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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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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료사회의 또 다른 구성원 : 의관(醫官)

 

 

 


 

 

 

 

오래된 전문직

 

사람들의 병을 치료하는 일은 매우 오래전부터 전문화된 직업 가운데 하나였다. 우리나라에도 일찍이 의료인이라는 직업이 존재하였을 텐데, 사료에서 확인되는 것은 일본서기에 기록된 신라 의사 김무(金武)의 사례가 최초이다. 414년 신라 의사 김무는 당시 일본 윤공주(允恭主: 19대 왕)의 초청을 받고 일본에 파견되어 그의 병을 치료하고 돌아왔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452년 일본의 요청으로 백제에서 보낸 고구려 의사 덕래(德來)는 일본 난파(難波)지역으로 건너가 자자손손 의업을 행하여, 난파약사라는 칭호를 얻었다고 한다. 이처럼 삼국은 이미 5세기에 일본에 의료기술을 지원할 만큼의 의료 수준과 의술인을 보유하고 있었다.

의술과 의학은 많은 경험의 축적과 학습을 필요로 한다. 때문에 국가에서는 이러한 전문 인력의 확보를 위해 의료인 육성을 공적인 체계 안으로 포함시켜 나갔다. 일본서기에는 553년 백제가 의박사를 파견해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박사는 중국의 진한 이래 전문 학자 및 기술자에게 부여된 관직명으로, 백제에서도 근초고왕대 박사 고흥(高興)書記를 지었다.”는 사례가 있으므로(三國史記24) 의박사 역시 관직명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당시 백제가 중국식 제도를 도입하여 정부 기관내에서 의학교육을 실시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짐작컨대 고구려와 신라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신라에서 의학교육이 완비된 것은 삼국통일 이후이다. 신라는 통일 후 관제정비에 나섰는데, 의료분야의 경우 의학이라고 하는 교육기관을 설치하고 박사 2인을 두어 학생들을 가르치게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광종대 과거제를 실시하면서 의업이 잡업의 한 과목으로 설정되었고, 비로소 시험을 통해 의관을 선발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선발된 의관들은 태의감이라는 관서에 배치되어 의약과 치료를 관장하였다.

 

 

 

 

조선시대의 의관

 

조선시대 또한 국가에 의해 의학 전문 인력이 교육·선발되어 해당 관청에 배치되었고, 국가는 이들을 통해 공적인 의료체계를 꾸려 나갔다. 조선시대 의관들은 관료제의 한편에 위치하였다. 의관은 과거시험의 잡과 가운데 의과에 합격한 관원으로, 잡직의 산계를 받았다. 조선은 문무관과 잡관의 산계(散階)를 별도로 운영하였다. 이것은 문무관과 잡관 모두 나라의 봉록을 받는 이들이었지만 서로 다른 체계로 관리되었다는 의미이다. 즉 같은 3이라 하더라도 문무관과 잡관은 별도의 등급체계로 운영되었으므로 동일한 것이 아니다. 조금 더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잡과 출신의 관원인 경우, 원칙적으로는 문무관직에 나아갈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전문화되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기술직으로 취급된 만큼 차별성도 존재하였는데, 3품에 해당하는 내의원의 정()이라는 관직이 법제상 의관으로서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관직이었다.

이렇듯 관직이 제한되고 잡학관이 선호되지 않았던 까닭에 과거를 준비하던 의관자제(衣冠子弟)들은 의관(醫官)이 되는 것을 꺼려하였고, 이에 따라 16세기 후반부터는 주로 서얼들의 직업군이 되었다. 하지만 문·무관보다 낮은 잡관에 속하였지만, 다른 잡학관들 이를테면 통역을 담당하는 역관(譯官)이나 법률을 맡은 율관(律官), 천문지리역수(曆數)등을 담당하는 음양관들 중에서는 그리 낮은 대우를 받았던 것은 아니다. 이것은 의술이 사람의 생명과 연결된 기술이기도 하거니와, 궐내에서 국왕이나 왕비 등 높은 분들의 병을 잘 치료한 경우 특별한 보답을 받는 기회도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전의감의 분설기관인 내의원은 어의(御醫)로서 궐내에서 국왕이나 왕실 사람들을 곁에서 모시며 이들의 건강을 관리하거나 치료를 담당하였고, 대신이나 종친들이 투병중일 때에는 국왕의 명으로 이들의 치료를 돕기도 하였다. 특히 왕이나 왕비, 동궁의 병을 고친 경우에는 특별한 상이 내려져 높은 품계를 받는 일도 종종 있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허준이다. 그는 1590(선조 23)에는 왕세자의 천연두를 치료하여 당상관 정3품의 품계를 받았고, 1596(선조 29)에도 세자의 난치병을 치료한 공으로 서얼 출신이라는 한계에도 동반(東班)에 적을 올리기도 하였다. 이렇게 의관은 기술직으로 천대받기도 하였지만, 아주 드물게 능력에 따라 신분의 한계도 뛰어넘을 수 있는 그러한 자리였다.

