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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3년 고려 리포트

-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驪圖經)』 -

 

 

사진 : 선화봉사고려도경』 (奎中2190-v.1-4)

 

 

 1801, 조선의 영재(泠齋) 유득공(柳得恭, 1749-)과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 1750-1805)가 베이징에 온다. 이 연행(燕行)에서 둘은 대학자 기윤(紀昀, 1724-1805)과 오랜만에 회포를 푸는 한편, 많은 청나라 지식인을 유리창(琉璃廠)에서 새로 만나 친교를 맺었다.

 그들이 만난 사람 중에 진전(陳鱣, 1753-1817)이란 장서가(藏書家)가 있었다. 책이라면 유득공이나 박제가도 환장하는 사람이었으니 이들은 잘 통했고, 박제가가 진전에게 자기 문집 정유고략(貞蕤藁略)서문을 청할 만큼 가까워졌다. 그런데 이들이 대화하던 중, 어떤 책의 이름이 나왔다. 진전이 이 책의 고려본(高麗本)이 있다던데 하고 묻자, 박제가는 붓을 들어 이렇게 대답했다.

 

 

판각한 본이 매우 많지만, 아쉽게도 행낭에 넣어오지는 못하였소이다!”

 

 

 박제가가 이렇게 자랑했던 책, 청나라의 장서가들이 그 이름을 익히 알고 소장했던 책, 바로 북송(北宋)의 문신 서긍(徐兢, 1091-1153)이 편찬한 고려 종합보고서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이하 고려도경)이었다.

 

 

 

 

고려도경은 어떤 책인가

 

 11236, 8척의 배에 나누어 탄 북송의 국신사(國信使) 일행 1,000여 명이 고려의 도읍인 개경(開京)의 관문 벽란도(碧瀾渡)에 도착했다. 정사인 급사중(給事中) 노윤적(路允迪)과 부사인 부묵경(傅墨卿)을 필두로 한 이들은 휘종(徽宗, 재위 1100-1125)의 조서(詔書)를 고려 국왕에게 전하고, 1년 전 돌아간 예종(睿宗, 재위 1105-1122)을 조문하기 위해 왔다. 휘종은 11223월 이미 사신 파견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4, 고려 임금이 죽자 국신사에게 제사를 올리고 조문하는 임무가 더해졌다.

 한 달 남짓 개경에 머무른 국신사 일행은 공식일정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고려 국왕 인종(仁宗, 재위 1122-1146)을 알현하고, 예종의 영전에 조문하고 위로의 뜻을 전하였으며, 조서를 내리고 표문(表文)을 올렸다. 그들을 위한 연회에도 참석하였으며, 개경에서 그들이 지내던 순천관(順天館) 바깥을 구경할 기회도 대여섯 번 있었다. 일정을 마친 사절단은 713일에 순천관을 떠나 42일 뒤인 827, 북송에 돌아왔다.

 이게 다라면 역사책에 한 줄 정도 적히고 끝나겠지만, 1123년 사절단은 고려시대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 사이에 길이 회자되고 있다. 바로 사절단의 인원·선박·예물 등을 관리하는 서열 4위 제할인선예물관(提轄人船禮物官) 서긍이 편찬한 고려도경때문이다.

 서긍은 본인이 눈썰미가 빼어났을 뿐만 아니라 서화에 능했고, 무엇보다 사신단의 일원이었던 전문가 집단 충대하절(充代下節)을 동원하여 고려를 자세히 조사할 수 있었다. 그는 그렇게 수집한 자료들을 토대로 직접 그림을 그리고 글을 지어 1년 만에 완벽한 고려 리포트를 만들어냈다. 고려의 역사부터 개경의 이모저모, 각종 풍속, 의례, 배의 모양이나 군사들의 모습, 중요 인사의 정보, 심지어 고려와 북송 사이의 바닷길에 이르기까지 서긍은 보고 듣고 겪고 모은 고려의 모든 것을 29() 301(), 40권으로 엮어냈다.

 

 

수레가 달리는 동안이나 연회에서 술잔을 나누는 도중에 이목(耳目)이 미친 부분에서는 

[한나라 장건(張騫)처럼] 13년이나 오래 머문 것 같지는 않겠지만,

고려의 건국 및 정치 체제와 풍속 및 사물 중 그럴듯한 것을 대강 알 수 있었기에

그림과 목차의 배열에서 빠지지 않도록 하였다.

