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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선도본』, 조선의 병선 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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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선도본

 

 

 

[중학교 국사]

. 조선의 성립과 발전 > 1. 조선의 성립 > [2] 조선의 통치 제도와 그 기능은 

 

[고등학교 국사]

. 민족 문화의 발달 > 2. 중세의 문화 > [3] 과학 기술의 발달


 

 

[다음과 같이 전교하셨다.] “전함의 중요성이 과연 어떠한가? 그런데 도리어 사용의 편리함에 있어서는 조운선만도 못한다. 이것은 대체로 영곤에서 관할하여 살피지 못하고, 읍진 또한 마음을 다하여 정밀하게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놀라움이 이보다 심할 수가 없다. 옛날에는 조운선을 모두 전함으로 사용하였다. 국조보감에 수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망원정에서 시열하였다는 고사가 있어서 확인할 수가 있다. 몇 년 동안 묘당은 비록 관문으로 신칙하였다고 했으나 반드시 그 효력을 보았는지는 알 수 없다. 이미 동틀 무렵에 가서 말했지만, 지금부터 새로 만드는 배는 보통과 다르게 엄히 신칙하고, 그 연도를 기록하여 별도로 안건을 만들어 비변사와 호조, 선혜청에 보관하며, 돌아가며 시범으로 운행하라. 몇 년 동안 시행한 후에 폐단이 없고 효력이 있으면 조선을 수에 따라 개조하지 않아도 된다. 조군의 편리에 있어서는 절목 사이에 따라 바로잡을 일이다.

    

戰艦之緊重 果何如 而反不若漕船之便於使用 此蓋營閫 不能管檢照察 邑鎭 亦不盡心精造而然者 其爲駭然 孰甚於此 古則漕船皆用戰艦 寶鑑所載 望遠亭試閱之故事 可按而知之 年來廟堂 雖有關飭 未必知其必食其效 旣往付之昧爽 自今新造之船隻 別般嚴飭 錄其年條 別作一案 藏于備局及戶惠廳 輪回試運 行之有年 無弊而有效 則漕船不當如數改造 至於漕軍便否 卽節目間從長釐正之事

承政院日記1771, 정조 201228

    

전선 중 상장루가 있는 것, 전선 중 오래되어 상장을 철거한 것, 전선 중에 상판을 더하여 조운선으로 이용하는데 편리하도록 한 것, 조선과 북조선의 구조, 병선 중에 몸체가 작아 쓰기 어려운 것을 각각 그려 성첩하였다.

    

戰船之衣粧樓者 戰船之因舊撤粧者 戰船之加杉變制以便漕用者 漕船及北漕船之制樣 兵船之體小妨用者 各各圖畵成貼

慶尙道戰漕船通用條例冊子

 

 

 

각선도본은 판옥선을 비롯한 각종 배 6척이 기록된 도본이다. 이 도본은 판옥선을 언급할 때 활용되는 자료이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판옥선과 관련된 그림 중에서 회화적으로 완성도가 높을 뿐 아니라 구조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조선의 해양문화사를 복원하는 데 있어서 이 그림의 중요성은 두 번 강조할 필요가 없다. 이 그림에는 크게 여섯 가지 그림이 수록되어 있다.

    


먼저 위의 왼쪽 그림은 판옥선이다. 판옥선의 각종 명칭과 재원이 기록되어 있다. 오른쪽 그림은 아래에 철상장전선(撤上裝戰船)’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때 상장 즉 배의 윗부분을 철거한 전선이었음을 알 수 있다.

    


위의 왼쪽 그림은 조운선이다. 조운선은 중앙의 세곡을 올라가게 하는 수송선이다. 그리고 오른쪽 그림은 북조선(北漕船)이다. 북조선은 조운선의 일종인데, 그림을 통해 모양이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조운선과 북조선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조운 체계의 특성을 살펴보아야 한다.

보통 조선시대 조운이라고 한다면 삼남의 세곡이 중앙으로 올라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조운선은 서해안과 남해안을 중심으로 운행되었다. 그런데 영조 연간이 되면 새로운 형태의 조운선인 북조선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 북조선이 등장하게 된 배경에는 당시 진휼정책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조선 정부가 당면한 문제 중에 하나는 바로 곡식이 부족한 함경도의 진휼 문제였다. 조선 정부에서는 함경도의 진휼을 위해 경상도의 곡식을 활용했다. 그런데 경상도 곡식을 함경도로 운반하기 위해서는 동해안에서 활용할 수 있는 형식의 배가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북조선이다.

    


위의 그림은 병선이다. 병선은 판옥선 휘하에 편입되어 운용되는 복물선 즉 짐배였다. 판옥선은 18세기 기준 164명 이상 탑승하는 큰 배였다. 이들에 대한 군량을 판옥선에 실을 수가 없었다. 이에 판옥선 휘하에 짐배를 소속시켜 판옥선의 군량을 조달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한 것이었다.