 

 

 

 

의관의 구성

 

조선시대 의관은 어떻게 구성되었을까. 현대 의학에서는 내외과, 소아과, 부인과, 흉부외과 등 신체를 이루는 다양한 장기와 구조 가운데 치료 분야에 따라 분과가 나뉘어 있다. 조선시대 의원들 역시 전문화 되어 있었지만 이는 주로 치료 방법에 따라 구분되었다. 왕실 의료를 담당하는 의관의 분류를 살펴보면 크게 약을 위주로 치료하는 내의(內醫 혹은 약의(藥醫))와 침술을 주로 사용하는 침의(鍼醫)로 나누어져 있다.

실록을 보면 왕이 병중에 있을 때, 침의는 오직 침과 뜸 진료만 담당하고 내의는 탕제와 환약 등 약제 처방만을 맡고 있어 각자의 일이 전문적으로 나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침의 중에는 침을 써서 종기를 치료하는 종의(腫醫)가 세분화 되어 있었는데 이들 중에는 특별한 고약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의관이 되는 길

 

조선시대 의학생도가 의관으로 출세하기 위한 길은 험난했다. 의학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경전과 역사서는 필수로 습득해야 했고, 공부를 시작하면 진맥학과 침구학은 물론, 의학 기초이론을 비롯하여 내과학, 본초학, 방재학 등을 배웠다. 과거 시험 과목으로는 여러 의학서들이 정해졌는데 그중에 중요하게 취급되었던 찬도맥』 『동인경』 『소문은 통째로 외워야 했고, 다른 책들은 책을 펴 놓고 해당 부분을 읽으면서 막힘없이 설명할 수 있어야 했다.

이러한 책을 공부하여 치르는 의과(醫科)는 과거시험의 잡과 가운데 하나로, 의학을 공부한 양인 신분 모두에게 열려 있었다. 의과가 치러진 곳은 전의감이었는데, 문과와 마찬가지로 3년마다 정기적으로 보는 식년시,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 베풀어지는 별시가 있었고 모두 초시와 복시 두 단계를 거쳐 전의감(典醫監)내의원(內醫院)혜민서(惠民署)에 소속될 의관을 선발하였다. 초시에서는 일차적으로 18(별시 중 대증광시일 경우 22)을 선발하였고, 복시에서는 이들 가운데 9(대증광시일 경우 11)을 최종 선발하였다. 최종합격한 9명 중 1등에게는 종8, 2등에게는 정9, 3등에게는 종9품의 관직을 주었다. 간혹 이미 벼슬에 있던 자라면 한 계급을 올려 주었는데, 이것은 의과 응시 이외에 다른 방법으로 의관에 진출할 수 있었음을 의미 한다.

의관은 의과 시험을 통해 선발되기도 하였지만 이미 혜민서와 전의감에 소속된 의학 생도들이라면 취재(取才)를 통해 하급 의관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조선후기 생도의 정원을 보면 전의감에 56, 혜민서에 60명이 있었는데 이들은 1년에 4회 치러지는 취재에서 계속 우수한 성적을 받으면 전의감과 혜민서의 의원이 되거나 공물 약재를 담당하는 심약, 정부 기관에 설치된 약방의 파견 의원이 됨으로써 의관에 진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취재 성적이 좋더라도 의과에 합격하지 않으면 원칙적으로 고위관직인 6품 참상관 이상에는 오를 수 없었으므로 취재를 통해 의관에 진입하더라도 다시 의과 시험을 보는 경우가 있었던 것이다.

 

 

 

의녀

 

조선시대 여성이 공적인 영역에서 공무를 맡아 활동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비록 후궁과 궁녀가 각각 내관(內官)과 궁관(宮官)으로 내명부 관품을 받기는 하였으나, 전문직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의녀는 여성이 종사할 수 있는 유일한 전문직이었다.

