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푸터 바로가기

교과 연동 자료

이전

민생을 위한 고심의 기록, 『균역사실』과 『균역청사목』

 

 

 

교과서 찾아보기

 

사료 원문과 번역

 

학습내용

 

참고문헌

 

『균역사실』

『균역사목』


 

 

[중학교 국사]

Ⅵ. 조선사회의 변동 → 1. 붕당 정치와 탕평책 → [2] 탕평책을 실시한 목적은 무엇인가? (바로가)

 

[고등학교 국사]

Ⅳ. 경제 구조와 경제생활 → 4. 근대 태동기의 경제 → [1] 수취 체제의 개편 (바로가기)

 

 

 

임진란 이후 5위(五衛)를 폐지하고 훈련도감[訓局]을 설치하자 병력 육성에 필요한 물자는 오로지 양보(良保 : 양인 군보)에게 책임이 주어졌는데, 포(布)를 징수하는 것이 점점 많아졌습니다. 어영청(御營廳)·수어청(守禦廳)·총융청(摠戎廳)·금위영(禁衛營)이 연이어 설치될 즈음이 되어서는 포를 징수하는 방식이 이미 정도를 넘었습니다. 이외에 교묘하게 명목을 만들고 빙자하여 징수하는 것이 날마다 달마다 늘어났습니다. 양군(良軍)이라는 명목으로 포 2필을 징수하는 대상이 숙종 초년에 30만이었는데 지금은 50만입니다.

 

… (중략) …

 

지금 백성 중 양역(良役)에 응하는 자는 모두 경기·삼남(三南 : 경상·전라·충청)·황해·강원도에 있습니다. 이 6도의 민호(民戶)는 모두 134만인데, 잔호(殘戶)·독호(獨戶) 72만 호를 제외하면 실호(實戶)는 62만이고, 사대부·유향품관(留鄕品官)·부사(府史)·서리·역졸(驛卒)·승려 등 양역에 응할 수 없는 자를 제외하면 양역에 응하는 자는 10여 만에 불과합니다.

 

10여 만 호로 50만의 양역을 감당하려고 하니 한 집에 비록 4~5명이 있어도 모두 양역을 면할 수 없는데, 한 사람의 신포(身布)가 동전 4~5냥이니 일가의 4~5명이 납입하는 것이 20여 냥입니다. 이 무리는 대대로 내려오는 업도 없고 땅도 없어 남의 땅을 부쳐먹는지라 1년 수입이 많아도 10석에 불과한데, 반을 땅 주인에게 주고 나면 남은 것이 얼마이며 이 20냥을 낼 수 있겠습니까?

 

비록 날마다 때려도 (신포를) 낼 방법이 없으니, 끝내 죽지 않으면 도망가고 맙니다. 도망간 자와 죽은 자는 또 그들의 몫을 채울 방법이 없으니 죽은 사람에게 포를 징수하거나 갓난아이를 군정(軍丁)에 포함하는 폐해가 생깁니다. 일족이나 이웃을 가두니 죄수들이 옥(獄)에 가득하여, 굴러다니며 소리를 지르고 화기(和氣)를 상하게 합니다. 이 때문에 양역을 변통(變通)해야 한다는 논의가 생긴 것입니다. 변통 논의는 4종이 있는데, 호포(戶布)·결포(結布)·구전(口錢)·유포(遊布)입니다. 각자 자기 의견을 주장하여 하나로 모일 수 없었습니다.

 

壬辰亂後, 罷五衛而設訓局, 則養兵之需, 專責於良保, 而徵布之路稍廣矣. 逮至御營廳·守御廳·摠戎廳·禁衛營, 相繼而作, 則徵布之法, 已濫觴矣. 此外巧爲名色, 憑藉徵斂者, 日增月加. 稱以良軍, 而收布二疋者, 在肅廟初年, 猶爲三十萬, 而今則爲五十萬矣.


… (중략) …


今夫民之應良役者, 盡在畿內·三南·海西·關東. 此六道民戶, 凡百三十有四萬, 而除殘獨戶七十二萬, 實戶僅六十二萬, 而士夫·鄕品·府史·胥徒·驛子·緇髡等, 不可擬議於良役者, 又居五之四, 則應良役者, 只有十餘萬矣.