    

각선도본은 선박공학자인 김재근이 처음 소개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논문에서 이 자료가 조선 후기 군선의 여러 모습을 밝혀주는 진귀한 자료라고 언급하고 이를 바탕으로 군선의 모습을 고증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 자료의 연대를 1800년대 초반이라고 했다(김재근, 1994 各船圖本, 續韓國船舶史硏究, 서울대학교출판부, 213). 이후 연구가 없다가 한선 연구에 상당한 기여를 한 학자인 이원식은 자신의 저서에서 이 그림을 바탕으로 군선의 모습을 추정하기도 했다(이원식, 2003 조선시대의 배」 『한국의 배, 대원사, 38). 하지만 이 도본의 발간 목적이나 시기, 그리고 이렇게 다양한 선종의 배가 한 그림에 들어간 이유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했다.

    

이러한 각선도본의 용도가 밝혀진 것은 최근의 일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각선도본조전선변통논의를 할 목적으로 그려진 그림이다. 조전선변통논의는 바로 전선을 조운선으로 활용한다는 것이었다. 이 논의의 시작은 정조 연간에 시작되었다. 이러한 논의가 시작된 이유는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 수조의 정지로 인한 군선의 활용도 부족이다. 정조 연간에도 조선 정부는 상당히 많은 군선을 보유하고 있었다. 선안에 따르면 당시 주요 군선인 전선, 귀선, 방패선의 숫자는 195척이었다. 이중 전선이 104, 귀선이 18, 방패선이 73척이었다. 이렇게 많은 군선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훈련에 활용하지 않아 이들 군선이 연해 바닷가에 정박해 있는 실정이었다. 군선이 바닷가에 정박해 있으면, 여러 가지 손상이 발생했다. 다산 정약용(丁若鏞)경세유표(經世遺表)에서 이 시기 전선이 거의 운영되지 않아 모래사장에 그대로 놓여 있으며, 간혹 수조가 있으면 배를 바다로 끌어내기 위해 1,000명 정도가 달려드는데 전혀 움직이지 않으며,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전선이 부서져 내부에서 물이 솟아오른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군선을 활용할 필요가 있었다.

둘째, 소나무 부족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선 정부는 1684(숙종 10) <송금사목(松禁事目)><황해도연해금송절목(黃海道沿海禁松節目)>, 1691(숙종 17)에는 <변산금송절목(邊山禁松節目)>을 반포하고 소나무 관리 규정을 정비했다. 하지만 이 조치 이후에도 송전의 손상은 줄지 않았다. 이로 인해 1788(정조 12)에는 <제도송금사목(諸道松禁事目)>을 다시 반포하여 소나무 관리를 이전보다 더 체계화했다. 이들 <송금사목>에서는 전선병선사후선 등 군선을 건조할 때와 일본에 지급할 범죽(帆竹)을 마련할 때만 봉산의 목재를 이용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이 조치는 소나무를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여 군선 건조에 필요한 목재의 공급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 문제는 해결되기 어려웠다. 이에 따라 제작하는 배의 숫자를 줄이는 방법이 소나무 확보에 도움이 되었다.

세 번째는 경상도의 세곡 운송 시스템의 변화이다. 경상도에서 세곡 운송은 임진왜란 이후 복구되었는데, 운반하는 쌀의 양은 이전보다 많이 줄었다고 한다. 이는 경상도의 농토가 황폐해져 전결 수가 이전보다 줄었을 뿐 아니라 경상도 세곡 중 일부가 일본에 대한 외교 비용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었다. 1678(숙종 4) 대동법 시행으로 인해 전세 외에 대동세도 중앙으로 상납하게 되자 중앙으로 향하는 물류량은 급격히 늘어났다. 이렇게 많은 양의 곡식을 사고 없이 중앙으로 운반하는 것은 조선 정부의 입장에서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에 1760(영조 36)1765(영조 41) 두 차례에 걸쳐 창원진주밀양에 마산창가산창삼랑창 등 삼조창을 설치하고 관영조운제(官營漕運制)를 다시 도입했다. 그러므로 이곳의 조운선은 관에서 직접 마련해야 했다.

결국, 정조는 군선의 활용도 저하에 따른 수군 전투력 약화, 소나무 부족, 경상도 조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경상도를 중심으로 조전선 변통 논의를 진행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후 한동안 논의가 중단되었다.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조전선 논의는 1796(정조 20) 12월 전선의 조운선 활용을 검토하라는 국왕의 지시로 인해 다시 시작되었다. 이러한 국왕의 입장이 전달되자 조선 정부는 전선을 조운선으로 전용(轉用)할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검토를 진행했다. 관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왕의 강력한 의지로 인해 조전선 변통이 추진되었다. 1797(정조 21) 12월 경상감사 이형원(李亨元)은 조전선 변통에 대해 각 도 수령들의 논의를 정리하여 경상도전조선통용조례책자(慶尙道戰漕船通用條例冊子)(이하 조례책자)각선도본(各船圖本)을 작성해 비변사에 바친 것으로 보인다. 조례책자에는 전선의 상장이 있는 것, 전선 중 상장을 철거한 것, 전선 중에 삼판을 더해서 구조를 변경하여 조운으로 사용한 것, 조운선 및 북조선의 구조, 병선 중에 몸체가 작아 쓰기 어려운 것 등을 각각 그려서 첩을 만들었다는 내용이 있다. 이외에 조례책자에는 비변사가 경상도에 내린 관문(關文)과 삼조창 차사원의 첩정(牒呈), 조전선을 만들 때 필요한 각종 규정 등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각선도본조례책자에서 논의된 내용을 바탕으로 설계한 군선의 도면을 담고 있다.

