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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궤를 통해 본 왕실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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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궤에 찍힌 관인

 

 


강문식 (서울대 규장각 학예연구사)


관인(官印)은 국가 기관과 그 관원이 공적으로 사용하는 인장으로, 국가에서 생산된 공식 문서와 기록물의 내용을 확인하고 증명하는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의궤는 조선시대 국가의 공식 기록물이었으므로, 당연히 관인이 찍혀 있다. 단, 국왕에게 올리는 어람용(御覽用) 의궤에는 관인이 없고, 관청이나 사고(史庫)에 소장되었던 의궤에만 관인이 찍혀 있다.


규장각 소장 의궤 1,567건 중에서 목록 등을 통해 찍혀있는 관인의 내용이 확인되는 것은 모두 1,071건이다. 이 중에서 가장 많이 찍힌 관인은 ‘봉사지인(奉使之印)’인으로 588건이며, 그 다음은 ‘일품봉사지인(一品奉使之印)’으로 300건이다. 즉, 관인이 확인되는 의궤 1,071건 중 약 83%에 달하는 888건에 ‘봉사지인’과 ‘일품봉사지인’이 찍혀 있다.


‘봉사지인’은 봉명사신(奉命使臣)의 관인으로, 예조에서 다량의 봉사지인을 가지고 있다가 특수한 임무나 일시적인 일을 수행할 때, 또는 임시적으로 설치된 관청 등에서 사용할 합당한 관인이 없을 때에 쓸 수 있도록 하였다. 이는 예기치 못한 일들이 발생했을 때 사용할 수 있는 관인을 미리 준비하여 국정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조치였다. 기록에 의하면 ‘봉사지인’은 주로 다른 나라에 파견되는 사신(使臣), 국가 행사를 주관하기 위해 임시로 설치된 도감(都監)의 관원, 각 진(鎭)의 병마절도사 등에게 지급되어 사용되었다. 또, ‘일품봉사지인’은 1품의 관계(官階)에 해당하는 직임을 맡은 관리가 사용할 수 있는 관인으로, 주로 의궤와 외교문서에서 그 용례를 찾아볼 수 있다. 이상과 같은 ‘봉사지인’과 ‘일품봉사지인’의 용도를 고려할 때, 의궤에 찍혀 있는 ‘봉사지인’과 ‘일품봉사지인’은 당시 조선의 관인 운영의 실례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규장각 소장 의궤 중에는 소수이지만 ‘이품봉사지인(二品奉使之印)’이 찍혀 있는 경우도 있다(총 18건). 1628년(인조 6) 편찬된 『[소무영사]녹훈도감의궤([昭武寧社]錄勳都監儀軌)』(규14583), 1748년(영조 24) 편찬된 『영정모사도감의궤(影幀摸寫都監儀軌)』(규13997), 1786년(정조 10)에 편찬된 『문효세자묘소도감의궤(文孝世子墓所都監儀軌)』(규13924) 등이 ‘이품봉사지인’이 찍혀 있는 의궤들이다. ‘이품봉사지인’은 2품 품계에 해당하는 직임을 맡은 관리가 사용하는 관인이다. 따라서 ‘이품봉사지인’의 사례는 ‘일품봉사지인’의 사례와 더불어 당시 행사 운영과 의궤 편찬을 주관했던 도감의 위계(位階)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하지만, 예를 들어 묘소도감의궤 중에도 ‘일품봉사지인’인 찍힌 경우가 있고 ‘이품봉사지인’이 찍힌 경우가 있는 등, 같은 종류의 의궤라고 해도 찍힌 관인이 항상 동일했던 것은 아니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의궤에 찍힌 관인을 근거로 도감의 위계 차이 여부를 확언하기는 어렵다. 한편, 숙종대 편찬 의궤 중에 ‘사품봉사지인(四品奉使之印)’이 찍힌 의궤가 6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선원보략수정의궤』들이다.


‘봉사지인’류 외에도 규장각 소장 의궤에는 여러 종류의 관인들이 찍혀 있다. 『선원보략수정의궤』의 경우에는 ‘종부시인(宗簿寺印)’(81건), ‘종부시도제조지인(宗簿寺都提調之印)’(4건), ‘종부시교정청지인(宗簿寺校正廳之印)’(1건), ‘종친부인(宗親府印)’(13건), ‘종정원인(宗正院印)’(10건) 등 『선원보략』의 수정과 의궤 편찬을 주관했던 기관의 관인이 찍혀 있다. 특히, ‘종친부인’은 대한제국 이전 고종연간에, ‘종정원인(宗正院印)’은 광무연간에만 나타나는데, 이는 이 시기에 『선원보략』 수정 업무가 기존의 종부시에서 종친부·종정원 등으로 이관됐음을 보여준다.


의궤 소장처(분상처)의 관인이 찍혀 있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1611년(광해군 3)에 편찬된 『제기도감의궤(祭器都監儀軌)』(규14931)에는 ‘의정부인(議政府印)’이 찍혀 있고, 1643년(인조 21) 편찬된 『영접도감반선색의궤(迎接都監盤膳色儀軌)』(규14576)에는 ‘사각장(史館藏)’, 즉 춘추관의 관인이 찍혀 있어서 본 의궤들의 소장처를 확인할 수 있다. 또, ‘장례원계제과(掌禮院稽制課)’의 인장이 찍힌 의궤들이 숙종·영조·순조·고종대에 나타나는데(총 5건), 이들은 모두 ‘진연(進宴)’·‘진작(進爵)’ 등의 연향 관련 의궤들로서 예조에 소장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사례들은 의궤 겉표지 등에 기재된 개별 의궤의 분상처 기록과 함께 해당 의궤가 지금까지 어떤 과정을 거쳐 왔는지를 밝히는 데 중요한 근거 자료로 사용될 수 있다.



<그림1> 좌 : 『원행을묘정리의궤』 표지, 우 : 『원행을묘정리의궤』 속의 규장지보


이밖에 특이한 관인이 찍힌 사례로는 1762년(영조 38)에 편찬된 『황단종향의궤(皇壇從享儀軌)』의 ‘황명유민지인(皇明遺民之印)’, 1776년(정조 즉)에 편찬된 『[장조]상시봉원도감의궤([莊祖]上諡封園都監儀軌)』(규13337)의 ‘공조낭청지인(工曹郎廳之印)’, 1795년(정조 19)에 편찬된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와 1801년(순조 1)에 편찬된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등의 ‘규장지보(奎章之寶)’·‘이문원(摛文院)’ 등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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