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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조선에도 백과사전이 있었다.

- 이익성호사설유선(星湖僿說類選)-

 

 

 


사진 : 성호사설유선(4416)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이런 질문을 자주 받는다. “커서 뭐가 되고 싶니?”, “장래희망이 뭐니?” 80~90년대 어린이라면 대개 대통령이라고 대답했었다. 요즘 어린이들은 대통령이 안 좋은 직업인 걸 아는지, 주로 연예인 계통을 답한다고들 한다. 이런 대답을 한 어린이들은 어른이 되면서 점차 현실적으로 사고하면서 자기 적성에 맞는 직업과 생활방식을 찾아 적응하곤 한다. 현대사회는 직업 선택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으며, 어떤 직업에도 근본적으로는 귀천이 없다고 통용되고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러한 직업선택의 자유가 인류 내내 이어져 온 전통일까? 조선 시대로 돌아가 양반가의 아들도 태어났다고 가정해보면, 직업선택의 자유는 별로 많아 보이지 않는다. 조상 대대로 관직을 지낸 양반가의 아들로 태어났다면 그 역시 운명적으로 과거시험에 도전하여 관직에 올라야 하도록 태어난 것이다. 어릴 적부터 천자문을 공부하고, 논어, 맹자를 평생 외우며 평생을 공부하여 관직에 도전할 운명 말이다. 그런데 이런 생활이 자기 적성에 잘 맞고 능력도 받쳐주는 데다, 가문 여건도 괜찮았다면 소위 영감님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살펴볼 성호사설의 저자 성호 이익(星湖 李瀷1681~1763)은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고, 학식도 뛰어났고, 학문을 사랑하는 적성도 가진 인물이었으나 끝내 관직에는 오르지 못했다. 그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양반 자제의 불우한 유년기

 

 

성호(星湖) 이익의 가족사는 당쟁으로 얼룩져 있었다. 이익의 증조부 이상의는 인조반정으로 화를 당하였고, 이익의 아버지 이하진(李夏鎭)은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평안도 운산에 유배되었다. 이익은 평안도 운산의 유배지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유배지의 냉혹한 환경 속에서 건강이 악화한 아버지 이하진은 곧 사망하였고, 이익은 조상 대대로 살아온 경기도 안산으로 돌아와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그래도 이익에게 아버지 역할을 해준 사람은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형들이었다. 특히 이익에게 학문적으로 영향을 크게 준 사람은 둘째 형 이잠(李潛)이었다. 그런데 이잠 역시 당쟁에서 벗어날 수 없었는데, 1705(숙종 31)년 장희빈을 두둔하는 상소문을 올렸다가 역적으로 몰려 처형된 것이다. 당쟁으로 인해 이익은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가족들을 잃었을 뿐 아니라, 남은 생애 동안 과거시험에 도전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당쟁으로 인하여 가족은 잃었지만, 가족이 남긴 학문적 유산이 있었다. 이익의 집안에는 대대로 내려오던 수천 권의 책이 있었다. 이익 집안에서는 누대에 걸친 사행을 통해 중국의 최신 학술 자료 수집이 이루어졌으며, 이익은 집안에 보관된 서적들을 통해 다양한 주제를 습득할 수 있었다. 또한, 주변의 인맥을 통해 청나라의 최신서적, 희귀서적, 개인 소장 자료 등 아무나 쉽게 접할 수 없는 자료에 접근할 수 있었다.

사실상 이익에겐 아버지와 형이 죄인으로 처형당한 이상 관료로서 출셋길은 막힌 것이었다. 이익은 부친 이하진의 유배지에서의 죽음과 중형 이잠의 사망을 경험한 뒤에 서인들이 자신을 찾지만, 자신은 화살에 한 번 상처를 입은 새와 같아서 그들의 마음에 무슨 속셈이 있는지에 대해서 항상 두렵다라고 토로한 것처럼 처신에 매우 신중하였다. 1727(영조 3)년 성호 이익의 명성을 들은 영조가 벼슬을 내리고자 하였으나 사양하고 1763(영조 39)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뜰 때까지 오직 학문에 몰두하였다.

