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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궤를 통해 본 왕실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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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실 결혼의 이모저모 – 『가례도감의궤』

 

 

 

신병주 (건국대 교수)


조선시대에도 결혼은 인생에서 최고의 경사였음에 틀림이 없었다. 특히 왕실의 결혼은 국가 행사 중에서도 가장 큰 경사의 하나였으며, 왕실의 결혼을 가리켜 ‘가례(嘉禮)’라고 칭하였다. 현존하는 「가례도감의궤」는 1627년(인조 5) 소현세자의 가례에서 시작하여, 1906년에 치루어진 조선의 마지막 왕인 순종의 가례까지 기록하고 있어서, 「가례도감의궤」를 통해서 시기적으로 조선시대 왕실의 결혼식 장면을 포착할 수 있다. 특히 말미에 그려진 그림(반차도)은 축제의 기분을 한껏내는 생동감 깊은 내용들로 채워져 있어서 당시의 결혼식 행사에 직접 참여한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반차도는 마치 오늘날 비디오카메라로 촬영한 듯한 효과를 안겨다 준다.



<그림1>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 반차도 중 왕의 가마(좌), 왕비의 가마(우)


「가례도감의궤」에는 왕비의 간택(揀擇:왕비 후보의 선택)을 비롯하여, 납채(納采:청혼서 보내기), 납징(納徵:결혼 예물 보내기), 고기(告期:날짜 잡기), 책비(冊妃:왕비의 책봉), 친영(親迎:별궁으로 가 왕비 맞이하기), 동뢰연(同牢宴:혼인 후의 궁중 잔치), 조현례(朝見禮:가례 후 처음으로 부왕이나 모후를 뵈는 의식) 등 혼인의 주요 행사를 비롯하여, 혼인에 필요한 각종 물품의 재료와 수량, 물품 제작에 참여한 장인들의 명단, 행사와 관련하여 각 부서간에 교환한 공문서등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마지막 부분에는 행사의 하이라이트를 그린 반차도를 그려넣어 그 대미를 장식하고 있다. 이처럼 체계적이고 화려하게 정리된 기록이라는 점에서 「가례도감의궤」는 조선시대 의궤의 꽃이라 칭할 만하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전기부터 왕실의 혼인을 위하여 ‘가례도감’이 설치되고 이때의 상황을 기록한 『가례도감의궤』가 편찬된 것을 확인할 수 있으나, 조선전기의 의궤 중 현재 전해지는 것은 없다. 현재 전해지는 가례도감의궤 중 최초의 것은 1627년(인조 5) 12월 27일 소현세자(1612-1645)가 강석기의 딸 강빈(姜嬪)과 혼인한 의식을 정리한 「소현세자가례도감의궤」(자료:소현세자 가례 반차도:규장각 도록)이며, 순종과 순종비의 결혼식을 정리한 1906년의 「순종순정왕후가례도감의궤」가 가장 나중의 것이다. 280년간 20건의 가례가 의궤로 정리되어 있는 셈이다.


왕실의 혼인에서 가장 먼저 필요했던 절차는 간택이었다. 간택은 왕실에서 규수를 선택하는 것으로, 왕실의 혼사에는 3차례의 간택이 실시되었다. 국가에서는 왕실의 결혼에 앞서 금혼령을 내리고 결혼의 적령기에 있는 팔도의 모든 처녀를 대상으로 ‘처녀단자’를 올리게 했다.



<그림2> 「순조순원왕후가례도감의궤」 반차도 중 왕비의 가마


처녀단자를 올릴 필요가 없는 규수는 종실의 딸, 이씨의 딸, 과부의 딸, 첩의 딸 등에 한정되었으나, 실제 처녀단자를 올리는 응모자는 25-30명 정도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간택은 형식상의 절차였을 뿐 실제 규수가 내정된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간택에 참여하는데 큰 부담이 따랐기 때문이었다. 간택의 대상이 된 규수는 의복이나 가마를 갖추어야 하는 등 간택 준비 비용이 만만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설혹 왕실의 부인으로 간택이 되더라도 정치적으로 상당한 부담이 따랐기 때문에 이를 기피하는 경향이 컸다.


그럼 간택을 받은 왕비의 심경은 어떠했을까? 혜경궁 홍씨가 저술한 『한중록』에는 혜경궁 홍씨가 사도세자의 비로 간택을 받을 당시의 여러 정황들을 언급한 내용이 있는데, “간택 이후 갑자기 찾아오는 친척들이 많고 전에는 절연되었던 하인들도 오는 이가 많아졌으니 인정과 세태를 가히 볼지라”라고 기록하여 권력층에 접근하는 세태는 예나 지금이나 차이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왕실에서는 왕비를 간택할 때 세 차례의 심사과정을 거침으로써 왕비 간택에 최대한 공정성을 기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왕비를 뽑는 중요한 행사를 전국적으로 알려 축제분위기를 조성하고 전국에 걸쳐 널리 왕비감을 물색하려는 국가의 의지를 과시하고자 하였다.


