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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궤를 통해 본 왕실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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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새 제작을 기록한 『보인소의궤』

 

 

 

 

 

 

 

 

대한민국의 새 국새

 

국새와 보인

 

보인의 제작과 보인소의궤

 

전통을 계승하는 국새

 

김문식 (단국대 사학과 교수)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국새(國璽)를 사용하고 있다. 1948년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태극익룡 1호를 국새로 사용했는데, 이로부터 계산한다면 제5대에 해당하는 국새이다. 새 국새는 봉황 모양의 손잡이에 훈민정음 서체로 ‘대한민국’이라 새겼는데, 그 동안 국새의 손잡이는 용 모양에서 거북 모양, 봉황 모양으로 변해왔다.

 


<그림1> 제5대 국새(출처:경제투데이)

 

이번의 국새는 전통 방식을 따라 주물로 제작했고 부속되는 끈이나 자물쇠 주머니, 상자와 같은 16가지 물품들도 전통적인 방식을 따라 제작했다. 당대 최고의 장인들이 참여했음은 물론이다.

국새는 대통령이 국가 원수로서 헌법을 공포하거나 5급 이상 공무원에게 임명장을 수여할 때, 중요한 외교 문서를 작성할 때에 사용한다. 오늘날 국새를 사용하는 횟수는 연간 1만 번 이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새는 국가를 대표하는 도장으로 국가의 공식 문서에 사용된다. 국새의 기원은 중국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현존 기록으로는 진시황 때까지 올라간다. 진시황은 봉황새가 깃든 돌에서 나온 옥에 ‘수명어천(受命於天) 기수영창(其壽永昌)’이라 새겼는데, 옥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옥새’라고도 불렀다. 우리나라는 단군신화에 환웅이 환인으로부터 천부인(天符印)을 받았고 부여 예왕 때에 국인(國印)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렇지만 이는 모두 새(璽)라는 이름에 부합하는 도장은 아니다. 우리나라 국새로는 대한제국 때 고종 황제가 사용한 대한국새(大韓國璽)가 새라는 이름에 부합하는 도장이다.

 

국새와는 별도로 보인(寶印)이라는 도장이 있다. 보(寶)와 인(印)이라는 2종의 도장을 합한 것인데, 조선시대의 왕실과 관청에서 보인을 사용했다. 보는 어보(御寶)라고도 하는데 국왕과 왕비만이 사용할 수 있는 도장이고, 인은 국왕과 왕세자를 비롯한 왕실 가족은 물론이고 중앙과 지방의 각급 관청에서도 사용했다. 환웅의 천부인이나 예왕의 국인은 바로 인에 해당하는 도장이며, 오늘날 우리들이 사용하는 도장도 모두 인이다. 옥으로 만든 새를 옥새라 하듯이 보인도 재료에 따라 이름이 달라졌다. 금으로 만든 보를 ‘금보’라 하고 은으로 만든 인을 ‘은인’이라 하는데, 인의 경우에는 금인이 드물었다.


조선시대에는 새란 이름을 가진 도장이 없었지만 국새라는 표현은 많이 사용했다. 조선 국왕의 도장에는 여러 종류가 있었는데, 이것이 국가를 대표하는 경우에는 국새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 국왕의 보인은 넓은 의미에서 국새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1879년(고종 13)에는 『보인소의궤』가 작성되었다. 이는 경복궁 근정전에 보관하던 국왕의 보인과 세자궁의 옥인을 새로 제작한 것을 기록한 것인데, 보인을 제작한 ‘보인소의 의궤’란 뜻이다. 이 때 보인을 새로 제작한 것은 화재 때문이었다. 11월 4일 경복궁 교태전에서 발생한 불이 인근 건물로 번져갔고 830여 칸이 불타버리는 참사가 일어났다. 불이 워낙 순식간에 번져갔기 때문에 국왕들의 친필을 비롯한 귀중품들을 하나도 건지지 못했고, 대부분의 보인들이 불타버렸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고종은 화재로 없어진 보인들을 다시 제작하게 했고, 간신히 남은 보인들도 모두 수리하게 했다.

 


<그림2> 『보인소의궤』 조선국왕지인 도설

 

『보인소의궤』에는 이때에 제작된 11종의 보인과 이를 보관하는 상자의 모양을 천연색으로 그렸으며, 각 물품의 규격과 재료를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첫 번째 도장은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인데 이는 청나라에 보내는 외교문서에 사용했던 도장이고, 다음에 나오는 대조선국주상지보(大朝鮮國主上之寶)는 일본에 보내는 외교문서에 사용했던 도장이다. 청에 보내는 외교문서에서 ‘조선국의 왕’이라 표현하던 것을 일본에 보내는 문서에서 ‘대조선국의 주상’이라 한 것은 국제관계상 청과는 상하관계, 일본과는 대등관계에 있음을 반영한 때문이었다. 일본에 보내는 외교문서에는 이외에도 위정이덕(爲政以德)과 소신지보(昭信之寶) 도장이 사용되었다.

 


<그림3> 『보인소의궤』 조선국주상지보 도설

 

조선왕보(朝鮮王寶)나 시명지보(施命之寶)는 국왕의 명령을 전달하는 문서에 사용하던 도장이었고, 유서지보(諭書之寶)는 관찰사나 절도사의 임명장에 사용하던 도장이었다. 또한 과거지보(科擧之寶)는 과거 합격자에게, 선사지기(宣賜之記)는 국가에서 인쇄한 서적을 하사할 때 사용했다. 오늘날에는 하나의 국새를 다용도로 사용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용도에 따라 여러 국새가 있었다.


보인의 손잡이에도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조선국왕지인은 유일하게 용머리에 거북이 몸통이었고, 위정이덕이나 선사지기는 사각이었으며, 나머지는 모두 거북이 모양이었다. 대한제국기에는 용 모양의 손잡이가 많이 사용되었는데, 용은 황제를 상징하는 신성한 동물이었기 때문이다.


12월 28일에 완성된 11종의 보인이 궁궐로 들어갔고, 고종은 작업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상을 주었다. 보인 제작의 업무를 총괄했던 고위 관리에게는 궁중에서 훈련시킨 말과 사슴 가죽을 하사했고, 하급 관리에게는 품계를 올려주거나 지방 수령에 임명했다. 보인을 제작한 장인들은 27종의 직종에 77명이 참여했는데, 이들에게는 무명 옷감을 상품으로 지급했다. 국가사업에 참여한 유공자에게는 반드시 상을 주는 것이 조선시대의 관례였다.

 

 

 

이번에 만든 국새는 전통적인 방식을 따라 만들었고 국새 관련 물품도 함께 만들었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봉황 모양의 손잡이에는 여전히 유감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봉황도 국왕의 상징물이기는 하지만, 국새의 역사를 보면 용 모양의 손잡이가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대한제국의 대한국새(大韓國璽)가 완전한 형식을 갖춘 국새라 한다면, 대한민국의 국새는 이를 계승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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