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푸터 바로가기

조선 후기

이전

관료사회의 또 다른 구성원 궁녀(宮女)

 

 


 

 

 

궁궐 안의 여성 노동자 - 궁녀

 

 

나라의 공적인 국정운영과 왕실의 사적인 생활이 공존하는 궁궐 안에는 남성 관료들뿐만 아니라 다수의 여성들도 존재하였다. 궁인으로 통칭되는 이들의 모습은 사서에서는 쉽사리 드러나지 않지만 궁궐의 일상은 많은 부분 이들의 손을 거쳐 이루어졌다.

궁인은 일반적으로 궁녀(宮女)라고 불렸다. 궁녀는 상궁(尙宮)과 시녀(侍女)를 합해 부르는 말로, 상궁은 궁인들 가운데서 가장 높은 정5품의 궁인이고, 시녀는 그 아래 궁인들의 총칭이다. 이들은 궐 안에 산다는 의미에서 나인(內人)으로 통칭되기도 하였고, 시녀의 경우에는 붉은 소매를 단 저고리를 입었기 때문에 홍수(紅袖)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이렇게 궁에 살면서 소속과 역할을 부여받은 이들은 내명부에 소속되어 품계를 받음으로써 지위를 획득하였다.

궁녀들은 국가의 공적인 영역보다는 왕실이라고 하는 하나의 가문에 속한 존재들이었지만 국가로부터 재정적인 지원과 인정을 받아 지위를 획득하였다. 따라서 반공반사(半公半私)의 영역에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공식적인 성격을 부각시킬 경우 내명부 소속 여성들을 여관(女官)이라고도 하였으니, 궁녀는 궁궐에서 일하는 여성의 대표적인 존재였다.

 

 

 

 

 

궁인들의 공적 체계 - 내명부(內命婦)

 

궁궐에서 활동하는 여성들은 궐 안에 기거하는 이들과 궐 밖에 살면서 궁에 출입하는 여성들로 구분된다. 조선은 궐 안에 살면서 활동하는 이들을 대상으로 등급을 정하고 체계를 잡아 지위와 역할을 구분하였는데 이를 내명부(內命婦)라 한다.

내명부의 등급체계는 총 9품이며 하나의 품은 다시 정()과 종()으로 나뉘어 총 18()로 되어 있다. 품계 구성으로만 보자면 일반 관원들과 동일하지만 문무 양반의 관료제와는 엄연히 구분되어 있었다.

내명부는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왕명으로 책봉된 빈()이하의 후궁, 그리고 궐내의 다양한 역할에 동원되는 이른바 궁녀로 통칭되는 존재들이다. 전자의 경우 주로 후자의 시봉(侍奉)을 받는 이들이라 볼 수 있겠다. 즉 국왕과 같이 내명부 품계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왕비()를 제외하고는 궐 안에 사는 여성이라면 모두 내명부에 소속되어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였고, 이 체계 안에서 지위를 인정 받았던 것이다. 경국대전에 규정된 내명부의 체계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면 아래 표와 같다.

 

 


 

위 표에서 볼 수 있듯이 내명부는 국왕의 비()를 제외한 후궁이 정1품부터 종4품에 위치하고, 5품 상궁 이하는 이들을 시종하는 궁인직으로 구성되어 있다. 단, 세자궁에서는 후궁과 상궁의 계선이 종6품으로 이동된다.

 

 

 

 

후궁과 궁녀 : 내관(內官)과 궁관(宮官) 역할

 

내명부에 소속된 이들 중에서도 4품 이상은 국왕의 후궁이고, 5품 이하는 이들을 수발하는 궁인으로 명확한 경계가 존재한다.(세자궁의 경우 종6품을 경계로 나뉜다.) 이때 전자를 내관(內官), 후자를 궁관(宮官)이라 한다. 그런데 흔히 국왕의 측실이라 여겨지던 후궁들에게 ()’이라는 명칭을 부여하는 것이 매우 낯설게 여겨진다. ()앞에 붙은 ()’라는 글자를 통해 이들의 활동영역의 한계를 감지할 수 있지만, 어떠한 직무가 부여되었기에 관()으로 지칭할 수 있는지 언뜻 보면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 경국대전에서도 각 품계에 따른 직무를 정해 두지는 않았다. 하지만 세종실록103월 경인일의 기사에서 이들의 역할을 언급하고 있어 참고할 만 하다. 다만 경국대전이 완성되기 이전의 기사이므로 궁관의 명칭과 품계에 약간 차이는 있다. 그럼에도 이 세종 10년의 기사는 내명부 내관과 궁관들의 역할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사료이므로 이를 통해 내명부의 구체적인 구조와 역할을 살펴보도록 하자.