여성의료인을 제도적으로 설치한 것은 조선이 유일했다. 의녀제도는 조선 태종대 처음 실시되었는데 주자 성리학의 영향으로 남녀구별의식이 강해지면서 양가의 부녀자들이 남성 의료인의 진료를 거부하고 사망에 이르는 경우가 발생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는 태종 63월 제생원 지사였던 허도의 상소에 잘 나타나 있다.

 

부인이 병이 있는데 남자 의원으로 하여금 진맥하여 치료 하게 하면, 혹 부끄럽고 창피한 마음에 쉽사리 병의 상태를 보이지 않으니 의원이 진료하게 되었을 때에는 이미 사망에 다다른 상태가 됩니다. 원하건대, 창고(倉庫)나 궁사(宮司)의 동녀(童女) 수십명을 택하여, 맥경(脈經)과 침구(針灸)의 법을 가르쳐서 치료하게 하면, 무릇 전하의 호생지덕(好生之德)에 보탬이 될 것입니다.”

 

초기에는 제생원에서 어린 관비(官婢)들을 모아 의녀 교육을 담당하였는데, 교육을 마치면 각자 속해있던 관사로 다시 돌아가 그곳에서 의료행위를 보조하게 하였다. 비록 관비들이었던 만큼 의학에 대한 습득 이전에 글자부터 가르쳐야 하는 경우가 많아 의료기술 이해와 습득에 시간도 걸리고 수준도 높지 못하였으나, 부녀자들에게도 의료혜택을 줄 수 있었기 때문에 나라에서는 이 제도를 꾸준히 정비하여 지방으로 확대해 나갔다. 이들은 초급 단계에서는 혜민서에서 의술을 배웠으며, 실력을 인정받으면 내의원에 발탁되었다. 이들의 주 활동은 당연히 의료에 관한 것이었는데 궁중과 사족 여성의 맥을 짚거나, 침을 놓아주었고, 출산을 돕거나 약을 상의하기도 하였다. 더불어 병간호 역시 담당하였는데, 내의원에 소속된 경우 왕의 수발을 드는 것도 포함되었다.

의녀제도는 세종대에 비로소 전국으로 확대되기 시작하였으며, 성종대에는 이들의 역할과 지위 등이 구체화되어 기능에 따라 침술진맥약제를 전공으로 하는 침의녀, 맥의녀, 약의녀 등으로 세분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의녀에게는 대개 남성의원의 보조적인 역할이 기대되었을 뿐이고, 천민인 관비 출신이었기 때문에 낮은 처우를 면할 수 없었다. 물론 내의원의 의녀로서 의술을 인정받아 어의녀(御醫女)가 되거나 왕비의 출산을 돕는 등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많은 경우 낮은 처우와 의료 이외의 다양한 잡무에 동원되었다.

이를테면 의료인으로서 범죄자의 성별을 감식하거나 구타당한 부인이나 여종의 상처를 조사하는 일에 참여하기도 하였지만, 의료행위와 상관없이 양가 부녀자에 대한 심문, 혼사가 있는 사대부의 집에 가서 호화스러운 납채나 금물(禁物)과 같은 예물이 있는지 조사하는 일이나 죄인 추포 및 여성 죄인에게 사약을 전달하는 일에 동원되기도 하였다. 주로 여성 죄인이 포함된 형옥이 발생한 경우 의녀들이 동원되어 이들과 접촉하였던 것이다. 또한 궁중행사에 동원되어 제문을 한글로 번역하여 읽는 일도 하였고, 연회 자리에 기녀가 부족할 경우에는 이를 대신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의녀는 사람의 목숨을 다루는 직업이었던 까닭에 다른 관비보다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었다. 치료 성적이 좋을 때면 다른 관비들이 세운 공로보다 더 높게 쳐주어 나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때에 따라서는 쌀과 옷감을 받았고 더 크게는 천민 신분을 면하는 기회를 얻기도 하였다. 비록 대다수의 의녀들이 천민의 신분으로 열악한 지위와 환경속에 있었지만, 때에 따라서는 관료제의 한 편에서 자신의 전문성을 인정받아 성취 지위를 획득할 수 있는 유일한 여성의 직업군으로 존재하였던 것이다.

 

 

 

 

참고문헌

 

신동원, 의관으로 출세하기 위한 험난한 길 명의와 속의(俗議)의 경계에 선 조선의 의원들, 조선 전문가의 일생규장각 교양총서 4, 글항아리, 2010

신유아, 조선시대 내의원의 기능과 의관(醫官)의 지위, 역사와 실학65,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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