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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원래 성인의 도읍이로다

 - 이규보, 「동명왕편(東明王篇)」 -

 

 


 동명왕편이 실려 있는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奎4938-v.1-13)

 

 

 평소 존경하는 고대사 전공 선배가 하루는 이런 말을 했다. 본인은 이규보가 싫다고. “왜요라고 물으니 그 답이 걸작이었다.

 “기왕에 쓰실 거면 온조왕편이나 혁거세편도 써주실 것이지 말이야. 동명왕편만 써가지고.”

 와하하하 웃고 말았지만,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뼈가 있었다. 한국 고대사는 연구에 활용할 수 있는 사료가 그리 많지 않다. 그런 상황에서 동명왕편(東明王篇)은 지금 전해지지 않는 역사서 구삼국사(舊三國史)의 내용을 일부나마 우리에게 알려준다.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 인물들의 고대사 인식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이러니 고구려사와 고려사를 연구하는 이들에게 동명왕편은 귀중한 자료가 아니겠는가. 반대로 백제사와 신라사 전공자들은 저런 자료가 왜 없을까 한스럽지 않겠는가. 전공을 떠나서, 중학교나 고등학교 역사 시간에 이규보=동명왕편=고구려 계승의식이렇게 밑줄 쫙 그었던 기억은 거의 누구나 갖고 있을 것이다. 그만큼 동명왕편은 중요한 글이다.

 그러면 그렇듯 애증의 대상이 될 정도인 동명왕편은 과연 어떤 글일까그리고 이규보(李奎報, 1168-1241)는 왜 그 글을 지었는가

 

 

 

 

 

피 끓는 젊은이, 고구려의 시작을 노래하다

 

 


사진 : 『동국이상국집』권3, 고율시의 동명왕편 서문

(奎 4938. 1책 062a-062b면)

 

 

세상에서 동명왕(東明王)의 신통하고 이상한 일을 많이 말한다.

비록 어리석은 남녀들까지도 흔히 그 일을 말한다

내가 일찍이 그 얘기를 듣고 웃으며 말하기를,

 선사(先師) 중니(仲尼, 공자)께서는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말씀하지 않으셨소.

동명왕의 일은 실로 황당하고 기괴해 우리들이 얘기할 게 아니오이다.”라 하였다.

(중략)… 

지난 계축년(1193) 4월에 구삼국사를 얻어 동명왕본기(東明王本紀)를 보니

그 신이(神異)한 사적이 세상에서 얘기하는 것보다 더했다.

그러니 처음엔 믿지 못하고 ()나 환()으로만 생각하였는데,

세 번 거듭거듭 읽어서 점점 그 근원에 들어가니환이 아니라 성()이요, 귀가 아니라 신()이었다.

하물며 국사(國史)는 사실 그대로 쓴 글이니 어찌 허탄한 것을 전하였으랴.

 

 

 

 세상은 어지러웠다.

 20여 년 전 정중부(鄭仲夫, 1106-1179), 이의방(李義方, -1174) 등이 새 임금을 옹립한 이래, 고려의 뜻있는 선비들은 승려가 되어 떠돌거나 하늘을 원망하며 술 마시고 시나 짓는 처지가 되었다. 설령 과거에 급제해도 고관들에게 자신을 어필하지 않으면, 제대로 관직을 얻기 어려운 일이었다. 무신정변이 일어나고 한 세대 가량이 지났어도, 집권자들이 차례차례 바뀌면서도 세상은 더 뒤집어지지 않았다.

 그런 시절, 개경 바닥에는 유명한 인물이 있었다. 글 잘 짓고 술 잘 마시기로 유명한 이, 3년 전 과거의 최종 단계인 예부시(禮部試)에 합격하고도 관직을 얻지 못해 빌빌거리는 백수, 이규보였다.

 “아니 자네 저기 천마산(天摩山)에 들어갔다더니 언제 나왔는가

 어쩌다가 알아보는 사람이 있으면 그에게 이렇게 묻는다. 이규보는 시 좀 짓다 나왔지요.”하고 쓴웃음을 지어 보인다. 그리고 허우적거리며 노을이 지는 개경의 거리를 걸어 다녔다. 어느새 저녁이 되자, 이규보는 사립문을 열어젖히고 앵계방(鶯溪坊) 자기 집에 돌아왔다. 그에겐 얼마 전부터 하나의 소일거리가 생겼다. 책표지가 다 낡아 떨어질 정도로 오래 묵은 구삼국사를 읽고, 그 감상을 서사시(敍事詩)로 남기는 일이었다. 오늘은 그 마지막, 시의 서문을 짓는 날이었다.

 “허허. 처음 읽을 때만 하더라도 이럴 줄은 몰랐거늘.”

