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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궤를 통해 본 왕실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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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장각 의궤의 원소장처

 

 


강문식 (서울대 규장각 학예연구사)


현재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의궤 1,567건 중에서 원소장처, 즉 의궤들이 제작될 당시에 분상·보관되었던 기관이 어디였는지가 확인되는 의궤는 모두 1,183건이다. 그런데, 조선시대 의궤 분상처는 대한제국 선포를 전후로 변화된 모습을 보이므로, 이 글에서는 대한제국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의궤의 원소장처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또, 같은 종의 의궤라도 건별로 분상처가 다르기 때문에 건수를 기준으로 원소장처 내역을 정리하였다.


대한제국 이전에 제작된 규장각 소장 의궤 1,284건 중에서 원소장처가 확인되는 987건의 원소장처 내역을 정리하면 [표 1]과 같다.


[표 1] 규장각 소장 의궤의 원소장처-1 (대한제국 이전)

원소장처

수량(건)

원소장처

수량(건)

어람

80

종부시

29

예람(시강원)

17

종친부

7

의정부

91

화성행궁

6

예조

125

규장각(비어람)

3

춘추관(예문관)

90

교서관

1

강화(정족산)

185

사복시

1

오대산

203

춘추관/태백산

1

태백산

148

987


[표 1]을 통해, 원소장처별 현황을 살펴보면, 먼저 어람본의 수량이 사고나 관청 소장본에 비해 적은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정조대 외규장각 설치 후 어람본 의궤들이 외규장각에서 보관되었다가 1866년 병인양요로 프랑스군에 의해 약탈된 상황에 기인한 것이다.


의정부 소장본은 총 91건인데, 이 중 79건은 영조대 이전에 제작된 것이며 나머지 12건 중 11건은 철종·고종대에 편찬되었다. 즉, 정조~헌종대 의궤 중에는 의정부 소장본이 1건밖에 남아있지 않다. 이는 의정부가 1757년(영조 33)에 의궤 분상처에서 제외됐다가 1811년(순조 11)에 다시 분상처로 지정되면서, 영조 후반~순조 전반에는 의정부에서 의궤를 소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예조 소장본은 125건 중 경종대 이전 것은 6건밖에 없고 나머지는 모두 영조대 이후 제작된 것들이다. 또, 춘추관 소장본도 90건 중 83건이 순조대 이후 제작된 것들이다. 영조대 이전 의궤 중 예조·춘추관 소장본이 많이 전해지지 않는 이유는 현재 분명하지 않지만, 의궤를 참고할 때 주로 예조와 춘추관 소장본을 참고했던 점을 고려해 보면, 아마도 참고용으로 자주 사용되는 과정에서 상당수가 유실되었던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외사고 소장 의궤들은 전체적으로 모든 왕대에 걸쳐 고르게 남아있는 가운데, 오대산사고본이 203건으로 가장 많고, 뒤를 이어 강화사고본이 185건, 태백산사고본이 148건씩 전해지고 있다. 반면, 대한제국 이전의 적상산사고본은 규장각에 1건도 소장되어 있지 않은데, 이는 일제강점기에 외사고 장서를 통합되는 과정에서 의궤를 비롯한 적상산사고본 도서들이 이왕직(李王職)으로 이관되어 창경궁 장서각에서 보관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 종부시와 종친부 소장 의궤들은 모두 「선원보략수정의궤」들이며, 화성행궁에 소장되었던 의궤들은 「원행을묘정리의궤」(5건)과 「화성성역의궤」(1건)이다. 사복시 소장본은 「원행을묘정리의궤」이고, 교서관 소장본은 「국조보감감인청의궤」이다. 한편, 「순조대왕추상존호순원왕후추상존호도감의궤(純祖大王追上尊號純元王后追上尊號都監儀軌)」(규13362)는 두 곳의 소장본이 섞여 있는데, 즉 2책 중에서 제1책은 태백산사고본, 제2책은 춘추관본이다.


다음으로 대한제국 선포 이후 제작된 규장각 소장 의궤 283건 중 원소장처가 확인되는 196건의 원소장처 내역을 정리하면 [표 2]와 같다.


[표 2] 규장각 소장 의궤의 원소장처-2 (대한제국 시기)

원소장처

수량(건)

원소장처

수량(건)

어람

35

강화(정족산)

27

예람

30

오대산

5

비서감(비서원)

28

태백산

18

장례원(예식원)

7

적상산

8

의정부

14

규장각(비어람)

2

종정원

1

내각

1



196


[표 2]을 보면, 어람용·예람용 의궤와 비서감(비서원)·장례원(예식원)·강화사고 소장본의 수량이 거의 비슷하게 남아 있어서 이곳들이 대한제국기의 기본적인 의궤 분상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어람용의 숫자가 더 많은 것은 융희연간에 퇴위한 고종에게 올려진 어람용이 제작된 것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림1> 평창 오대산 사고의 전경


의정부 소장본은 광무연간 의궤가 13건, 융희연간 의궤가 1건인데, 이는 융희연간에는 의정부가 의궤 분상처에서 거의 제외되었기 때문이다. 외사고 소장본 중에서 오대산사고본이 5건밖에 전해지지 않는 점이 주목되는데, 이는 아마도 1922년에 조선총독부가 일본 궁내청으로 반출한 의궤에서 오대산사고본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던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대한제국 이전 의궤에서는 규장각에 한 건도 없었던 적상산사고본이 8건이나 있는 소장되어 있는 것도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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