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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궤를 통해 본 왕실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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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궤는 어디서 보관했을까? ― 의궤의 분상처

 

 


강문식 (서울대 규장각 학예연구사)


의궤의 내용 중에 「의궤사목(儀軌事目)」이라는 항목이 있다. 「의궤사목」은 의궤 제작과 관련된 사항들을 수록한 것인데, 그 내용 중에 의궤의 제작 건수 및 소장처, 즉 분상처(分上處)가 기록된 경우들이 많이 있다. 의궤의 분상처는 의궤의 제작 건수에 따라 각기 다르게 나타났으며, 또 의궤의 내용이나 주제에 따라 특정 기관에 분상되기도 하였다.


의궤의 제작 건수는 활자본을 제외하면 보통 5~9건 정도인데, 이 중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사례는 5건이다. 이 경우 국왕이 보는 어람(御覽) 1건 외에 의정부(議政府), 예조(禮曹), 춘추관(春秋館), 그리고 지방의 네 사고(史庫) 중 한 곳에 분상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지방 사고 중에는 강화도 정족산 사고에 분상된 경우가 가장 많다. 의궤가 8건 제작된 경우에는 어람, 의정부, 예조, 춘추관, 그리고 지방 사고 네 곳 모두에 분상되었다.



<그림 1> 『혜빈부궁도감의궤』의 儀軌事例 부분


국왕·왕비의 3년상을 마친 후 그 신주(神主)를 종묘(宗廟)에 모시는 과정을 정리한 ‘부묘도감의궤(祔廟都監儀軌)’의 경우에는 종묘를 관리하는 관서인 종묘서(宗廟署)가 분상처에 추가되어, 어람 1건과 의정부, 예조, 춘추관, 지방 사고(4곳), 종묘서 분상건 등 총 9건이 제작되었다. 그리고 신주를 모시는 장소가 종묘가 아닌 궁(宮)이나 묘(廟)인 경우에는 그 장소가 분상처에 포함되었다. 『헌경혜빈부궁도감의궤(獻敬惠嬪祔宮都監儀軌)』의 분상처에 혜경궁의 신주를 모신 경모궁(景慕宮)이 포함된 것, 『효명세자입묘도감의궤(孝明世子入廟都監儀軌)』의 분상처에 효명세자의 사당인 문호묘(文祜廟)가 포함되어 있는 것 등이 이에 해당하는 사례들이다.


18세기 들어서면 의궤의 분상처에서 의정부가 빠지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 때 의궤를 5건 제작하는 경우에는 의정부 대신 지방사고 한 곳이 더 추가되었고, 기존에 8건 또는 9건이 제작되었던 경우에는 제작 건수가 1건씩 줄어들었다.



<그림2> 『사직악기조성청의궤』의 의궤사목 부분


18세기 들어서면 의궤의 분상처에서 의정부가 빠지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 때 의궤를 5건 제작하는 경우에는 의정부 대신 지방사고 한 곳이 더 추가되었고, 기존에 8건 또는 9건이 제작되었던 경우에는 제작 건수가 1건씩 줄어들었다.


한편, 의궤의 종류에 따라 특정 기관에 분상되는 경우들도 있었다. 『선원보략수정의궤(璿源譜略修正儀軌)』는 왕실 인물들의 존호(尊號)·시호(諡號) 등이 개정될 때마다 그 내용을 반영하여 『선원보략(璿源譜略)』을 수정한 내역을 기록한 의궤인데, 보통 5건에 제작되어 『선원보략』 수정 및 의궤 편찬을 주관한 기관인 종부시(宗簿寺)와 지방 사고 4곳에 봉안되었다. 『악기조성청의궤(樂器造成廳儀軌)』는 보통 2건이 제작되어 예조와 장악원(掌樂院)에 분상되었으며, 또 궁중의 잔치와 관련된 의궤들도 장악원에 분상되었다.


어진(御眞)·영정(影幀) 제작과 관련된 의궤들은 선원전(璿源殿)이나 영희전(永禧殿) 등 진전(眞殿)이 분상처에 포함되었다. 궁궐이나 성곽의 건설에 관한 내용을 기록한 영건(營建) 의궤들은 반드시 호조(戶曹)에 분상되었는데, 이는 영건에 필요한 경비의 조달 문제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또, 영조대에 편찬된 『친경의궤(親耕儀軌)』는 행사를 주관한 부서인 봉상시(奉常寺)가, 『대사례의궤(大射禮儀軌)』는 대사례가 시행되었던 장소인 성균관(成均館)이 분상처에 포함되었다. 한편, 태실(胎室) 관련 의궤들은 태실이 있는 도(道)의 감영(監營)이나 주현(州縣)의 관아(官衙)에 분상되었다. 현재 경상남도 사천시청을 비롯한 지방 자치체에 소장되어 있는 태실 관련 의궤들은 조선시대 당시 태실이 있던 지방의 관아에 분상되었던 책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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