 그의 붓은 춤을 춘다. 뒷날 주필(走筆) 이당백(李唐白)이라는 칭송을 받을 정도로 빠른 창작에 능했던 이규보, 그는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의 일대기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붓에 녹여내 새로운 글로 만들고 있었다.

 

 

김부식(金富軾, 1075-1151) 공이 국사를 다시 지으실 때에 자못 그 일을 생략하였으니

공께선 국사란 세상을 바로잡는 글이니 크게 이상한 일은 후세에 보일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생략한 것이 아닐까

 

 

 이규보의 피는 뜨거웠다. 천하의 중심이라는 중원은 금()과 남송(南宋)으로 나뉜 지 오래요, 그의 나라 해동고려국(海東高麗國)의 정세도 평안치 못했다. 그런 난세에서 고려는 어떤 길을 고르고, 자신의 앞길은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세상에 절망하던 이규보는 어느 순간 역사 속에서 한 영웅을 만났다. 고려는 고구려의 후신, 그 고구려의 사적(事蹟)이 아직 남아 있었다. 글 모르는 백성들도 먼 옛적 그의 이야기 한두 줄은 능히 꿰고 있는 동명왕, 그의 나라 고구려의 땅이 바로 여기였다.

 당나라 현종(玄宗)이 양귀비(楊貴妃, 719-756)와 노닐면서 하늘나라 구경을 했다는 허망한 전설도 백거이(白居易, 772-846)가 시로 기렸는데, 우리나라 영웅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시로 남기지 못한다면 뒷사람들이 장차 어떻게 볼 것인가이규보의 붓이 종이의 끝을 향해 달려간다.

 

그러므로 시를 지어 기록하여,

우리나라가 본래 성인(聖人)의 도읍임을 천하에 알리려 하는 것이다

[欲使夫天下知我國本聖人之都耳].

 

 

 마지막 글자 이()를 쓰고 붓을 턱! 내려놓은 이규보의 턱에는 어느새 땀방울이 맺혀 있다. 고려 명종 23(1193), 이때 그의 나이 스물여섯 살이었다.

 

 

 

 

 

시대가 영웅을 만드는가, 영웅이 시대를 만드는가

 

 

 「동명왕편은 서문과 오언(五言) 282()의 시로 이루어져 있다. 서문은 앞서 보았듯이 이 시를 짓게 된 동기를 풀어놓았고, 시는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解慕漱)와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가 낳은 아들 주몽(朱蒙)이 고구려를 건국하는 과정을 풀어 읊었다. 이 시의 주석에 구삼국사동명왕본기가 인용되어 있다.

 

 


사진 : 『동국이상국집』권3, 고율시의 동명왕편 中.

(奎 4938. 1책 063a-063b면)

 

해동의 해모수시여 / 海東解慕漱

참으로 하늘의 아들 / 眞是天之子

 

본기(本記)에 이렇게 적혀 있다

부여왕(夫餘王) 해부루(解負婁)가 늙도록 아들이 없어 산천(山川)에 제사하여 아들 낳기를 빌러 가는데,

탄 말이 곤연(鯤淵)에 이르자 큰 돌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왕이 괴이하게 여기어 사람을 시켜 그 돌을 굴리니 금빛 나는 개구리 형상의 작은 아이가 있었다.

왕이, “이것은 하늘이 내게 아들을 준 것이다.”라 하며길러서 금와(金蛙)라 하고 태자(太子)로 삼았다.

그 재상 아란불(阿蘭弗), 왕에게 권하여 도읍을 옮기고 동부여(東夫餘)라 이름 지었다.

예전 도읍터에는 해모수가 천제의 아들이 되어 와서 도읍하였다.”

 

 

 주몽은 태어날 때부터 범상치 않았다. 아버지는 무책임하게 하늘로 올라가버리고, 어머니는 친정에서 쫓겨나 겨우 동부여 금와왕에게 의탁해 살았다. 때가 되어 몸을 푸니, “왼쪽 겨드랑이로 알 하나를 낳았는데 크기가 닷 되[]만하였다.” 사람이 알을 낳았으니 괴상하다고 해서 내다버렸더니만 짐승들은 지켜주고 어디선가 햇빛이 알을 비추어주었다. 그 알에서 바로 주몽이 나왔다. 여느 영웅들처럼 주몽은 뼈대와 생김새가 남달랐고 재주가 뛰어났는데, 어려서 활을 쏘아 파리를 맞출 정도로 특히 활솜씨가 천하일품이었다. 동부여의 왕자들이 이를 시기하여 주몽을 따돌렸고, 금와왕도 그를 경계하여 마굿간지기로 삼았다. 주몽이 속을 끓이자 유화가 직접 마굿간에 가서는 말들을 향해 채찍을 휘두르니, 두 길이나 되는 높이를 뛰어오르는 말이 있는 게 아닌가. 주몽이 꾀를 내어 그 말을 자기 것으로 삼고 잘 먹여 길렀다. 동부여의 태자가 주몽을 죽이려 하자 그는 친구들과 함께 말을 타고 도망가는데, 중간에 강이 나오자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니 물고기와 자라가 강 위로 솟아올라 다리가 되어 주었다.