    

당시 전선과 조운선은 일곱 가지 정도 차이가 있었다. 크게 네 가지만 언급하면, 우선 저판[本板]의 길이와 모양이다. 배의 밑판인 저판의 길이는 전선이 65(20.0m)으로 57(17.6m)인 조운선보다 8(2.5m) 정도 길었다. 전선의 저판 앞쪽 폭은 125(3.9m)인데 조운선은 10(3.1m)밖에 되지 않았다. 전선의 뒤폭은 75(2.3m)으로 같았다. 저판의 길이와 폭으로 볼 때 전선은 조운선보다 규모가 크고 전선의 선수 부분은 조운선보다 넓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비우의 모양 및 크기이다. 비우는 배의 정면(正面)인 이물비우와 배의 뒷면인 고물비우로 구분된다. 이 도면에서는 이물비우의 모습만 확인할 수 있다. 비우의 모양은 저판의 모습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이 그림을 통해 전선의 이물비우는 비슷한 길이의 나무를 세로로 연결해서 만들어졌는데 비해, 조운선의 이물비우는 길이가 각각 다른 나무를 대각선으로 붙이는 방식으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셋째, 가목(駕木)과 가룡목(駕龍木)의 숫자이다. 가목은 배의 하단부에 가로로 배치한 나무를 말한다. 가룡목은 가목 밑에 설치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이 도면을 통해 확인되지는 않는다. 이 도면에 가목 아래 삼판마다 가룡목이 끼워져 있는데 가목 밑에 있어서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다(駕龍木逐杉揷入而在駕木之底故不見於外)”라고 기록되어 있음을 볼 때, 가룡목은 밖에서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려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넷째, 삼판(杉板)의 숫자이다. 배의 하단부 외벽을 구성하는 삼판의 숫자는 전선이 7(), 조운선이 11립이었다. 이처럼 판옥선과 조운선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여러 부분에서 달랐다. 조선 정부는 두 배의 장단점을 고려하여 조전선을 설계했다. 바로 아래 그림이 각선도본의 조전선이다.

    

 

조전선변통논의에서는 조전선의 설계와 함께 병선의 모양을 변경하자는 논의도 같이 진행되었다. 조선 정부는 병선의 모양이 조운선과 비슷해서 적재 용량이 200석 정도밖에 되지 않는데, 이를 북조선(北漕船) 모양으로 선체의 모양을 바꾸고 500석을 실을 수 있도록 모양을 바꾸고자 했다. 이에 따라 북조선과 병선이 각선도본에 실릴 수 있었다.

    

이렇게 조전선의 설계도를 비롯하여 각종 규정들까지 마련한 뒤 1798(정조 22) 1월 통제사 윤득규(尹得逵)는 전선 44척을 경상도의 삼조창(三漕倉)에 배치하는 절목을 마련했다. 이 절목에 따르면 통제영고성사천곤양미조항삼천포당포사량구소비포적량에 있는 전선 19척은 삼랑창에, 남해하동평산포에 있는 전선 3척은 속창인 남해의 노량창에 소속했다. 또한 진해창원가배량율포지세포옥포조라포장목포남촌구산에 있는 전선 10척은 마산창에, 거제영등포의 전선 3척은 마산창의 속창인 견내량창에 소속했다. 웅천가덕천성안골신문청천제포에 있는 전선 8척은 삼랑창에, 김해 소속 전선 1척은 삼랑창 속창인 김해의 해창(海倉)에 소속했다. 이들 전선에 부속된 군선도 전선의 소속 조창에 같이 소속했다. 조선 정부는 이 작업을 통해 해당 조창의 물품을 조전선에 싣고 중앙으로 상납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조전선의 설계 및 조창별 배치 규정까지 마련했음에도, 이 논의는 결국 실현되지 못한 채 곧 중단되었다. 이후 조전선변통논의가 몇 차례 실행되어 조전선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전선의 조운에 활용되지 않는 것 같다.

 

 

 

문광균, 2019, 조선후기 경상도 재정 연구, 민속원

송기중, 2019, 조선 후기 수군 연구, 역사비평사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 개인의 견해이므로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의 공식적 의견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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