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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궤를 통해 본 왕실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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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의 황제 즉위식을 기록한 『고종대례의궤』

 

 

 

 

 

 

조선 국왕의 즉위식

 

고종의 황제 즉위식과 환구단

 

황제의 상징물




김문식 (단국대 사학과 교수)

 

 

조선시대의 국왕 즉위식이라 하면, 우리는 우선 사극에서 보았던 성대한 행사를 떠올리게 된다. 품계석이 늘어선 궁궐 정전(正殿)의 뜰에 국왕의 의장기가 휘날리고 문반과 무반의 관리들이 좌우로 도열한 가운데 국왕 부부를 태운 가마가 도착한다. 국왕 부부가 가마에서 내려 어좌로 이동하면 장중한 음악이 연주되고 도열한 신하들이 바닥에 엎드려 절을 올리는 그런 장면들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조선시대에 이런 즉위식이 거행된 것은 몇 차례에 불과하다. 무엇보다도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제대로 된 즉위식을 치르지 못했다. 고려의 마지막 국왕인 공양왕이 이성계 세력의 압력에 의해 왕위에서 물러나자, 공양왕의 국새가 대비의 손을 거쳐 이성계에게 전달되었다. 그 이튿날 이성계는 개성의 수창궁으로 나와 신하들의 절을 받는 것으로 즉위식을 치렀는데, 어좌에 앉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상태였다. 태조가 어좌에 앉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한 달 가까이나 지나서였다. 태조는 신하들의 추대에 의해 국왕이 되었지만 자신은 이를 사양하는 모습을 연출한 셈이다.


조선의 국왕들은 대부분 선대 국왕이 사망한 뒤에 국왕에 즉위했다. 따라서 성대한 즉위식을 거행하기는 어려웠고, 전 국왕의 죽음을 애도하는 분위기가 압도하는 가운데 정중하면서도 간략한 즉위식을 거행했을 뿐이다. 국왕의 즉위식은 국상의 절차가 진행되는 가운데 선왕의 시신이 안치된 빈전의 대문에서 거행되었고, 상주인 국왕은 즉위식이 거행되는 동안 잠시 국왕의 예복을 입었다가 이내 상복으로 갈아입었다.


즉위식을 제대로 치른 최초의 국왕은 세종이었다. 왕위에서 물러나겠다고 선언한 태종은 새 국왕에게 직접 익선관을 씌워주었으며, 셋째 아들인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다는 교서를 반포했다. 세종의 즉위식은 경복궁 근정전에서 거행되었다. 이 때 세종은 국왕의 관복인 원유관과 강사포를 갖추어 입고 어좌에 앉았으며, 영의정을 대표로 하는 신하들이 국왕의 즉위를 축하하는 글을 올렸다. 이어서 세종은 즉위 교서를 반포했고 전국의 죄수들을 풀어주라는 사면령을 내렸다.

 

 

 

세종 다음으로 즉위식을 제대로 치른 사람은 고종이었다. 고종은 조선의 국왕으로 있다가 대한제국의 황제가 되었는데, 그의 즉위식은 특별히 ‘등극의(登極儀)’라고 부른다. 등극의란 ‘황제의 지위에 오르는 행사’라는 뜻이다. 『고종대례의궤(高宗大禮儀軌)』는 고종의 황제 등극의를 기록한 의궤인데, 1897년 10월에 거행된 황제 즉위식 장면을 낱낱이 기록하고 있다.

 


<그림1> 『고종대례의궤』 표지

 

고종의 황제 즉위식에서 제일 먼저 주목되는 것은 즉위식을 거행한 장소이다. 고종의 즉위식은 환구단(圜丘壇)에서 거행되었는데, 이곳은 하늘의 신을 모신 제단인 천단(天壇)이었다. 중국 베이징을 방문하면 자금성(고궁박물관)의 남쪽과 북쪽에 있는 천단과 지단을 볼 수 있는데, 오직 황제만이 하늘과 땅의 신에게 제사를 지낼 수 있었기 때문에 이런 제단이 있는 것이다. 고종은 대한제국을 세울 것을 결심하면서 바로 환구단을 건설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황제만이 제사를 지내는 이곳에서 즉위식을 치르기 위해서였다. 독립협회가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허물고 독립문을 세웠듯이, 고종이 건설한 환구단은 대한제국이 중국과 분리된 완전한 독립국임을 보여주는 상징적 의미가 있었다.


환구단의 위치는 오늘날 조선호텔이 서있는 자리와 정확하게 일치하는데, 일제의 식민지 통치가 시작되면서 대한제국의 상징인 환구단을 헐어버리고 철도호텔을 세웠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이 천황과 관련된 유적들을 오늘날까지 잘 보존한 것을 보면 환구단을 헐어버린 그들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현재 조선호텔 옆에는 팔각형의 황궁우(皇穹宇) 건물이 남아 있는데, 이는 환구단에서 제사를 지내는 신주들을 보관했던 곳이다. 본 건물은 사라지고 부속 건물만 남은 셈이다.


고종은 환구단에서 천지의 신에게 대한제국의 탄생을 알리는 제사를 지낸 다음 황제 즉위식을 거행했다. 이 때 제단에는 황제용 황금 의자가 놓였고, 고종은 의자에 앉아 아홉 가지 문양이 수놓인 구장복(九章服) 위에다 열두 가지 문양이 수놓인 십이장복(十二章服)을 입었다. 구장복은 국왕용, 십이장복은 황제용 예복이었다. 『고종대례의궤』를 보면 고종이 십이장복을 입는 순간에 칭호가 폐하에서 황제로 바뀌는데, 바로 그 순간 고종이 황제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림2> 『고종대례의궤』의 대한국새와 황제지새(좌), 황태자보(우) 그림

 

대한제국이 건설되면서 황제를 위한 상징물들도 추가로 제작되었다. 새 국호를 새긴 대한국새(大韓國璽)가 만들어졌고, 황제를 상징하거나 황제의 명령서에 찍힐 도장들이 새로 제작되었다. 왕비는 황후, 왕세자와 세자빈은 황태자와 황태자비로 신분이 격상되면서 이들을 위한 도장도 별도로 제작되었다. 『고종대례의궤』에는 새로 제작된 도장들의 모양과 이들을 궁궐이나 환구단으로 옮길 때의 행렬 그림이 나온다.


황제 즉위식이 거행되던 날, 고종은 황제를 상징하는 태극기를 행렬의 앞에 세워 새로 탄생하는 대한제국을 형상화했다. 이에 화답하여 서울의 시민들은 집집마다 태극기를 내걸어 국가에 대한 애국심을 표현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태극기는 대한제국 때부터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대한의 국기이다.

 


<그림3> 『고종대례의궤』 반차도 중 황제보를 실은 요여(腰轝)의 모습

 

고종이 대한제국을 건설한 것은 일본과 서양 제국의 압박으로 국가의 존립마저 위태로워진 상황에서 국가의 독립을 유지하고 부흥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이에 따라 고종의 황제 즉위식에는 대한제국의 독립성과 황제의 권위를 부각시키는 의례와 상징물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고종대례의궤』에는 이에 관한 기록이 자세하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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