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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궤를 통해 본 왕실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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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지(擇地), 길한 땅을 정함

 



박권수 (충북대 교수)


택지(擇地), 즉 길한 땅을 택하는 일은 국가의 의례가 행해지는 공간을 설정하는 일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왕실 의례를 수행하는 데에 필요한 공간이 적절하게 선택되어야 만이, 혹은 적절하게 보이는 논리를 가지고 정해져야 만이 해당 의식이 온전하게 진행될 수 있고 의례의 진정성이 달성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왕실 의례가 온전하게 행해질 수 있는 ‘적절한’ 공간을 결정하고 그 공간이 어떠한 논리로 해당 의례에 적합한 공간인지를 설명하는 일이 바로 관상감(觀象監)이 맡은 택지, 혹은 감여(堪輿)의 업무였다.



<그림1> 서울 관상감에 설치되었던 관천대(觀天臺), 종로구 원서동 206번지 소재


조선시대의 왕실의례 중에서 택지, 즉 길한 땅을 정하는 일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국왕의 장지(葬地)를 결정하는 문제였다. 국장의 과정은 여타의 의례에 비해 훨씬 많은 물력과 인력이 동원되고 그 기간도 5개월이 소요되는 막중한 예식이었다. 일례로, 영조(英祖)의 국장 과정에서 발인에 동원된 여사군(轝士軍, 상여꾼)의 총 수는 무려 8,652명에 달하였다. 또한 당시 국장도감(國葬都監)과 혼전도감(魂殿都監), 산릉도감(山陵都監)의 활동에 소요된 물력을 모두 합하면, 미(米) 5,700석(石), 전(錢) 14,000량(兩), 목(木) 296동(同), 포(布) 14동(同)에 달하였다. 이처럼 막대한 인원과 물력이 동원되는 예식이었기에, 국왕의 장지를 어디로 설정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문제는 국장의 전체 과정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그리고 가장 신중하게 결정되어야 할 문제였던 것이다.


관상감이 장지를 택정하는 과정은 일반적으로 미리 정해 놓은 국릉(國陵)의 후보지들을 살펴보는 일로부터 시작되었다. 『서운관지(書雲觀志)』(1818)에는 “국릉의 후보지라는 표를 세워둔 곳”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관상감이 국왕의 능이 들어설 수 있는 후보지로서 미리 장부에 기록해 놓았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국왕이 승하하고 나면 우선 관상감에서 미리 국릉의 후보지로 표를 세워 놓은 곳들과 과거 국장의 과정에서 길지로 거론되었던 곳들 중에서 적합한 곳을 골라서 신하들을 보내어 살펴보는 작업, 즉 간심(看審)을 여러 차례 행하였다. 물론 국릉의 후보지로서 장부에 기재되어 있던 곳 이외에도 길지라고 생각되는 여타의 후보지들도 함께 고려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이들 후보지들 중에서 최종적인 장지가 선택되기 위해서는 예조(禮曹)와 관상감의 관원들이 여러 차례 답사하고 논의하는 과정이 이루어져야만 하였다.


조선의 국가의례를 규정하고 있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1474)에는 국왕이 죽으면 “5개월이 지나서 장사를 지내”는데, 이를 위해 “미리 예조의 당상관(堂上官)과 관상감의 제조(提調)가 지리학(地理學) 관원을 거느리고 장사지낼 만한 땅을 가리고, 의정부(議政府)의 당상관이 다시 살펴서 임금께 계문하여 정하였다”고 적고 있다. 여기에 따르면, 국왕의 장지는 기본적으로 예조의 관리들과 관상감의 관리들이 먼저 후보지를 답사한 후에 그곳이 장사지낼 만한 땅이라고 판단하여 보고를 하면(1단계), 다음으로 의정부의 당상관이 다시 가서 살피고 난 후에 이를 임금에게 보고하여 최종적으로 결정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이런 규정들은 왕릉을 조성하는 전 과정을 문서화하여 정리한 『산릉도감의궤(山陵都監儀軌)』들의 장지결정 관련 조목들에서 비슷한 문구로 반복되어서 등장한다.



<그림2> 『영조원릉산릉도감의궤(英祖元陵山陵都監儀軌)』의 표지


장지가 최종적으로 결정되면, 관상감의 관원들은 길일을 잡아서 왕릉 후보지의 혈처를 중심으로 영역을 설정하고 그곳에다 표식을 해두는 일을 행하였다. 봉표(封標)의 과정은 다음과 같다. 먼저 능소(陵所) 후보지 영역의 네 모퉁이에 있는 흙을 파서 밖으로 퍼내고 가운데 부분의 흙을 남쪽으로 퍼낸다. 그리고 이 다섯 군데에 각각 표목(標木) 하나씩을 세워 봉표(封標)를 행하였으며, 이후 가운데 표목의 왼쪽에서 후토(后土: 土地를 맡은 神)에게 제사를 지냈다.[『國朝五禮儀』 卷7 凶禮 治葬 37a, “以㝎擇日, 開塋域, 掘兆四隅外其壤, 掘中南其壤, 各立一標. 當南門立兩標, 觀象監官, 柌后圡於中表之左.”]. 이런 봉표의 과정들은 한편으로는 최종적으로 결정된 장지에 대해 관민(官民)의 주의를 요구하거나 혹은 그곳에 깃들어 있는 신들을 달래는 의식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장지에 대한 최종적인 결정을 대내외적으로 공표하고 확정짓는 행위이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택지의 과정, 즉 좋은 땅을 고르는 과정은 조선시대 왕실의 장례과정에서 빠질 수가 없고 또한 우선적으로 수행되어야 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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