 

- 고려도경서문

 

 

 『고려도경은 고려의 사회, 문화, 경제, 군사 등 다양한 주제를 포괄하고 있어 다른 사료에 빠진 귀중한 사실들이 많다. 예컨대 고려도경32 기명(器皿)도기(陶器)의 빛깔이 푸른 것을 고려인은 비색(翡色)이라 하는데, 요즘 들어 기술이 정교해져 빛깔이 더욱 좋아졌다. 란 대목은 고려시대 미술사 연구에서 빠지지 않고 인용된다. 요즈음 주목받고 있는 생활사, 건축사나 도시사 분야에서도 고려시대를 논할 때는 반드시 고려도경속 개경 시가지나 사람들의 생활상, 궁궐, 관청 등에 대한 설명을 참고한다.

 그러면 서긍은 왜 고려도경이라는 자세한 보고서를 만들었던가900년 전 중국 대륙에는 북송, 거란족의 요(), 여진족의 금()이 대립하고 있었다. 이러한 국제정세 속에서 고려는 일종의 캐스팅 보트였으므로, 세 나라 모두 고려를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특히 북송은 요를 제압하기 위해 고려를 꼭 끌어들여야만 했다. 고려 국왕을 책봉하고 원군을 요청하려는 상황에서 북송은 고려를 상세히 알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 휘종은 사절단에게 고려에 대해 자세히 보고하도록 지시했고, 그 결과가 바로 그림이 포함된 종합 보고서, 고려도경이었다.

 

 

 

 

파란만장, 고려도경의 유전(流轉)과 판본들

 

 11248, 서긍은 고려도경2부 완성했다. 휘종에게 고려도경1부를 올리자 휘종은 크게 기뻐하고, 서긍을 승진시켰다. 그러나 휘종에게 바친 고려도경1127년 북송의 수도 개봉(開封)이 금에게 함락된 이른바 정강(靖康)의 변으로 사라졌다. 나머지 1부는 집에 보관하였는데, 그것은 1127년 봄에 이웃이 빌려갔다가 정강의 변을 맞아 잃어버리고 만다.

 10년이 지난 1137, 사라졌던 고려도경이 홀연히 나타났다. 그렇지만 다시 발견된 고려도경에는 그림 부분이 거의 없어져있었다. 서긍은 1153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끝내 그 그림을 다시 그리지 못했다. 그래서 고려도경은 이름만 도경(圖經)이 되고 말았다.

 1167, 지방관으로 있던 서긍의 큰조카 서천(徐蕆)은 근무지 근처 강음군(江陰軍, 징강(徵江)이나 징강(澂江)이라고도 한다)에서 고려도경을 간행하였다. 판각한 지명을 따라 징강본(澂江本)이라고도 하는 이 판본은 자금성 서고에 보관되다가 20세기 들어 영인 출간된다. 청대 제일의 국가문헌 정리사업이었던 사고전서(四庫全書)안에도 고려도경이 있는데, 이는 명대(明代) 정홍(鄭弘)이 낸 판본을 저본으로 했지만 틀린 글자가 많기로 유명하다.

 『고려도경을 세상에 널리 알린 사람은 18세기의 대()장서가 포정박(鮑廷博, 1728-1814)이었다. 포정박은 자신이 갖고 있던 희귀본들을 지부족재총서(知不足齋叢書)라는 이름으로 간행하였는데, 그 하나로 고려도경을 선정했다. 그는 당시 전해지던 판본들을 견주며 교정한 끝에 1793년 완성본을 간행하였다. 이를 지부족재본(知不足齋本)이라고 한다. 지부족재본은 상당한 선본(善本)이었기 때문에 그 영향력은 근대까지도 유지되었다. 심지어 징강본이 영인된 뒤인 1932년에도 일본 학자 이마니시 류(今西龍, 1875-1932)가 지부족재본을 교정해 경성 근택서점(近澤書店)에서 간행했고, 중국에서도 지부족재본 고려도경1937년에 상하이에서, 1950년에 타이베이에서 활자로 간행하였다.

 

 

 

 

박제가의 말은 허풍일 뿐이었을까, 고려본 고려도경의 행방


 『고려사김부식(金富軾, 1075-1151) 열전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하나 실려 있다.

 

 

송의 사신 노윤적이 왔을 때 김부식이 관반(館伴)이 되었는데,

노윤적의 수행원 서긍은 김부식이 글을 잘 짓고 고금(古今)에 통달한 것을 알고 그 사람됨을 좋아하게 되었다.

서긍이〉 『고려도경을 지어 김부식의 세가(世家)를 싣고 또 생김새를 그려 돌아가 황제에게 아뢰었다.

이에 사국(司局, 사무를 맡아보는 곳)에 조서를 내려 판목에 새기게 하여 널리 전하니,

이로 인하여 이름이 천하에 알려졌다

- 고려사98, 열전11, 김부식

 

 

 김부식은 사신으로 멸망 직전의 북송에 갔었는데,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예우했다고 한다. 이것이 고려도경을 보고 알아봤기 때문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문맥상 그렇지 않을까? 『고려도경이 국가 차원의 보고서였음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어딘가에 그 사국본이 남아 있다면 한 번 보고 싶은데.

