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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궤를 통해 본 왕실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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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전의 건축 과정을 기록한 『중화전영건도감의궤』

 

 

 

 

 

 

 

 

덕수궁과 중화전

 

고종대 중화전의 신축

 

「중화전영건도감의궤」의 내용

 

김문식 (단국대 사학과 교수)


 

 

2008년 2월 11일에 서울을 상징하던 숭례문이 불타는 사건이 발생했다. 6백년 이상의 세월을 견뎌온 문화재가 한순간의 방심으로 큰 손상을 입은 것이다. 한국의 문화재 중에는 숭례문 이외에도 화재에 취약한 목조 건축물이 많이 있다. 앞으로 숭례문을 원형대로 복원함과 동시에 목조 문화재를 보호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서울에는 20세기 초에 세워졌다가 완전히 불탄 후 복원된 건물이 있는데, 덕수궁의 중화전이 그것이다. 덕수궁은 원래 세조의 손자이자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이 살았던 사저(私邸)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서울의 궁궐이 모두 불타버리자 선조가 이곳에 거처했는데 그 때의 이름은 ‘정릉동 행궁(行宮)’이었다. 여기서 행궁이란 국왕이 임시로 거처하는 집을 말한다. 궁궐이 복구된 이후 광해군은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고, 정릉동 행궁을 경운궁(慶運宮)으로 승격시켰다. 이후 조선의 국왕들은 주로 창덕궁에서 살았고, 경운궁을 방문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경운궁이 다시 정치의 중심지가 된 것은 고종 때였다. 1907년에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을 떠나 경운궁으로 돌아왔다. 고종은 원래 경복궁에 살았는데 왕비 민씨가 일본인에게 피살된 이후 경복궁을 피한 것이다. 고종은 경운궁에서 대한제국의 탄생을 준비했고, 황제로 등극한 후에는 경운궁 즉조당에서 대한제국이 탄생했음을 선포했다. 이 때 즉조당의 이름은 태극전(太極殿)이 되었고, 얼마 후에는 중화전(中和殿)으로 바뀌었다. ‘중화’란 「중용」에 나오는 말로 사람의 마음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공정한 상태를 말한다. 대한제국은 탄생했지만 경운궁에는 황제가 업무를 볼 수 있는 공간이 충분하지 않았다.

 

 

 

고종은 경운군의 공간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중화전 건물을 새로 지었다. 건물이 완성된 것은 1902년이었는데, 이 해는 고종이 왕위에 오른 지 40주년이 되는 해였다. 중화전은 대한제국의 권위를 부각시키기 위해 2층으로 우뚝하게 지었고, 건물의 색깔도 황제를 상징하는 황금색이 주조로 이루었다. 새로 지어진 중화전은 경운궁의 중심 건물로 국가의 주요 행사를 거행하는 장소가 되었다.


1904년 경운궁에 큰 불이 나서 대부분의 건물이 불타버렸다. 불은 함녕전(咸寧殿)의 온돌을 수리하고 불을 붙이는 과정에서 발생했는데, 불길이 바람을 타고 순식간에 주변 건물로 옮겨가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사건이 발생하자 정부에서는 신속하게 사태 수습에 나섰다. 황제 가족의 초상화를 다른 건물로 대피시켰고, 사건에 책임이 있는 관리들을 조사하여 처벌했다. 또 사건이 발생한 다음날 건물들을 중건하는 공사를 시작하여 중화전은 1905년 11월에 완공했다. 경운궁의 이름이 덕수궁으로 바뀐 것은 1907년이었다.

 


<그림1> 「중화전영건도감의궤」 당가천장 그림

 

 

 

「중화전영건도감의궤」는 1902년 중화전을 지을 때의 사실을 기록한 의궤이다. 이와는 별도로 불타버린 경운궁의 건물들을 중건할 때에는 「경운궁영건도감의궤」가 작성되었다. 「중화전영건도감의궤」를 보면 중화전의 전체 모습과 중화전 건물 안에 비치한 물품들의 그림이 있는데, 어좌가 놓인 당가(唐家), 당가 뒤에 설치한 오봉(五峰) 병풍, 어좌를 둘러싼 곡병(曲屛), 당가의 천장 그림이 있다. 당가의 천장에는 특별히 황제를 상징하는 용 두 마리를 조각하여 장식했다.


중화전 건물은 정면이 5칸이고 측면이 4칸인 20칸의 건물로 창덕궁의 인정전과 같은 크기였다. 중화전 건물은 고주(高柱)라 불리는 10개의 큰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데, 이 기둥들은 지름이 50cm, 길이가 14m를 넘는 아름드리 소나무였다. 목재는 주로 강원도 회양, 양구, 금성 등지의 소나무를 이용했는데, 노송 34그루를 베어 강가의 포구로 운반했고, 한강의 물줄기를 이용하여 춘천과 가평을 거쳐 서울로 운반했다.

 


<그림2> 중화전 그림 「중화전영건도감의궤」(좌),「경운궁영건도감의궤」(우)

 

중화전은 원래 2층이었지만 1905년에 중건한 것은 1층이었는데, 국가의 재정 사정이 그만큼 나빠졌기 때문이다. 두 의궤의 그림을 비교하면 중화전 건물의 변화가 잘 나타나는데, 고주의 높이는 14m에서 8m로 낮아졌다. 이번에 사용한 목재는 큰 것은 강원도 강릉, 울진, 평해에서 운반했고, 작은 것은 경기도 양주와 동래 범어산성에서 구했다.


목재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석재였다. 석재는 궁궐의 바닥을 깔거나 뜰에 세우는 품계석, 궁궐의 담장을 짓는데 이용되었는데, 강화도, 전라도 여산, 우이동 등지에서 구입하거나 직접 채취하는 경우도 있었다. 목재와 마찬가지로 석재를 서울까지 운반하는 일도 쉽지가 않았는데, 이동 경로에 있는 다리와 하천을 수리하고 나서야 무거운 석재를 운반할 수 있었다.


중화전 건축에 참여한 기술자의 숫자는 총 40개 분야에 226명이며, 여기에는 그림을 그리는 화원(畵員)과 화사(畵師) 34명, 글씨를 쓰는 사자관(寫字官) 3명, 목재와 석재를 다루는 목수(木手) 57명, 석수(石手) 22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모두 전문 기술을 가진 기술자들이었고, 단순 노동자로 가담한 사람까지 합하면 총 2천명에 이르렀다. 의궤에는 2천명의 명단이 모두 기록되어 있다.

 


<그림3> 「중화전영건도감의궤」 공장(工匠) 부분

 

중화전의 상량문(上樑文)은 최고 관리였던 윤용선이 작성했다. 윤용선은 상량문에서 환구단과 중화전이 건립되어 황제국의 위상에 부합하는 건물을 가지게 되었고, 경운궁은 선조가 임진왜란 이후 부흥을 꿈꾼 곳이자 인조가 즉위한 장소라는 점, 중화전이 위치한 황화방(皇華坊)은 천자의 기운이 넘치는 곳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중화전의 건설과 함께 대한제국의 국운이 번성하기를 기원하는 내용이다.


『중화전영건도감의궤』에는 이외에도 고종 황제가 신하들에게 내린 명령, 공사에 관련된 관청들 사이에 주고받은 공문서, 상량식 행사 절차, 공사에 투입된 물품과 비용, 공사 참여자에게 지급한 상품 내역과 같은 공사 관련 기록들이 상세하게 정리되어 있다.


이러한 조선시대의 기록문화를 계승하여, 앞으로 숭례문을 복원할 때에는 그 의궤까지 함께 작성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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