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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재난고

- 고려 말 유학자 이제현의 삶과 문학

 

 


사진 : 益齋亂藁(가람819.4-Y58i-v.1-4)

 

 

익재난고1, 고국(故國)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다 <思歸>

 

배를 타고 떠다니니 마음 걷잡을 수 없는데 / 扁舟漂泊若爲情

사해가 모두 형제라고 누가 일렀나 / 四海誰云盡弟兄

기러기 소리 들리게 되면 먼 데 소식 고대하고 / 一聽征鴻思遠信

돌아가는 새 볼 때마다 괴로운 인생 탄식이 나네 / 每看歸鳥嘆勞生

쓸쓸한 가을비 청신의 숲에 자우룩하고 / 窮秋雨鎖靑神樹

해질 무렵 흰 구름 백제성에 가로질렀네 / 落日雲橫白帝城

순채국이 양락보다 나음 지금 바로 알겠으니 / 認得蓴羹勝羊酪

나의 행장 군평에게 물을 필요 없네 / 行藏不用問君平

 

 

익재난고6 () 대도에서 중서 도당에 올린 글 <在大都 上中書都堂書>

 

기미년(1259, 고종 46)에 세조황제(世祖皇帝)께서 강남(江南)에서 회군할 때, 우리 충경왕(忠敬王 원종(元宗))이 천명의 돌아감과 인심의 복종함을 알고는 6천여 리를 발섭(跋涉)하여 변량(汴梁 개봉(開封)) 지방까지 가서 영접하였고, 본국에서 조어산(釣魚山)까지 와 거기서 변량까지 돌아가는 거리는 대개 6천여 리이다. 충렬왕(忠烈王)께서는 또한 몸소 조근(朝覲)을 하여 한 번도 태만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공주(公主)를 하가(下嫁)하여 대대로 부마(駙馬)를 삼았으며, 구속(舊俗)을 고치지 않고 종사(宗社)를 그대로 보존해 왔으니, 곧 세조황제의 조지(詔旨)에 힘입은 것입니다.

천하의 각 지방에 행성(行省)을 둘 때에도 유독 우리 소방에만은 두지 않았으며, 뒤에 일본(日本)을 정벌하는 일 때문에 비록 명액(名額 명목과 인원수)은 두었지만, 항시 선용(選用)하지는 않았습니다. 대덕(大德 원 성종(元 成宗)의 연호) 무렵에 활리길사(闊里吉思)를 이목관(耳目官)으로 삼았는데, 그의 진언(陳言)에 따라 도성(都省)에서 의논하여 상주(上奏)하기를 본국(本國)은 일찍이 세조황조의 성지(聖旨)를 받아, 옛 본속(本俗)을 고치지 않고 단지 관명(官名)만 바꾸었는데, 이제 전부 고침은 마땅치 않습니다.’ 하니, 성종황제(成宗皇帝)께서는 아뢰는 말대로 재가하여, 곧 활리길사를 돌아오도록 하였으며, 인종황제(仁宗皇帝)께서는 서아년(鼠兒年) 4월에 성지 내리기를, “고려의 땅에 성() 두는 것을 분별하지 않은 것이 누구인가? 문제삼지 말라. 주자(奏者)는 이를 명심하라.” 하였으니, 열성(列聖)들께서 돌봐주신 깊은 뜻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 듣건대, 조정에서 소방(小邦)에 행성을 두어 제로(諸路)와 같게 한다고 하는데, 만약 사실이라면, 세조황제의 조지(詔旨)와 열성들의 돌보시던 뜻에 어떻게 되겠습니까 

삼가 지난해 11월에 새로 내리신 조서의 조목을 읽어 보건대, ‘사정(邪正)이 길을 달리하며 사해(四海)가 편안히 다스려지도록 하여, 중통(中統)ㆍ지원(至元 원 세조(元 世祖)의 연호) 시절의 훌륭한 정치를 회복하게 하라.’ 하였으니, 성상(聖上)께서 이런 덕음(德音)을 발표하셨음은 실로 천하와 사해의 복입니다. 더구나 소방은 여러 대의 공로가 저와 같고, 열성들의 돌봐주신 은혜가 이와 같은데, 이번에 4백여 년이나 된 왕업(王業)을 일조에 없애어 끊어버린다면, 조정에 한 치의 공로도 없는 다른 나라들을 조정에서 장차 어떻게 처리할 것이며, 또한 중통·지원의 체통에 어떻게 되겠습니까 

己未年, 世祖皇帝班師江南, 忠敬王知天命之有歸, 人心之攸服, 跋涉六千餘里, 迎拜于汴梁之地, 自本國至釣魚山, 又回至汴梁, 蓋六千餘里, 忠烈王亦躬修朝覲, 未嘗少懈, 故得釐降公主, 世爲附馬, 而不更舊俗, 以保其宗社, 繄世祖皇帝詔旨是賴, 當其立天下各處行省, 獨於小邦不置, 後因東征日本, 雖有名額, 不拘常選, 大德中, 敎闊里吉思爲耳目官, 因其陳言, 都省商量上奏, 本國曾蒙世祖皇帝聖旨, 休改舊本俗, 但換官名, 今全都改換不宜也者, 成宗皇帝可其奏, 卽令闊里吉思回來, 仁宗皇帝於鼠兒年四月, 降聖旨, 高麗田地立省的, 不揀是誰, 休題奏者, 欽此, 可見列聖存恤之深意, 今聞朝廷欲於小邦, 立行省比諸路, 若其果然, 其如世祖皇帝詔旨何, 其如列聖存恤之意何, 伏讀年前十一月新降詔條, 使邪正異途, 海宇乂康, 以復中統至元之理.