以十餘萬之戶, 當五十萬之良役, 一家之內, 雖有四五人, 皆不得免焉, 而一人身布, 費四五兩錢, 則一家四五人竝入者, 當費二十餘兩矣. 此輩無世業無田土類, 皆耕人之田, 一年所收, 多不過十石, 而歸其半於田主, 則餘者幾何, 而可以辦此二十餘兩之錢哉?


雖日加鞭扑, 無計辦納, 畢竟不死則逃. 遁者·死者, 又無以充其代, 則乃有白骨徵布·黃口簽丁之弊. 徵族徵隣, 囚繫滿獄, 宛轉呼號, 感傷和氣. 此所以有良役變通之論也. 變通之論有四種, 曰戶布, 曰結布, 曰口錢, 曰遊布, 各主己見, 莫可歸一.

 

『균역사실』(奎 1683, 2b)

 

 

 

오늘날 우리는 모르는 사이에 많은 세금과 얽혀 살고 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구입하는 대부분의 물건은 10%의 부가가치세(VAT)를 포함한다. 해외여행에서 일정 액수 이상 물건을 구입하면 세관(稅關)에서 관세를 내게 된다. 소득세를 환급받기 위한 직장인의 연말정산, 종합소득세 신고 기간은 치열하다. 이루 다 알 수도 없는 세금이 우리의 삶 곳곳에 존재하고 있다.

 

조선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끼친 세금은 무엇이 있었을까? 여러 세금이 있었지만, 그 중 주축은 전세(田稅)·공물(貢物)·군역(軍役)이었다. 전세는 토지에 부과되는 세금이었다. 농업사회인 조선에서 대부분의 소득은 토지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전세는 토지세이자 소득세라고 볼 수 있다. 토지의 생산력이나 매년 농사의 상황을 공정하게 판단하여 세금을 부과하려는 노력이 있었으나, 1635년에 일률적으로 토지 1결당 쌀 4두를 거두는 영정법(永定法)이 실시되면서 전세제도의 정비는 일단락됐다.


공물은 본래 왕실과 관청의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각 지역의 특산물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현물을 부과한 것이었다. 하지만 공물로 바쳐야 할 물품을 구하기 어려워 실제 조세행정의 현장에서는 공물 값을 쌀이나 포목(布木)처럼 농민들의 주변에 있는 것으로 받는 경우가 많았는데, 공물 값이 정해진 것이 없어 자의적 징수가 이뤄지는 문제가 있었다. 이를 시정하기 위해 실시된 것이 대동법(大同法)이었다. 대동법은 공물을 쌀이나 포목으로 받게 하고 값을 토지 1결당 쌀 12두로 정한 것이었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경기선혜법(京畿宣惠法)으로 시작된 대동법은 조세제도상 특수지에 해당하는 평안·함경도를 제외한 전국 6도에 시행되기까지 약 100년이 걸렸다.


군역은 군을 유지하기 위한 국가의 대민(對民) 동원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었는데, 하나는 병역(兵役)을 실제로 부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병역을 납세로 대체하는 것이다. 세금으로서 군역은 실제 병역을 수행하는 군인에게 필요한 비용을 부담하는 것이었다. 농민에게 군인으로 일정 기간 의무 복무하도록 병역을 부과하는 병농일치(兵農一致) 체제하에서 병역 기피와 군사력 약화가 빚어지면서 임진왜란 초기 조선군은 고전에 빠졌다. 이후 조선은 군인을 직업으로 삼는 상비군을 중심으로 한 훈련도감(訓鍊都監)을 설치했고, 다양한 방식으로 운영되는 어영청(御營廳)·총융청(摠戎廳)·수어청(守禦廳)·금위영(禁衛營)을 추가로 설치했다. 정묘·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왕과 조정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중앙군 강화의 결과, 17세기 말 서울에서 유지하는 병력의 총원은 병자호란 이전의 3배라고 할 만큼 비대해졌다.

 

군사기구 확대는 군사비 부담의 증가로 이어졌다. 그런데 납세로서 군역을 부담하는 자원은 비대해진 군사력을 부양하기에 부족했다. 양반에게도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군역을 부과했던 조선전기와 달리, 조선후기에 들어서는 양반은 군역에서 제외됐다. 그리고 천민도 세금으로서 군역의 부과 대상에서는 제외됐다. 사실상 양인(良人)만 군역을 부담했기 때문에 군역을 양역(良役)으로 지칭할 정도였는데, 그 중에서도 극빈층을 군역 부과 대상에서 제외하면 실제로 군역을 부담할 수 있는 사람들은 적었다. 『균역사실』에서 인용한 위 사료가 이런 상황을 지적한 것인데, 당대인은 이를 ‘군다민소(軍多民少)’라고 표현했다. 대다수 양인도 생계가 여유롭다고 보장할 수 없는 가운데, 군역은 과도한 부담이 되고 있었다.