간택에 참가한 처녀들은 같은 조건에서 후보를 고른다는 취지에서 모두 똑같은 복장을 입었다. 오늘날 미인대회에서 모든 참가자들이 수영복 심사 때 동일한 복장으로 심사에 임하는 것과도 유사하다. 초간택시의 복장은 노랑저고리에 삼회장을 달고 다홍치마를 입었다. 재간택, 삼간택으로 올라갈수록 옷에 치장하는 장식품은 조금씩 늘었다. 삼간택에서 최종적으로 뽑힌 처녀가 부인궁으로 나갈 때 입는 옷은 비빈(妃嬪)의 대례복으로 거의 왕비의 위용을 갖추게 되었다.


삼간택에 뽑힌 규수는 별궁에 모셔졌다. 별궁은 예비 왕비가 미리 왕실의 법도를 배우는 공간의 기능과 함께 국왕이 친히 사가(私家)에 가는 부담을 덜어주는 기능을 하였다. 조선시대에 별궁으로 가장 많이 활용된 곳은 어의동 별궁이었으며,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시에는 대원군의 사저였던 운현궁이 별궁으로 사용되었다.


별궁에 모셔진 왕비는 납채, 납징, 고기, 책비, 친영, 동뢰 등 왕실 혼인 의식의 기본이 된 육례에 의거하여 혼례식을 치루었다. 육례의 의식 중에서도 국왕이 왕비를 모셔오는 친영은 왕실 혼인식의 하이라이트로 인식되었다 『가례도감의궤』의 말미에 친영의 장면을 반차도에 포함시킨 것은 이러한 의식의 소산이었다.


왕실 혼인의 절차


1) 간택 : 신부 후보 중에서 신부감을 선택함, 대개 3차에 걸친 간택의 과정을 거침 

1차 6~10명, 2차 3명, 3차 1명을 선발한다.


2) 육례의 절차

① 납채 : 간택한 왕비에게 혼인의 징표인 교명문을 보내고 왕비가 이를 받아들이는 의식.

② 납징(납폐): 혼인 성립의 징표로 폐물을 보내는 의식.

③ 고기: 혼인 날짜를 잡는 의식.

④ 책비(책빈): 왕비 또는 세자빈을 책봉하는 의식. 왕비가 혼례복인 적의를

입고 책명을 받는 자리로 나간다.

⑤ 친영: 국왕이 별궁에 있는 왕비를 직접 맞이하러 가는 의식.

⑥ 동뢰: 국왕이 왕비를 대궐에 모셔와 함께 절하고 술을 주고받는 의식.



반차도에 나타난 친영 행렬의 인물들은 화면의 중심을 이루는 왕과 왕비의 가마를 중심으로 하여 후면도, 좌측면도, 우측면도의 다양한 기법으로 그려져 있다. 그럼 왜 이렇게 다양한 측면에서 인물의 모습을 그렸을까? 아마도 이 행렬에 참여하고 있는 각 부서의 인물을 구분할 수 있게 하여 담당 업무를 반차도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게 하도록 했을 것이다. 반차도는 최초에 그려질 때 행사의 예행연습, 도상연습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결국 이러한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만들어진 반차도라면 각 부서별․담당업무별로 인물을 쉽게 구분하도록 하는 것이 필요했을 것이고, 이러한 목적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다양한 각도에서 인물의 모습이 포착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그려진 반차도는 한 각도에서 잡은 그림보다 훨씬 입체적으로 보인다. 사람들의 행렬이 정지하고 있는 모습이 아니라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느낌을 갖게 하는 것이다. 오늘날로 치면 카메라를 여러 각도에서 잡음으로써 현장의 모습을 보다 생동감있게 보여주는 것과 같다. 국왕의 혼인이라는 거대한 축제의 행렬을 보다 사실적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이처럼 다양한 각도에서 인물들의 모습을 담았던 당시인들의 지혜가 느껴진다.


「가례도감의궤」를 빼곡이 채우고 있는 당시의 기록들에서 왕실 혼인의 구체적인 모습과 함께 국가의 정치, 문화, 경제적 역량이 한데 집결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의궤 제작에 사용된 깨끗하고 질긴 종이, 정성을 들인 유려한 필체, 250여 년의 세월이 무색하게 깔끔하게 채색되어 전혀 변질되지 않은 그림 등은 문화재로서의 의궤의 가치를 보다 돋보이게 한다. 의궤는 우리 문화의 정수를 담고 있는 기록 유산으로서, 국제화 시대의 문화사절로도 손색이 없는 자료이다. 전통문화에 대한 진면목을 보여줄 수 있는 『가례도감의궤』와 같은 자료는 ‘가장 전통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일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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