 

 그런데 그보다 더 보고 싶은 것은 바로 진전이 궁금해 한 고려본이다. 포정박은 지부족재본 고려도경발문에 고려본이 있는데, 언제 판각되었는지 모른다고 썼다.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이나 정몽주(鄭夢周, 1337-1392) 같은 이들이 고려도경을 알고 있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개성부(開城府) 조에 고려도경이 인용되어 있다. 이때 그들이 본 고려도경은 고려에서 간행했을 가능성이 높다. 박제가의 말대로라면 조선 후기에도 고려본 고려도경이 제법 전했겠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지금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고려도경의 조선시대 필사본은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을 포함해 몇 군데 전하는데, 모두 지부족재본을 필사한 것이다.

 

 

 

 

인연이로다, 규장각의 고려도경

 

 


사진 : 선화봉사고려도경 서문

奎中2190 

 

 

 현재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는 고려도경의 필사본 완질(完帙)이 한 부 소장되어있다. 판심(版心)아정장판(雅亭藏板)’이라고 새긴 목판을 찍은 괘선지에 지부족재본 전체를 베낀 것으로, (((() 4책이다. 앞부분 두 책은 정갈한 해서체(楷書體)지만 뒷부분 두 책은 급하게 흘려 써서, 필사자가 달랐거나 시간에 쫓겼던 듯싶다. ‘조선총독부도서지인(朝鮮總督府圖書之印)’이라는 장서인이 찍혀 있어 1911년 이전에 조선총독부가 수집했었다가 경성제국대학에 이관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고려도경필사본에는 따로 붙은 서문이나 발문이 없다. 그러니 필사자를 알 수 있는 단서는 판심의 아정장판넉 자뿐이다. ‘아정(雅亭)이 보관한 책판이란 뜻이니, ‘아정고려도경을 직접 필사했거나 필사한 사람과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아정은 누구인가

 ‘아정이란 아호(雅號)를 썼던 인물을 찾아보면 이덕무(李德懋, 1741-1793)라는 이가 나타난다. 이덕무는 유득공, 박제가, 그리고 이서구(李書九, 1754-1825)와 더불어 조선의 사가(四家)로 꼽혔던 문인으로, 서얼(庶孼)이었지만 능력을 인정받아 1779년부터 1793년까지 14년간 규장각 검서관(檢書官), 곧 책을 교정하는 관원으로 근무했다. 정조가 그의 재주를 아껴 저작을 남기기를 권할 정도로 대단한 지성인이었던 이덕무, 그가 이 책의 주인일까.

 이덕무는 가난했지만 책을 좋아해 수만 권의 책을 읽고 수백 권의 책을 베꼈다고 한다. 그러니 그가 필사자일 가능성은 충분하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다. 이덕무는 1793년에 죽는데, 지부족재본 고려도경1793년에야 간행된다. 청에서 발간된 책이 조선에 오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아무리 빨라도 조선에 지부족재본 선화봉사고려도경이 올 수 있는 것은 1793년 이후인데, 이덕무가 자신이 죽은 뒤 조선에 온 책을 베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면 이 책은 누구의 손을 거쳤을까. 이덕무의 아들 이광규(李光葵, 1765-1817)와 손자 이규경(李圭景, 1788-1856)도 규장각 검서관을 역임했다. 특히 이규경은 백과전서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를 남길 정도로 박식한 인물이었다. 그렇다면 이 고려도경은 이광규나 이규경, 혹은 두 부자(父子)가 함께 필사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그런 책이니 규장각에 들어온 것도 어쩌면 인연 아닐까.

 

 1801, 베이징에 온 유득공이 청의 장서가 요포(蕘圃) 황비열(黃丕烈, 1763-1825)의 집에 초청을 받았다. 역시나 책에 관해 대화하다가 황비열이 고려도경이야기를 꺼낸다. 공께서 고려도경을 구한다 들었는데, 내 고향 집에 지부족재본보다 나은 영인한 송본宋本影宋本子이 있으니 나중에 보여주겠노라고. 유득공의 답은 이러했다.

 

황하(黃河)가 맑아지기를 기다리기는 어렵지만,

만일 (말씀하신 고려도경) 한 번 보게 된다면 매우 유쾌하겠습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연대재유록燕臺再遊錄

김대식, 그림으로 읽는 고려도경, 역사인, 2013

서긍, 조동원 외 역주, 고려도경, 황소자리, 2005

서긍, 이진한 편,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고려시대사 연구실 역주, 高麗圖經 역주 (), 경인문화사, 2020

후지츠카 지카시, 이충구 외 역, 추사 김정희 연구:청조문화 동전의 연구, 과천문화원,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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