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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궤를 통해 본 왕실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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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국왕 얼굴은 어떻게 그렸을까? ― 어진(御眞) 관련 의궤들

 

 


신병주 (건국대 교수)


오늘날 우리는 TV나 신문 등을 통하여 대통령의 모습을 온 국민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런데 고려시대, 조선시대와 같은 옛날에도 일반 백성들이 국왕의 모습을 볼 수 있었을까? 또한 이들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겨놓기는 했을까? 결론적으로 백성들이 국왕의 모습을 직접 접할 기회는 매우 드물었다.



<그림1> 영조 어진


그러나 역대 국왕의 영정을 따로 보관하여 후대에 널리 전해지게 하기위하여 국왕의 초상인 어진은 정기적으로 제작되었다. 전통시대 최고의 권력자였던 국왕의 어진은 과연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의궤의 기록에 의하면 어진은 당대 최고의 화가 특히 인물화에 뛰어났던 화원의 손에 의해 그려졌다. 그러나 아무리 강심장인 화가라도 최고의 권력자인 국왕 앞에서 얼굴을 빤히 바라보면서 그 모습을 그린다는 것은 정말 진땀이 흐르는 작업이었을 것이다.어진을 제작하는 화원은 크게 주관화사(主管畵師)와 동참화사(同參畵師), 수종화원으로 구분되었다. 주관화사는 국왕 영정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인 얼굴을 맡은 화가를 말하며 동참화사와 수종화원은 주관화사를 도와주는 역할을 하였다. 어진 제작의 주관화사가 결정되면 영정을 도사(圖寫:생존한 국왕의 모습을 직접 그림)거나 모사(模寫:국왕 사후에 기존의 영정이나 자료를 토대로 그림)하는 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작업에는 주관화사를 도와주는 1~2명의 동참화사와 3~4명의 수종화원이 함께 참여하였다.


동참화사는 주관화사는 옷과 같은 부분을 그리거나 색칠하는 일을 맡았으며, 수종화원은 그림 제작에 필요한 각종 업무를 지원하면서 영정 제작 작업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어진 제작이 완성되면 화원들은 벼슬의 승급이나 말의 지급 등과 같은 포상을 받았다. 특히 어진 제작을 주관하는 만큼 주관화사는 당대 최고의 화가로 평가받았으며, ‘어용화사’라고 불리는 영예가 주어졌다.



<그림2> 어진 제작 때 왕이 사용한 의자와 병풍(『고종어진순종예진도사도감의궤』)


어진을 제작할 때는 당시 도화서 화가 이외에도 전국에서 초상화에 뛰어난 선화자(善畵者)를 구하여 그 가운데서 화가를 선정하기도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와 같은 연대기자료와 각종 의궤의 기록에는 화원이 선발되는 과정이 언급되어 있다. 특히 1688년(숙종 14)에 제작된 『영정모사도감의궤』의 기록에는 어진을 맡길 화원을 선발한 과정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의궤는 어용을 그린 의궤로서 현재 남아있는 것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숙종대에 태조의 영정을 모사할 때는 전란 후 참고할 수 있는 기록이 거의 없어졌기 때문에 화원을 선발하고 취재하는 과정 또한 매우 까다롭고 치밀하게 이루어졌다. 한시각, 허의순, 윤상익 등 도화서 화원 이외에 수안군수 신범화가 ‘어려서부터 화법에 밝고 모사를 잘한다’는 이유로 작업 책임자인 김수흥의 추천을 받았으며, 영정 제작에 이름이 있었던 조세걸, 송창엽 등이 서울에 올라와 시험을 치루었다. 예비시험은 직접 영정을 그리지는 못하고 공신화상을 그리는 것으로 대치하여 그 실력을 평가하였다. 국왕 초상화의 제작전에 미리 실기시험을 치루었던 것이다. 시험의 결과 화원인 윤상익과 평양출신의 전직관료 조세걸이 마지막까지 경합을 벌였는데 조세걸이 시험 성적에서 앞섰으나, 윤상익이 ‘연소하여 눈이 밝아 모사를 잘할 수 있다’는 이유로 선발되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을 영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얼굴과 전체 윤곽을 담당하는 주관화사(主管畵師)로 뽑게 되었는데, 둘의 우열이 가려지지 않자 두 사람 모두에게 영정의 정본(正本)을 그리도록 명하였고 결국 윤상익의 것이 정본으로 채택되고 조세걸의 것은 초본(草本)과 함께 태워졌다. 어진은 대개 유탄(柳炭)이나 묵화(墨畵)로 초본을 그리고 이 초본을 바탕으로, 정본 채색한 어진을 완성하였다고 한다.



<그림3> 『태조영정모사도감의궤』 표지


어진 관련 의궤 중 현재 남아있는 것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688년(숙종 14) 태조의 어진을 제작한 과정을 기록한 「태조영정모사도감의궤」이다. 이것은 경기전에 모셔져 있다가 손상된 태조의 영정을 서울로 옮겨와 다시 그리는 작업에 관하여 기록한 것이다. 1713년(숙종 39)에 제작된 『어용도사도감의궤』는 숙종의 어용을 그리는 일을 기록한 것이고, 영조대에는 『세조영정모사도감의궤』와 「숙종영정모사도감의궤」가 제작되었다. 이어 헌종대인 1837년(헌종 3)에 태조의 어진을 모사한 「영정모사도감의궤」가 제작되었고, 고종대에 태조의 어진을 모사한 과정을 기록한 의궤가 3차례 제작되었고(1872년, 1901년, 1902년), 1902년에는 고종의 어진과 황태자의 예진(睿眞)을 직접 그린 과정을 기록한 『어진도감의궤』가 제작되었다. 아홉 건의 의궤 중 일곱 건의 의궤가 기존의 어진을 바탕으로 모사한 ‘모사도감의궤’이고, 2건이 생존해 있던 국왕의 모습을 담은 ‘도사도감의궤’이다.


어진 관련 의궤에도 어진은 직접 그려져 있지 않아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이들 의궤를 통하여 조선시대 국왕의 초상화 제작이 계속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사실과 어진의 제작과정, 어진을 보관한 장소, 화원들의 참여과정과 포상 등에 관한 정보도 알 수 있었다. 또한 어진 제작에는 당대 최고의 화가들이 동원되었기 때문에 조선시대 화원들의 시대별 활동상도 찾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어진 제작에 필요했던 각종 도설과 어진을 봉안한 행렬 모습을 담은 반차도가 그려져 있어서 당대인들의 행사 모습을 생동감있게 접할 수 있었다. 당대 최고의 화가가 떨리는 붓 끝으로 자신의 혼을 담아 그려냈을 국왕의 초상화 그 실물의 대부분은 남아 있지 않지만, 그들이 쏟아 부은 열정이 의궤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사실은 무척이나 다행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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