그의 학문 방법은 다양한 서적을 탐색, 기록, 수집하는 박학(博學)’의 방법이었다. 경학, 역사, 천문, 지리학 등 기존의 유학에 포함되는 주제뿐 아니라 서양 과학기술과 천주교 등 다양한 분야의 서적을 책을 읽으면서 읽었던 서적의 내용 및 자신의 견해를 그때그때 채록하고 기록하였다. 이를 위해 항상 붓과 종이를 휴대하고 다니며 순간순간 떠오르는 자신의 견해를 기록했다고 한다. 그는 평생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하여 실로 많은 양의 저술을 남겼다. 이 중에서 성호사설(星湖儘說)은 그의 실학사상이 집대성된 주요 저작인 것이다.

 

 

 

 

 

조선의 백과사전 성호사설

 

 



사진 : 성호사설  (奎4416, 권1)





먼저 성호사설의 이름에서 이 서적의 성격이 나타난다. 성호(星湖)는 자신의 자를 딴 것이며, 사설(僿說)은 자질구레한 이야기라는 뜻의 겸손한 표현이다. 이익이 사설이라는 말을 제목으로 삼은 것은 이 저술이 개별 사건과 물건에 대한 단편적인 논설을 모은 것임을 밝힌 것이다. 성호사설책 이름을 풀이하자면 성호 이익이 쓴 단편적인 논설 모음집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성호사설의 표면적 편찬 동기가 여가를 통해 책을 읽은 내용을 저작의 형태로 남기고자 하는 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책의 구성은 크게는 5가지 분류로 되어 있는 백과사전적 성격을 띤다. 223항으로 구성된 천지문(天地門)은 천문과 자연과학, 자연지리 및 역사지리에 관한 내용이고, 368항의 만물문(萬物門)은 의식주의 생활 문제와 화초·화폐·도량형·기구 등을 수록하였다. 인사문(人事門)은 인간의 사회생활과 학문에 관한 내용을 담았는데, 정치·경제·인물·사건·사상에 대한 990항목이 실려 있다. 경사문(經史門)은 유교와 역사에 대한 1,048항목이, 시문문(詩文門)에는 중국과 조선의 시와 문장에 대한 비평 378항목이 실려 있다. 사물 고증, 문헌 인증, 사실 확인, 변론 논증 등을 통해 지식을 확인하고 내용을 풍부하게 확장해나가는 내용이 주류를 차지한다.

이익은 기본적으로 유학적인 정치관 속에서 현실 정치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 유교적인 정치철학으로서 왕도(王道) 정치의 확립과 보민(保民) 이념의 실현을 중시하였다. 다만 보수적인 유학자의 틀을 벗어나 시대의 흐름에 맞게 정치를 개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농촌에서 농민들의 생활을 직접 살펴보며 지냈기 때문에 토지문제와 민생문제 해결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에 원론적으로만 왕도정치를 논하기보다는 조선 현실사회에서의 당쟁으로 특징지어지는 정치 현실을 비판하였다. 예를 들어 당시 붕당들이 절대적인 것으로 내세우는 명분에 대해서는 스스로 국시라고 주창하는 것이 결국 나라를 망치는 논의이다라고 지적하였다.

이러한 붕당 정치의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해 정치제도의 구체적인 개선 방안을 제시하였다. 그는 당쟁이 일어나는 이유를 관직의 수요와 공급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즉 관직 수는 적은데 관직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많다는 것이다. 그러한 조건에서 과거시험을 너무 자주 시행하거나, 인사행정이 공정하지 못하게 되면 관료들이 편을 갈라 당쟁을 일으키게 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당쟁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과거시험을 공정히 시행하고, 관리의 인사평가를 엄정히 해야 한다고 보았다.

농민의 몰락을 예방하는 조치로는 한전제를 제안하였다. 지배층의 가혹한 수탈과 상업(商業고리대자본(高利貸資本)으로 비농민(非農民)의 농지 소유가 늘어나는 반면, 농민들이 토지로부터 이탈되면서 점차 농민층이 몰락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에 농사를 짓는 농민을 구제하는 토지 제도로 한 가구당 오늘날의 1,500평에 해당하는 50묘 정도의 영업전(永業田)을 한정하여 기본적 삶을 꾸려나갈 수 있는 한전론을 제시하였다. 토지에 대한 절대적 처분 관리권은 국가에 귀속시킴과 동시에, 제한된 영업전 외의 농토는 무제한 자유로이 매매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부농과 빈농, 대토지 소유자와 전호의 토지 보유가 점차 균형이 이루어지도록 하자는 점진적인 개혁안이었다.

