인과 가까운 곳에 살면서 의식주를 의지하는 대신 노동력을 바쳤고, 납공노비는 주인과 멀리 떨어져 살면서 정해진 액수의 면포나 동전을 납부하였다. 조선후기가 되면 납공노비의 운영이 훨씬 효율적이라는 인식이 확대되면서 이들의 중요성이 높아졌다.

공노비 역시 노동력을 바치는 이들과 신공을 바치는 이들로 나뉠 수 있었다. 노동력을 바치는 이들은 대부분 지방관청에 속해 잡다한 심부름을 도맡는 관노비의 형태로 존재하였으나, 숫자가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공노비의 대부분은 사실 납공노비로, 향촌사회에 거주하며 농사를 짓다가 매년 한 차례 신공을 바쳤다. 호조를 비롯한 여러 기관은 이들로부터 포목이나 비단, , 동전 등을 거두어 필요한 경비를 충당하였다. 문제는 17세기 이래 납공하는 공노비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호조에서 관할하는 노비 숫자는 1657(효종 8) 8만 여구였으나 100여년이 지난 1750(영조 26)에는 3만 여구로 절반 이상이 사라졌다. 국가로서는 신분제의 유지 그리고 재정 확보를 위해 공노비 감소에 적극적으로 대처할 필요가 있었다.


균역을 표방한 노비 신공 감액

조선후기 공노비의 감소는 여러 가지 사회경제적 조건으로부터 비롯하였다. 공노비를 관할하는 국가기관이 지나치게 많아 노비 점유권을 둘러싼 분쟁이 잦았는데, 이 과정에서 많은 수의 노비가 누락되거나 피역을 꾀하였다. 또한 노비를 양역 자원에 충당하기 위한 제도들도 마련되고 있었다. 영조는 노비세습제를 일천즉천(一賤則賤)에서 종모법(從母法)으로 전환해 노와 양인 여자와 결혼하여 낳은 소생은 양인으로 만들고 군포를 내도록 하였다. 이 과정에서 많은 노비가 양인이 되었으며, 공노비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한편 1750(영조 26)에는 양인의 군포 부담액을 대폭 삭감하여 일괄적으로 포 1필만 내도록 하는 균역법(均役法)이 시행되었다. 당시 양인은 1~3필에 이르기까지 군포 부담이 천차만별이었고 한 사람이 여러 사람의 역을 지기도 했기 때문에, 국가로서는 양인의 경제적 부담을 줄여 피역을 차단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양인의 군포가 1필이 되면서 노비의 신공은 상대적으로 이보다 무거워지게 되어(노는 1필 반, 비는 반 필) 노비로서는 더욱 도망가거나 피역을 꾀하는 일이 많아지게 되었다. 이에 균역법이 시행된 지 5년 후인 1755(영조 31), 노비의 신공 역시 양인의 군포와 똑같이 삭감하는 조치가 단행되었다.

『내시노비감공급대사목』1113장으로 구성된 사료로, 공노비·사노비의 신공을 노 1필 반에서 1, 1필에서 반 필로 줄이는 규정을 자세히 담고 있다. 가장 앞부분에는 영조의 윤음이 실려 있다. 이에 따르면 노비는 과다한 신공으로 인해 가정을 꾸릴 수도 없었고, 양인들로부터 배척받기도 하였다. 노비가 도망가면 신공은 고스란히 해당 지역에 남아 마을 사람들의 공동 책임이 되기 때문에 노비들을 쫓아내기 일쑤였던 것이다. 영조는 기본적으로 노비가 인륜과 기강, 명분과 관련된 바이므로 폐지할 수는 없다고 보았다. 하지만 이왕 양인에 대해서 균역(均役)의 혜택을 베풀었으므로 노비 역시 예외일 수 없다고 하여, 균역법의 일환으로 노비 신공 감액을 전격적으로 단행하였다.

다만 공노비는 국가의 경비였기 때문에 신공을 깎아주면서 발생하는 재정 손실분을 메워주는 조치가 수반되었다. 신공은 공노비·사노비 모두 삭감되었지만, 재정 손실분의 보충은 공노비에 한해서만 이뤄진 것이다. 『내시노비감공급대사목』에서 내시노비는 납공하는 공노비의 별칭으로 왕실에 속한 내노비(內奴婢)와 호조에 속한 시노비(寺奴婢)를 함께 지칭한다. ‘급대는 재정 손실분을 다른 재원으로 대신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에 더해 영조 50(1774)에는 비의 신공이 완전히 폐지되었으므로, 양인과 노비 모두 남자만 포 1필을 내면 되었다. 국가는 양천의 구별없이 균역이 시행되었으므로, 노비가 더 이상 다른 역이나 신분으로 이동하려는 동기가 없어질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신공을 내는 영희와 철수 

노비의 신공이 줄어든 이후, 노비와 양인은 모두 1필의 포만 내면 된다는 점에서 조선의 동등한 백성으로서 자리매김하였다. 하지만 국가의 의도와 달리, 동일한 부담을 지면서 사회적 지위가 더 낮은 노비로 남아있으려는 이들은 없었다. 1790(정조 14) 함양어사 최현중이 노비 신공 수취 실상에 대해 보고한 내용에 따르면 함양의 노비 대장에 남자의 이름은 모두 아기[岳只], 여자는 모두 조이[助是]라 기재되어 있고, 주소나 부모의 성명 등은 하나도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 기존 노비안에 기재된 구수(口數)에 맞춰 신공을 상납할 뿐, 실제로 노비에 대한 파악은 전혀 이뤄지지 않았던 것이다.

