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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궤를 통해 본 왕실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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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기도감의궤』 속의 화약병기

 

 


허태구 (가톨릭대 교수)


『화기도감의궤』는 1614년(광해군6) 7월부터 1615년(광해군7) 5월까지, 화기도감(火器都監)에서 수행하였던 화약병기(火藥兵器)의 제작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현재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 소장 증인 『화기도감의궤』(奎 14596)는 당시 제작된 9건의 의궤 가운데 하나로, 원래 강화도 사고(史庫)에 보관된 것이었다. 이 의궤는 17세기 전반 조선의 병기 제조 및 국방 태세를 파악하는 데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자료로서, 제작이 완료된 화기의 종류별 수량과 그림, 화기도감의 조직과 인원, 주요 원료와 재원의 조달, 각종 장인(匠人)의 생산량 등 풍부한 정보를 담고 있다.


화기도감이 설치될 무렵의 조선은, 누루하치의 통솔 아래 급속히 성장한 건주여진(建州女眞)과의 군사적 긴장이 점차 고조되던 시기였다. 조선은 건주여진의 기마병을 평지에서 정면으로 상대할 경우 승산이 희박하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방어가 쉬운 험준한 지형을 선점하여 축성(築城)한 뒤 이곳에서 지구전을 펼치고자 하였다. 화기도감은 이러한 방어 전략의 실행에 없어서는 안 될 화약병기를 단 기간 내에 대량으로 제조하기 위해 설치된 임시 관청이었다.


화기도감은 약 11개월 간의 작업 끝에 총 6종의 화약병기를 제작하여 각 지방의 군사 거점과 중앙에 비축하였다. 이 때 제작된 화약병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병기는 불랑기(佛狼機)라는 대포이다. 불랑기사호(佛狼機四號) 모포(母砲) 50개가, 사호자포(四號子砲) 250개와 함께 제작되었다. 그리고 이보다 크기가 작은 불랑기오호(佛狼機五號) 모포 50개가, 오호자포 250개와 함께 제작되었다. 모두 철환 1개를 넣어 발사하였다. 불랑기사호 모포의 무게는 90근(斤: 1근은 약 600g), 길이는 3척(尺: 1척은 영조척으로 약 30.65㎝) 1촌(寸) 7분[分]이었다. 불랑기오호 모포의 무게는 60근, 길이는 2척 6촌 5분이었다. 불랑기는 프랑크(frank)의 한자식 표기였다. 명나라 사람들이 유럽인들을 프랑크라고 불렀던 데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불랑기는 당시 유럽인들이 보유하였던 화포를 지칭하였다.



<그림1> 『화기도감의궤』의 불랑기(佛狼機)


불랑기는 포신(砲身)에 해당하는 모포(母砲)와 탄환과 화약을 채워 넣는 자포(子炮)가 분리되는 구조적 특징을 갖고 있었다. 모포 하나에 여러 개의 자포가 딸려 있어서, 전투시에는 모포 후면 상단에 있는 구멍에 탄약이 장전된 자포를 끼워서 점화를 하는 구조였다. 그러므로, 기존의 화포에 비해 발사 간격이 짧았고, 포신에 가늠자와 가늠쇠가 달려 있어서 명중률도 높았다. 모포와 자포가 분리되는 구조였기 때문에, 모포와 자포의 구경(口徑)이 일치하지 않거나 결합이 부적절할 경우에는 정상적인 발사가 어렵다는 단점도 있었다. 모포는 동철(銅鐵)로, 폭발시의 높은 압력을 견뎌야 하는 자포는 강도와 점성이 높은 정철(正鐵)로 제작하였다. 임진왜란 중에 명군(明軍)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전래되어, 17세기 이후에는 조선군의 주력 화포로 사용되었다.


두 번째 병기는 현자총통(玄字銃筒)으로 50개가 제작되었다. 동철로 제작되었다. 무게는 70근, 길이는 2척 3촌 5분이었다. 조선 태종대에 처음 제작되었으며, 당시 조선에서는 천자(天字)·지자(地字)총통 다음으로 큰 대포였다. 철환(鐵丸) 100개를 넣어 발사하거나, 차대전(次大箭) 또는 은장차중전(隱藏次中箭)이라는 큰 화살 1개를 넣어 발사하였다. 수성용(守城用)으로 성곽에 거치하여 사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판옥선과 거북선에 탑재하기도 하였다.


세 번째 병기는 백자총통(百字銃筒)으로 20개가 제작되었다. 동철로 제조되었다. 무게는 28근, 길이는 2척 7촌이었다. 철환(鐵丸) 15개를 넣어 동시에 발사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명군이 평양성을 탈환할 때 불랑기와 함께 사용한 기록이 보이는데, 이후 조선에서 계속 제작되었다.



<그림2> 『화기도감의궤』의 삼안총(三眼銃)


네 번째 병기는 삼안총(三眼銃)으로 203자루가 제작되었다. 정철로 제작하여 폭발 시에 총신의 파열을 방지하였다. 무게는 7근 반, 길이는 1척 4촌 8분이었다. 임진왜란 중에 명군으로부터 전래되었다. 세 개의 총신(銃身)이 하나의 손잡이에서 뻗어 나간 특이한 형태 때문에 삼안총 또는 삼혈총(三穴銃)이라고 불렀다. 각 총열에 철환 1개씩 넣어 발사하였다. 불씨를 손으로 점화하는 개인화기로서, 당시 조총(鳥銃) 다음으로 애용되었다. 기병도 많이 사용하였다.



<그림3> 『화기도감의궤』의 소승자장가(小勝字粧家)


다섯 번째 병기는 소승자장가(小勝字粧家)로 306자루가 제작되었다. 정철로 제작하였다. 무게는 7근, 길이는 2척이었다. 철환 1개를 넣어 발사하였다. 소승자장가는 기존의 승자총통을 개량한 것으로, 조총(鳥銃)의 여러 장점을 채택·적용한 것이 특징이다. 조성(照星: 조준장치에 해당)을 정밀하게 만들었고, 장가(粧家: 개머리판에 해당)도 부착하여 일본군이 사용하는 조총과 다름없는 형태를 갖고 있었다. 여섯 번째 병기는 쾌창[快鎗]으로 724자루가 제작되었다. 정철로 제작하였다. 무게는 8근, 길이는 2척 4촌이었다. 쾌창 역시 불씨를 손으로 점화하는 개인화기의 일종이었다. 명중률이나 관통력이 조총에는 못 미쳤으나, 유사시 타격무기인 곤봉으로 전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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