또한, 상업의 발달로 화폐가 유통되어 농민에게 해로우니 화폐를 없애야 한다는 폐전론(廢錢論)을 주장하였다. 화폐의 유통은 사람들에게 이윤추구에 매달리게 하여 풍속이 나빠지고 사치풍조가 만연되어 농민이 몰락하게 된다는 것이다. 재화는 농민의 노동력에서 나오는데 상업의 이익이 크면 농민이 농업을 버리고 상업으로 몰리기 때문에 국가의 기간 산업인 농업이 무너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농민은 농업에 몰두하도록 하고, 절약과 검소한 생활을 미덕으로 여기도록 하며, 화폐를 활용한 상업에 종사하지 못하도록 하여, 열심히 농업생산 노동에 집중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서양의 과학기술이 매우 정교함을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수용하려고 한 입장도 18세기 조선 현실에서는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성호 이익은 중국의 최신서적들을 입수하여 탐독하였고, 중국을 거쳐 들어온 서양문물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한문으로 만들어진 서양 서적을 통해 동양과는 또 다른 방식의 학문 창구를 얻게 되었다. 그에 더하여 동양을 넘어선 새로운 세계가 넓고 광대하다는 것도 이해하게 되었다. 이익은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서양 학문을 수용하여 세계관·역사의식을 확대, 심화시켜서, 더욱더 실증적이고 합리적인 사유방식을 체득했다.

이 밖에도 성호사설백과사전이라고 불릴 수 있을 만큼 많은 분야의 지식을 망라하고 있었다. 전통적인 양반들의 일상생활과 학문연구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이 언급되어 있으며, 전통사회의 풍속, 가치관, 사고방식에서부터 의복, 음식, 일용기물, 식물의 생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항목들이 들어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성호 이익의 개인 사상의 결정판에 그치지 않고, 조선 후기 사회경제사, 생활사, 유학사의 백과사전 역할도 겸하고 있다.

 

 

 

 

 

성호학파로의 확산

 

이처럼 성호 이익의 학문은 폭넓은 주제를 포괄하고 있었다. 성호 이익의 학술적 명성이 높아짐에 따라 그에게 배우러 오는 문도들이 점점 많아졌다. 이익의 교육 방법은 제자들이 주체적 학자가 되도록 하는 방법이었다. 그의 제자들이 스스로 학문의 주체임을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각자의 학문 세계를 확립해 나가도록 교육하여, 각자 스스로 가장 알맞은 방법이나 방책을 연구하여 대상의 본지를 정확하게 이해하도록 요구하였다.

이 때문에 성호학파로 일컬어지는 성호 이익의 제자들은 각기 주체적으로 주제의식과 방법론을 추구하면서 학문 활동을 펼쳤다. 이병휴(李秉休, 1710~1776), 이용휴(李用休, 1708~1782), 윤동규(尹東奎, 1695~1773), 신후담(愼後聃, 1702~1761), 안정복(安鼎福, 1712~1761), 이가환(李家煥, 1776~1801), 이기양(李基讓, 1744~1802), 권철신(權哲身, 1736~1801), 한정운(韓鼎運, 1741~1819), 정약전(丁若銓, 1758 1866) 등이 그 주요 인물들이다.

학문은 성호학으로 그의 문인들은 성호학파로 지칭될 정도로 다양한 폭과 깊이를 가지고 있으며, 그의 학문적 관심은 당시의 주된 관심사였던 예학, 실학, 문학, 역사와 경세론 및 서구에서 전파된 과학기술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하다고 할 수 있다. 이른바 성호학파란 명칭이 웅변하듯 성호 이익은 자신의 이름으로 학문의 일가를 이룬, 퇴계 이황, 율곡 이이 이래 영향력 있는 지식인 중 한 명이었다.

 

 

 

 

 

 

참고문헌

 

 

강병수, 2011, 성호 이익의 성호사설의 세계」 『동국사학50.

송재소, 1997, 조선후기 백과사전성호사설읽기」 『당대비평2.

원재린, 2003, 조선후기 성호학파의 학풍연구, 혜안.

원재린, 2018, 성호사설(星湖僿說)과 당쟁사 이해」 『한국사상사학59.

윤재환, 2018, 성호학파를 통해 본 조선후기 지식 집단의 형성과 변모의 한 양상」 『고전과 해석26.

이성무, 1997, 성호이익(16811763)의 생애와 사상」 『조선시대사학보3.

한우근, 1981, 성호이익연구, 서울대 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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