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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궤를 통해 본 왕실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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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의 무덤을 조성하는 『산릉도감의궤』

 

 

 

 

 

장례를 중시하는 전통

 

국장에 관련된 의궤

 

산릉도감의 업무 분장

 

장릉의 이동

김문식 (단국대 사학과 교수)


 


최근 미얀마와 중국에 닥친 자연재해 때문에 수많은 사망자와 이재민이 발생했다. 피해 정도가 워낙 심각하여 사망자의 시신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고 있는데다 어렵사리 살아남은 사람들은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이들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조선의 왕실 가족이 사망했을 때 이를 마무리하는 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유학자의 필독서인 『논어』에는 ‘마지막을 삼가고 멀리 돌아가신 분을 추모하면 백성의 덕이 후한 데로 돌아갈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군주가 장례를 예법대로 거행하고 제사를 정성스럽게 지내면 백성들은 그런 군주의 덕을 본받아 교화가 이뤄질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러한 유학의 영향을 받아 우리는 조상의 장례를 극진히 치르는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심각한 사고가 발생했을 때에도 어떻게든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지내려고 한다.

 

 

 


<그림1> 인조장릉산릉도감의궤(仁祖長陵山陵都監儀軌) 장서각 소장본(청구기호 2-2367)의 앞표지

 

황실이나 왕실의 가족이 사망하면 국장을 지내게 되는데, 황제와 황후의 장례는 어장(御葬), 국왕과 왕비의 장례는 국장(國葬), 세자와 세자빈의 장례는 예장(禮葬)으로 구분하여 불렀다. 사망을 표현하는 용어도 달랐는데, 『예기』에서는 천자는 붕(崩), 제후는 훙(薨), 대부는 졸(卒), 사는 불록(不祿), 서민은 사(死)라고 규정했다. 조선의 국왕은 제후에 해당하므로 훙이라 하는데, 실록에서는 통상 “상(上)이 승하하셨다”고 표현했다.


국왕이 사망하면 그날로 장례를 집행할 도감을 설치하게 되는데, 장례를 총괄하는 국장도감, 시신을 안치한 빈전을 설치하는 빈전도감, 무덤을 조성하는 산릉도감이 설치되었다. 또한 장례가 치러진 이후에는 신주를 모시고 삼년상을 치르는 혼전도감이 설치되는데, 이들 도감에서는 각각의 의궤를 남겼다. 따라서 국왕의 장례가 끝나게 되면 『국장도감의궤』 『빈전도감의궤』 『산릉도감의궤』 『혼전도감의궤』가 차례로 작성되어 기록의 양이 풍부해졌다.

 

  


인조의 무덤을 조성한 『산릉도감의궤』를 중심으로 산릉도감의 업무를 살펴보자. 1648년 5월 8일에 인조가 창덕궁 대조전에서 사망했다. 55세의 나이였다. 인조가 사망한지 5일 만에 세자로 있던 효종이 국왕으로 즉위했고, 이후 본격적인 국장 절차에 들어갔다.

먼저 무덤을 조성할 장소를 정하는 문제가 거론되었다. 인조의 무덤은 첫째 왕비인 인렬왕후가 묻혀 있는 장릉으로 결정되었는데, 이곳은 인조가 생전에 미리 정해둔 장소였다. 장릉은 인렬왕후를 장사지낼 때 국왕과 합장할 것으로 고려하여 담장과 석물, 정자각 등의 위치를 가운데로 조정해 두었기 때문에, 공사에서 인력과 비용을 많이 절약할 수가 있었다.

 


<그림2> 인조장릉산릉도감의궤(仁祖長陵山陵都監儀軌) 장서각 소장본(청구기호 2-2367)에

수록된 사수도 중 남방 주작도

 

산릉도감은 업무에 따라 여러 부서로 나뉘어졌다. 먼저 삼물소(三物所)는 무덤 주변에 옹가나 수도각 같은 임시 건물을 세우고 관을 내릴 때 이용하는 녹로 같은 기계를 제작하는 곳인데, 땅을 파는 것에서 시작하여 무덤의 봉분을 조성할 때까지 작업을 계속했다. 다음으로 조성소(造成所)는 정자각이나 재실, 찬궁을 만드는 부서인데, 정자각의 경우에는 인렬왕후를 장사지낼 때 만들었던 건물에 새로 단청을 입혀 활용했다. 또한 찬궁은 국왕의 시신을 안치한 재궁(梓宮)을 땅 속에 묻기 전에 잠시 안치해 두는 상자를 말하는데, 찬궁의 내부 벽에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를 그린 종이를 붙여두었다.


부석소(浮石所)는 무덤에 필요한 석물을 설치하는 곳인데, 혼유석, 난간석, 동자석, 병풍석, 문무석, 장명등과 같이 다양한 석물을 만들어 설치했고, 노야소(爐冶所)에서는 무덤에 필요한 각종 철물들을 제작했다. 이외에도 별공작에서는 무덤 조성에 필요한 탁자, 벼루, 그릇, 촛대, 책상, 돗자리 같은 물품들의 제작을 담당했고, 분장흥고에서는 비가 올 경우를 대비하여 기름먹인 종이로 우비를 만들었다.

 

 

 

장릉은 원래 1635년(인조 13)에 사망한 인열왕후의 무덤으로 조성되었다. 위치는 경기도 파주 운천리로 오늘날 파주시 문산읍 운천리 능말마을에 해당한다. ‘능말’이란 ‘왕릉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1649년 5월에 인조가 사망하자 장릉은 왕과 왕비가 나란히 안장된 쌍분 형태로 조성되었다. 쌍분이 완성된 것은 그해 9월 20일이었다. 훗날 장릉에는 뱀과 전갈 같은 벌레들이 석물의 틈에 집을 짓고 사는 일이 발생했고, 1731년(영조 7) 8월에 파주의 교하로 옮겨졌다. 지금의 파주시 탄현면 갈산리가 그곳인데, 무덤이 옮겨지면서 쌍분은 합장릉이 되었다.

 


<그림3> 인조장릉산릉도감의궤(仁祖長陵山陵都監儀軌) 장서각 소장본(청구기호 2-2367)에 수록된 능상각

 

무덤을 조성하는 공사에 필요한 인력은 승군(僧軍)과 모군(募軍)으로 조달되었다. 승군은 전국에서 1천명이 동원되었는데, 이들은 좌우수석소(左右輸石所)라 불리는 부서에 배치되어 석물을 날랐다. 이번에 필요한 석물은 우이동에서 채취했는데 승군들은 석물을 용산 포구까지 육로로 운반한 다음 선박을 동원하여 장릉이 위치한 파주로 갔다. 승군들은 한 달 동안 일을 했는데 각자가 필요한 양식을 지참했으며, 별도로 임금을 받지는 않았다.


흥미로운 것은 임금을 주고 동원한 모군이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에 토목공사가 있으면 연군(烟軍)이라는 이름의 인력을 무상으로 동원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요역제로 인해 평민 출신의 성인 남자는 국가공사에 참여할 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전국에 1,399명의 연군을 책정한 다음 이들에게서 쌀이나 포를 징수하고, 이를 재원으로 활용하여 모군을 모집했다. 또한 기왕에 국왕 무덤을 조성할 때에는 3천 명 정도의 연군을 책정했는데, 그 규모를 줄인 것은 재정 지출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였다. 모군은 주로 한성부의 호적에 등재된 사람 중에서 2,848명을 모집했는데, 많게는 1~2개월, 적으면 열흘 정도까지 작업에 참여했다. 그리고 모군에게는 일의 숙련도와 역할에 따라 임금이 차등 지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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