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푸터 바로가기

의궤를 통해 본 왕실 생활

이전

국왕과 신하가 함께하는 활쏘기 시합 ― 『대사례의궤』

 

 


신병주 (건국대 교수)


대사례는 국왕과 신하가 회동하여 활쏘기 시합을 하면서 군신간의 예를 확인하는 행사로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시대에 대사례가 시행된 것은 1477년(성종 8), 1502년(연산군 8), 1534년(중종 29), 1743(영조 19) 등 4차례로 확인된다. 그러나 대사례 외에 어사(御射)‧시사(試射)가 빈번하게 실시되었고, 지방에서 실시되는 향사례(鄕射禮)도 매우 활성화되어 있었다. 조선사회에서 사례(射禮)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음은 기록화에서도 확인된다.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화성에 행차한 모습을 8폭의 병풍으로 담은 「수원능행도(水原陵幸圖)」 중에는 정조가 득중정(得中亭)에서 활쏘기 시범을 보인 모습을 담은 득중정 어사도(御射圖)가 남아 있어서 국가의 주요한 잔치에 활쏘기가 빠지지 않았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영조대의 대사례 실시는 왕권 강화를 위한 국왕의 의도가 크게 작용하였다. 즉위 초부터 표방되었던 왕권 강화를 위한 탕평책이 제대로 실시되지 못하고, 특히 1740년(영조16) 노론 4대신이 복관되면서 노론의 정치적 영향력이 점차 강화되어 영조의 탕평정책은 큰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에 따라 영조는 새로운 활로를 모색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으며, 이러한 상황이 200여년 만에 대사례를 다시 실시토록 하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림1> 대사례의궤 표지와 표지뒷면(분상처)


「대사례의궤」는 1743년(영조 19) 윤 4월 7일 성균관에서 대사례를 행한 과정을 기록과 그림으로 정리한 책이다. 「대사례의궤」는 총 5건이 만들어졌다. 어람용 1책을 비롯하여 의정부, 사고(史庫), 예조, 그리고 대사례 실시 장소인 성균관에 1책이 보관되었다. 대사례가 성균관에서 열린 것은 국왕이 친히 성균관에서 행차하여 유생들을 격려하고 이들에게 심신의 수양을 쌓을 것을 권장하려는 취지에서였다. 조선시대에 성균관 유생들은 국가의 원기(元氣)로 인식되고 있었으며 그만큼 국가에서 거는 기대도 컸다.


성균관 유생들이 전부 국가로부터 장학금과 각종의 물품을 무상으로 지급받았던 것이나 국가의 주요 행사를 이곳에서 열었던 것은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에 대한 국가의 기대를 보여주고 있다. 대사례와 함께 왕세자 입학례와 같은 의식도 성균관에서 열렸는데 국왕이나 왕세자가 주인공이 되는 이러한 행사는 성균관 유생들에게 큰 자극이 되었을 것은 틀림이 없다.


영조는 1743년 윤4월 7일 원유관과 강사포 차림으로 창덕궁 영화당(暎花堂)에서 소여(小輿)를 타고 집춘문을 통해 궁궐을 나왔다. 당시 국왕을 경호하던 병력의 배치 및 담당 임무, 도로 사정 등도 기록되어 있어, 막강한 권력의 상징인 국왕 행차시의 경호 모습을 연상할 수 있다.



<그림 2> 「어사례도」


대사례의 구체적인 모습은 『대사례의궤』의 앞부분에 그려진 세 장면의 그림을 통하여 현장의 모습과 분위기를 접할 수 있다.세 장면의 그림은 왕이 활쏘는 모습을 그린 「어사례도(御射禮圖), 신하들이 활쏘는 모습을 그린 「시사례도(侍射禮圖)」, 성적에 따라 상벌을 내리는 과정을 그린 「시사관상벌도(侍射官賞罰圖)」로서 시간적 순서에 따라 행사의 모습이 각각 4면에 걸쳐 그려져 있다.