예컨대 군현의 수령은 노비안을 매년 수정해서 호조에 보고해야 하는데, 이때 예전 문서에 기초해 기존에 실린 노비들의 이름에 나이만 약간씩 더해 노비의 숫자가 변하지 않도록 하였다. 노비안의 허부화는 함안뿐 아니라 전국적인 현상으로 100, 200세 이상의 청산(靑山백운(白雲노미(老味연이(連伊) 등의 가짜 이름을 노비안에서 찾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허명으로 채워진 노비의 신공은 결국 마을에서 공동으로 토지나 자금을 마련해 이자를 불려 납부하였다.

이처럼 노비 신공의 감액 이후 오히려 노비는 국가의 파악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나아가 노비가 단순히 신공을 걷는 명목에 불과한데 이를 계속 유지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도 제기되었다. 신공의 감액은 단순히 노비의 부담을 줄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노비제 운영 전반에 영향을 미쳤으며, 1801(순조 원년) 공노비 해방의 단초가 되었던 것이다. 『내시노비감공급대사목』은 신공의 감액이 쏘아올린 공노비 해방의 의미에 대해 고찰할 수 있는 사료라 하겠다.

 

1801년 공노비 해방

공노비의 도망과 노비안의 허부화가 반복되는 가운데 정조대에 이르면 이 노비제를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집중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1791(정조 15)에는 사실상 중지되었던 공노비 추쇄(推刷)를 전국적으로 시행해 노비의 실상을 정확히 파악하고자 하였다. 또한 1784(정조 8)·1791(정조 15)·1798(정조 22) 세 차례에 걸쳐 전·현직 대신들과 전국 8도의 감사로부터 노비제 개선안을 수렴하여 대안을 모색하였다. 이 과정에서 노비의 명목 자체가 필요 없다는 견해가 도출되었으며, 이는 정조와 신료들 사이에서 많은 공감을 얻었다.

이러한 작업이 선행되었으므로 순조는 즉위 직후 선왕(先王)의 유지를 받들어 국가에 신공을 납부하는 노비를 일체 혁파한다는 결단을 내릴 수 있었다. 1801(순조 원년) 1, 36,974구의 내노비와 29,093구의 시노비는 모두 폐지되어 양인으로 전환되었으며, 1,500여권에 달하는 노비안은 돈화문 밖에서 불태워졌다. 공노비 가운데 국가에 신공을 바치는 납공노비, 즉 내시노비만을 선별적으로 혁파하였으며, 이에 따른 재정 손실분은 장용영(壯勇營)의 물력으로 채우는 대책이 뒤따랐다.

사실 이 조치는 국가 재정의 안정적인 확보를 위해 진행되었으며, 공노비 가운데 노동력을 바치는 관노비 등은 여전히 존속시켰다는 점에서 제한된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노비제의 존속을 당연시하던 그간의 원칙을 처음으로 깨고 노비제에 대한 획기적인 변화를 도모했다는 점에서 당시의 조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성대중(1732~1809)이 쓴 『청성잡기에 실린 노비부처[奴佛]의 이야기는 공노비 해방이 당시 사람들에게 주었던 기쁨을 잘 보여준다. 혜화문 밖 불천(佛川)이란 개천가 벽에 노비부처가 조각되어 있었다. 도성의 나무하던 노비들은 이 부처는 우리를 남의 노비로 만들어놓고 무슨 면목이 있어 보느냐며 낫으로 눈을 팠고, “이 부처가 사라지면 노비 역시 사라진다고 굳게 믿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불상의 몸체는 하천에 쌓인 모래에 점점 파묻혀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는데, 순조 원년 공노비 해방이 이뤄진 것을 보니 속담이 맞았다는 것이다.

이처럼 공노비 해방은 조선왕조의 100여년에 걸친 노비제 운영의 결론이자, 많은 사람들이 꿈꾸던 변화였다. 공노비와 사노비는 이러한 사람들의 염원을 받아, 1894년 갑오개혁 때 일괄적으로 폐지되었다

 

 

도주경, 2019, 18세기 내시노비 비총제의 시행과 운영 조선시대사학보88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 개인의 견해이므로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의 공식적 의견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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