 

17세기 말 대동법이 정착하는 시점을 전후하여 ‘양역변통론(良役變通論)’으로 불리는 군역제도 개혁 논의가 본격화됐다. 소폭의 감군(減軍)에 그친 채 쉽게 돌파구를 찾지 못하던 군역제도 개혁은 영조의 치세 중반이던 1750년(영조 26)에 들어 속도를 냈다. 영조는 두 차례에 걸쳐 창경궁 홍화문으로 나가서 서울 백성들의 의견을 청취했다. 쟁점은 양인들의 부담만으로 군사재정을 충당하는 것이 민폐를 일으키는 상황에서 어떤 대안을 선택할 것인지에 있었다. 여러 방안 중 영조의 주목을 받은 것은 신분과 무관하게 호마다 군역을 부과하는 호포(戶布)였다. 하지만 호포는 군역에 포함되기를 거부하는 양반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혔다. 영조는 대신들에게 적절한 대안을 가져오기 전까지 자신을 만나러 오지 말라고 할 만큼, 군역제도 개혁이 부딪힌 난관에 대해 격앙된 감정을 드러냈다.

 

1750년에 군역제도 개혁이 균역법(均役法)으로 한 차례 완결되었다. 더 이상 군역제도 개혁을 미룰 수 없는 상황에서 선택된 대안은 감필(減疋)과 급대(給代)였다. 감필은 군역으로 부과되는 세액을 종전의 포(布) 2필에서 1필로 반감한 조치였다. 급대는 종전에 양인들이 부담하던 군사재정의 절반을 다른 재원을 활용하여 보전하는 조치였다. 급대를 위해 새로운 재원이 창출됐다. 결미(結米)는 토지 1결당 쌀 2두를 부과한 것이고, 선무군관포(選武軍官布)는 양반에 속하지 않는데 군역이 없는 사람들 중 군역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에게 군관직을 주고 포를 징수한 것이다. 이는 일종의 “경제력에 따른 과세”였다. 또한 어장·염전·선박 등에 부과된 어염선세(漁鹽船稅), 중앙 차원에서 파악되지 않은 토지인 은여결(隱餘結) 등 왕실기구나 지방관청에서 사용하고 있던 재원도 급대를 위해 균역청으로 이관됐다.

 

군역제도의 문제, 군역제도 개혁 논의의 추이, 균역법 실시를 위한 조정의 논의와 왕의 지시를 모아놓은 책이 『균역사실』이다. 균역법 실시의 실무를 총괄한 홍계희(洪啟禧)가 편찬을 주도하여 완성한 뒤 당시 영조를 대신하여 집무하던 사도세자에게 바쳤다. 한편 급대를 수행하기 위해 균역청(均役廳)이 신설되었는데, 균역청 관련 규정은 『균역청사목』에 담겼다. 『균역청사목』은 균역법 실시 후 균역청이 관장하게 된 세금을 항목별로 정리하고, 각각을 어떻게 운영할지 규정했다. 『균역사실』과 『균역청사목』은 민생 안정을 위한 고심, 사회계층의 이해(利害) 충돌을 조정하기 위한 노력의 과정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는 거울이다. 이런 고심과 열정은 면면이 이어져 19세기 중반 호포법(戶布法) 실시의 원동력이 될 수 있었다.

 

 

#조선후기 #균역사실 #균역사목 #중등 #고등

 

 

 

김우철, 2002 「균역법은 왜 성공하지 못했나」 『내일을 여는 역사』 8, 서해문집

송양섭, 2012 「균역법 시행과 균역청의 재정운영 : 급대재원의 확보와 운영을 중심으로」 『영조의 국가정책과 정치이념』,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정연식, 2015 『영조 대의 양역정책과 균역법』,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 개인의 견해이므로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의 공식적 의견과는 무관할 수도 있습니다.

※ 교과서 찾아보기의 교과서 자료 출처는 국사편찬위원회의 우리역사넷입니다.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