 강을 건너 남쪽으로 내려온 주몽은 나라를 세운다. 그리고 이미 그곳에 있던 비류국(沸流國) 송양왕(宋讓王)을 만난다.

 

 

왕이 과인은 천제의 손자요 서국(西國)의 왕이오감히 묻노니 군왕은 누구의 후손이신가라 하니,

송양이, “나는 선인(仙人)의 후손인데 여러 대 왕 노릇을 하였소.

지금 땅이 대단히 작으니 … 나의 부용국(附庸國)이 되는 것이 좋을 게요.”라 하였다.

왕이, “과인은 천제의 뒤를 이었지마는 지금 왕은 신()의 자손도 아니면서 지로 왕이라 일컬으니

만일 내게 복종하지 않으면 하늘이 반드시 죽일 것이오.”라고 하였다.

 

 

 활쏘기를 겨루고, 비류국의 물건을 훔쳐와 자기 걸로 꾸미고, 궁궐을 썩은 나무로 지었으며, 사슴을 장대에 매달아 홍수를 일으키는 등 온갖 계교를 부린 끝에 주몽은 송양의 항복을 받아낸다. 그러니 하늘이 주몽을 위해 궁궐을 지어주었다. 이것이 고구려의 건국이며, 주몽이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성왕이 된다. 그리고 왕위에 오른 지 19년 만에 하늘에 오르고 내려오지 않았다.” 왕위는 그의 아들 유리(類利)가 이었다.

 신비한 탄생, 빼어난 자질, 주변의 위기, 탈출과 재기, 위대한 건국과 신화적 죽음영웅 서사시의 전형적인 구조다. 시대가 낳았던 영웅이 자신의 시대를 만들어낸 이야기의 끝에 이규보는 자신의 감상을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신이하고 또 신이하도다 / 神哉又神哉

만세에 아름다운 일이여 / 萬世之所韙

생각건대 창업하는 임금이 / 因思草創君

성스럽지 않다면 어찌 이루리 / 非聖卽何以

(중략)

자고로 제왕이 일어남에 / 自古帝王興

징조와 상서가 매우 많으나 / 徵瑞紛蔚蔚

후예들은 많이들 게으르고 거칠어 / 末嗣多怠荒

모두 선왕의 제사를 끊어버렸다 / 共絶先王祀

이제야 알겠도다 수성하는 임금은 / 乃知守成君

고난을 겪고 작은 일을 삼가도록 경계해 / 集蓼戒小毖

너그러움과 어짊으로 왕위를 지키고 / 守位以寬仁

예절과 의로움으로 백성을 교화하여 / 化民由禮義

길이길이 자손에게 전하여 / 永永傳子孫

오래도록 나라를 다스려야 할지니 / 御國多年紀

 

 

 

 

 

동명왕편(東明王篇), 영원히 남다.

 

 

 여러분은 스물여섯 살을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대학 졸업반이거나 갓 사회생활을 시작할 나이, 아직 어린 친구들이야 형이나 누나 또래라고 여길 수 있겠고, 연세가 드신 분들께서는 스물여섯참 좋을 때다~!”라며 부러워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한창 가슴이 뜨거울 때라는 데는 다들 동의하리라 믿는다.

 800여 년 전, 개경에 살았던 그 스물여섯 살 젊은이가 글을 하나 남겼다. 그 젊은이가 나이 들고 벼슬길에 오르고 1품의 높은 관직에 앉았으면서도, 그 글은 버려지지 않고 그의 문집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3에 실릴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남아 전한다. 스물여섯 살은 이런 대단한 작품을 지을 가능성을 품고 있는 나이였고, 나이이다.

 물론 동명왕편이 이규보의 작품세계를 대표하는 글은 아니다. 그저 젊은 시절 이규보의 패기가 낳은 글일 뿐이라고 해도 틀리진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명왕편의 가치를 폄하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동명왕편은 지금 사라진 구삼국사의 내용을 유추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그 하나만으로도 지금까지 한국 고대사와 중세사의 연구 자료가 되고 있고, 아마 앞으로도 길이길이 연구자들을 돕고 때로 괴롭히는 대상으로 남을 것이다.

 

 


 

<이규보 영정> - 출처 : 『전통문화포털』 <선현의 표준영정>

 

 

 

 

 

 

참고문헌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김용선, 생활인 이규보, 일조각, 2013

박종기, 새로 쓴 5백년 고려사, 푸른역사, 2008

황순구, 敍事詩東明王篇硏究, 백산출판사,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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