 

 

 

 

익재난고와 그 저자 이제현

 

 

 


사진 : 익재난고1003a~003b

 

 

익재난고14세기 대표적인 유학자인 이제현의 시문집이다. 이제현은 고려 충렬왕(忠烈王) 13(1287)에 검교정승(檢校政丞)을 역임한 이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5세에 성균시(成均試)에 수석으로 합격하고 연이어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과거시험의 좌주(座主)이자, 장인이자, 그의 가장 큰 후견인이었던 권보와 인연을 맺기도 했고, 20세 경에는 원에서 귀국한 백이정을 스승으로 모셔 성리학을 학습하기도 하였다.

이제현은 초기 성리학 도입자들과 밀접한 인연을 맺어, 고려의 다른 학자보다 먼저 원나라의 성리학에 접촉할 수 있었다. 이제현의 아버지 이진부터 안향의 천거를 받았던 관계였고, 장인이자 좌주인 권보 또한 안향의 제자였으며, 이제현 자신 또한 권보와 백이정에게 학문을 익혔는데, 백이정 역시 안향의 제자였을 뿐 아니라, 원에 가서 직접 주희가 쓴 가례등의 책을 수입해 들어온 인물이기도 했다. 이제현은 안향과 백이정으로 이어진 고려의 초기 성리학파 형성의 핵심에 있던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제현의 청장년기는 원나라에서 보낸 충선왕과의 여정으로 요약된다. 충선왕 원년(1314) 원나라 수도인 대도(大都)로 간 이제현은, 충선왕이 마련한 서재인 만권당(萬卷堂)에서 조맹부요수염복 등 중국의 유학자들과 교류하는 나날을 보냈다. 이제현은 원에서 지내는 동안 사천성 아미산, 절강성 보타산 등 중국의 다양한 지역을 여행하며 견문을 쌓기도 했다.

그러한 이제현의 삶은 충선왕이 1320년 세력을 잃고 토번으로 유배를 떠난 이후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제현은 원 대도에 남아 충선왕의 저택을 지키며, 고려 왕조를 없애자는 원() 내부의 여론을 설득하고, 나아가 충선왕을 구명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충선왕이 죽고 충숙충혜왕 간의 정치적 갈등을 거치며 충목왕이 즉위할 때까지 이제현은 정치적 방황기를 겪게 되었다.

이제현이 다시 정치의 중심에 본격적으로 설수 있었던 것은 충목왕 즉위 이후 판삼사사(判三司事)된 이후부터이다. 이제현은 58세의 원로 재상으로서 개혁의 방향을 제시하고자 했다. 이제현의 주도로 민생회복학술 진흥을 중심으로 한 개혁을 추진하자, 이제현의 문생들이었던 최문도안축이곡 등 성리학자들 또한 본격적으로 정치에 진출하였다. 이 시기부터 성리학에서 중시한 경전인 사서(四書)가 시험과목으로 채택된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이제현은 충목왕 사망 후 충정왕이 즉위하면서 정치적으로 실각했다가, 공민왕 즉위 후 정치 복귀를 시도하였으나, 신돈이 권력을 주도함에 따라 또다시 정치의 중심에서 밀려나게 되었고, 신돈의 집권기였던 공민왕 16(1367)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익재난고의 수록 문헌들과 주요 분류

 

익재난고는 생전에 아들 이창로와 장손 이보림이 수집편차하고 이색의 서문(序文)을 받아 1363년에 처음 간행하였으나 이 초간본은 전하지 않는다. 그 후 1432년 세종의 명에 의하여 역옹패설과 함께 강원도 원주에서 간행되었다. 그 후로 1600년에 후손인 경주부윤 이시발이 경주에서 다시 중간(重刊)한 뒤, 여러 차례 간행되어 현재까지 전해져 내려왔다. 1693년에는 임상원(1638~1697)이 서문을 붙여 또다시 익재난고를 간행하였는데, 현재 규장각 소장본 가운데 정확한 연대를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이른 시기의 판본은 이 1693년에 간행된 것이다(一簑古819.4-Y58ij-v.1-4).