먼저 「어사례도」를 보면 악차(幄次)에는 세 개의 단을 설치한 것이 보인다. 제 1단은 국왕의 자리, 2단은 순 자주빛의 용문석(龍文席)을 깔아놓은 어사위(御射位), 3단은 종친 및 문무백관의 자리였다. 단의 동쪽에는 3개의 탁자가 놓였다. 제 1탁에는 국왕의 깍지와 팔찌를 담고, 제 2탁에는 어궁(御弓)을, 제 3탁에는 어시(御矢)를 담았는데, 탁과 함은 모두 붉은 색이었다. 동서 계단 아래에는 탁자 2개를 두었다. 동쪽 탁자에는 상으로 줄 표리(表裏)와 궁시를 놓았으며, 서쪽 탁자에는 벌로 줄 단술과 잔을 놓았다. 하연대에 바닥을 높여 사단(射壇)을 만들고 90보 떨어진 곳에 웅후(熊候:곰 머리)를 표적으로 하는 과녁을 세운 다음 후단을 쌓았다. 임시로 설치한 어좌 앞으로는 문무 관리들이 호위하고 있는 모습이 보이며, 악차는 차일과 휘장으로 사방을 막아 국왕을 엄호하였다.


「시사례도」는 시사자가 두 명씩 짝을 지어 활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어사례도」와의 차이점은 과녁이 푸른색의 미후(麋侯:사슴머리)로 바뀐 점이다. 핍 뒤에 서 있던 획자들은 화살이 꽂히면 해당하는 방위의 깃발을 들었는데, 중앙에 적중하면 적색, 상변에 맞히면 황색, 하변에 맞히면 흑색, 좌측에 맞히면 청색, 우측에 맞히면 백색의 깃발을 올렸다. 맞추지 못한 경우에는 채색의 깃발을 올렸다.


또한 동쪽 핍 앞에는 북을, 서쪽 핍 앞에는 금(金)을 두고, 화살이 적중하면 북을 치고 그렇지 못하면 금을 쳤다. 아래쪽에는 어사례 때와 마찬가지로 시사자들이 절을 할 때와 활을 쏠 때 필요한 음악을 연주하는 헌현(軒懸)들이 위치해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림3> 「시사관상벌도」


「시사관상벌도」는 시사를 마친 후 시상하고 벌주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병조정랑이 관직과 성명을 부르면 해당자는 국왕 앞으로 나아갔다. 이때 상물(賞物) 중 표리(表裏)는 군기시(軍器寺)에서, 궁시(弓矢)는 제용감에서 각각 준비하였으며, 벌주는 내자시(內資寺)에서 준비하였다. 화살을 적중시킨 사람은 표리와 궁시를 상으로 받았으며, 맞히지 못한 사람은 벌주를 마셨다. 담당관원이 동쪽 계단에 이르러 국왕께 맞춘자의 관직과 성명을 크게 아뢰는데, 맞춘자들은 동쪽 계단 아래에서 서쪽을 향해 서고, 맞추지 못한 자들은 서쪽 계단에서 동쪽을 향하여 섰다. 풍악이 울리면 국왕께 사배한 후 시상을 받았다. 네발을 맞히면 표리(表裏)와 탑견(搭肩)을, 세발은 리(裏)와 탑견, 두발은 궁시와 진요(搢腰), 한발은 궁과 진요를 상으로 받았다. 한편 맞추지 못한 자는 벌주를 마셨다. 예관이 해(解)로 술을 떠서 굽혀 풍(豊)에 두면, 맞추지 못한 자가 풍에 나아가 북향하여 꿇고, 왼손으로는 부린 활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해를 잡고 서서 마셨다. 비록 맞추지 못했더라도 술을 마시는 작은 벌칙만 둠으로써 행사 자체를 축제의 분위기로 이끌어나가려는 배려가 엿보인다.


영조는 대사례가 끝난 후 병조판서와 동부승지에게 특별히 명하여 성균관에 물력옥자(物力屋子) 3칸을 만들어 행사에 사용된 제 용구들을 보관하게 하였으며, 예문관 대제학으로 하여금 대사례의 시행과정을 적은 「대사례기」를 찬진하여 성균관 명륜당에 걸어두도록 하였다. 행사의 의미를 재확인하고 행사 기록이 영구히 보존되기를 바랐다. 영조의 이러한 바람은 결국 「대사례의궤」의 편찬으로 이어졌다.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