익재난고104책으로 되어 있다. 1~4에는 시가 실려있다. 칠언시(七言詩) 186가 시체(詩體)와 관계없이 수록되어 있다. 이 중 권4에 수록된 소악부11수는 고려 시대의 속요(俗謠)를 칠언절구의 한시(漢詩)로 번역한 작품이다. 5~6에 서()()()가 실려있고, 7에 비명(碑銘)이 실려있는데 방신우최성지나익희권부김륜이조년최문도김순 등의 묘지명을 비롯하여 15편의 비명(碑銘)이 실려있다. 8에는 15편의 표전문(表牋文)이 실려있으며, 9는 상하로 나뉘어 상에는 고종의 세가(世家), 하에는 사찬(史贊)서책(書策)논송(論頌)이 실려있는데, 글의 형식별로 구분한다면 사찬은 15, 사전서 2, 책문 4, () 2, () 1, () 5, () 6편과 잠() 1편이 실려있다. 10에는 장단구(長短句)가 실려있다. 10에 실려있는 장단구는 24편으로서,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시도된 사()형식의 작품으로 주목된다. 이제현은 중국에서 사()로 유명했던 조맹부장양호 등과 교류했는데, 그 영향을 받아 사() 집필을 시도할 수 있게 된 것으로 파악된다. 10 이후의 말미에는 습유(拾遺)’라는 이름으로 이색이 지은 이제현의 묘지명을 비롯한 작품들이 수록되었다.

 

 

 

 

고려 말을 대표하는 유학자 이제현과 익재난고

 

 


사진 : 익재난고2007a-007b

 

 

이제현은 고려 후기 원 간섭기를 대표하는 유학자로서, 원과의 외교적 사안부터 국내의 정치개혁에 이르는 국가적 현안에 참여하였던 인물이었다. 이제현은 고려가 원에 복속되었던 충렬왕대에 태어나, 공민왕대 반원개혁기에 사망한 인물이었던 만큼, 그의 정치적학문적 생애는 원과의 관계 그 자체와 불가분한 것이었다.

이제현은 원이 천자국이자 문명국가가 된 사실을 인정하고 유교 문명사회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이제현은 충숙왕대에 고려 왕조를 원의 일부로 삼는 오잠유청신의 입성책동(立省策動)에 반대하였다. 이제현은 400년이 넘는 고려의 오랜 역사를 강조하고 원 제국에 신복하여 공물을 바친 지 100여년이 되었다고 하였다. 나아가 고려의 옛 풍속을 고치지 않고 종묘사직을 보존하겠다는 세조구제의 원칙을 재확인하며 고려의 독자성을 주장하였다. 한편에서 이제현은 원에서 고려인과 색목인을 동일하게 취급해달라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고려는 몽골과 연합하여 거란군을 물리치고 형제맹약을 맺었으며, 태자 전(원종)이 세조 쿠빌라이를 도왔고, 원과 왕실 혼인이 설립되었으니, 고려인은 원 제국 내에서 색목인으로 대접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제현은 국내 정치상으로도 원의 유교 문명을 받아들이고자 했다. 이제현은 충선왕에게, 무신집권 이후 무너진 문치를 회복하기 위하여 학교를 넓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나아가 충목왕에게는 경전을 학습해 성인이 되는 학문을 익혀 마음을 갈고 닦아 행동거지를 바르게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이제현은 고려의 종묘제 정비를 통해 고려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종법적 질서를 확립하게끔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이제현은 국왕의 유교적 자질과 종묘제도 정비를 통한 정통성 강화를 통해 왕위 계승의 정당성과 객관성을 확보하고 왕권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평가된다.

이제현은 단순히 왕실만이 아니라 고려의 정치 전반을 성리학자 관료들에 의해 이끌어가고자 했다. 이제현이 추구한 새로운 관료의 모습은, 문장 다듬기에만 매달리지 않은, 경학에 밝고 인륜 도덕을 추구하는 유학자였다. 당시 고려의 사회는 일반 백성이 유망(流亡)하는 현상이 광범위하게 나타난, 사회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시기였다. 이제현은 이러한 불안한 시기를 유교 이념에 철저한 신진 관료들이 등용되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제현은 수령이 적합한 인물로 채워지지 못하고 또 그러한 수령들이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탓에 백성이 유망한다고 생각하였고, 이러한 수령에도 유교적 지식에 철저한 군자가 임명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제현은 유학을 정치이념으로 받아들여 요순시대 성인의 정치처럼 도덕적 감화를 통하여 세상이 안정되고 교화가 실현되기를 바랐다. 세계 제국 원의 성립을 통하여 천하가 통일되고 유교 문화가 보편화되는 것이 고려에까지 미치기를 희망하였다, 익재난고를 통해 나타난 이제현의 이러한 모습들은, 이제현이 이와 같이 철저히 국제화된 유학자이자, ‘고려 관료였던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참고문헌

 

保晚齋叢書

左蘇山人集

홍한주 지음, 김윤조ㆍ진재교 옮김, 2013, 19세기 견문지식의 축적과 지식의 탄생() 지수염필, 소명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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