 


사진 : 세종실록 권39 세종 10년 3월 8일 경인일 기사. (표시된 부분이 해당 내용) 

(조선왕조실록 https://sillok.history.go.kr/ 홈페이지 참조)

 

해당 기사에 의하면 정1품의 빈과 귀인은 왕비를 보좌하여 부례(婦禮)를 논하는 일을 맡았고, 2품의 소의와 숙의는 비례(妃禮)를 찬도(贊導)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왕비의 곁에서 왕비로서 갖추어야 할 행동 규범에 관해 조언하고, 이와 관련한 의례를 돕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3품의 소용과 숙용은 제사(祭祀)와 빈객(賓客)에 관한 일을 맡는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국왕이 주관하는 제사와 국빈접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왕비가 주관하는 사안에 국한된 일로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국왕이 주재하는 제사나 빈객접대의 경우 예조와 같은 담당 관청이 별도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4품의 소원과 숙원은 연침(燕寢)을 베풀고 사시(絲枲)를 다스려 해마다 공()을 바친다고 하는데, 연침이란 왕과 왕비의 침석을 말하고 사시는 명주와 모시, 즉 옷감 짜는 재료인 실을 가리키므로 직조와 관련한 일을 담당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즉 정1품에서 종4품에 이르는 후궁들은 왕비를 보좌하는 역할을 분담하고 있고, 이것은 왕비 주관하에 이루어지는 왕실의 운영에 관한 면면을 함께 총괄하였음을 보여준다.

다음으로 5품 이하 궁녀의 역할을 살펴보자. 이들은 궐 안에서 생활하는 윗전의 일상을 보필하기 위한 관련한 다양한 일들을 수행하였다. 그들이 담당했던 일은 크게 일곱 개의 영역으로 나눠볼 수 있는데 비서, 의전, 복식, 음식, 접대, 직조, 사법 및 기율이 그것이다.

먼저 비서 영역은 정5품 상궁, 6품 사기(司記), 7품 전언이 담당하였다. 이들은 왕비가 주체가 되는 공적 활동에서 의전 절차에 맞게 안내하거나 보필하고, 왕비의 명령 하달이나 문서출납을 담당하였다. 왕비의 명령하달과 문서출납은 국왕의 승정원과 유사한 역할로 볼 수 있다

둘째로 의전을 돕는 이들은 정5품 상의, 6품 사빈(司賓), 7품 전찬이다. 이들은 왕비의 의전 절차와 일상을 도왔다. 사빈은 손님을 맞는 일, 조회에 뵙는 일, 잔치를 차리는 일, ()을 내려주는 일을 담당하고 전찬 역시 사빈을 도와 일하며 손님을 왕비에게 인도하는 일[導前]을 맡는다. 5품의 상의가 사빈과 전찬을 통솔하는데, 이 역할은 전례를 담당하는 예조와 통례원 등의 역할과 유사하다

세 번째 영역인 복식을 담당하는 이들은 정5품 상복, 6품 사의(司衣), 7품 전식이다. 이들은 복식과 관련된 모든 것[服用]과 장식용품[采章]의 공급에 관한 일을 맡는데, 6품 사의가 의복과 머리장식[首飾], 7품 전식은 고목(膏沐-목욕후 몸에 바르는 화장품)과 건즐(巾櫛-수건과 빗) 등을 담당하고 5품 사의는 이들을 통솔한다. 국왕의 복식을 담당하는 관청인 상의원과 유사한 역할이다

넷째는 음식에 관한 것으로 정5품 상식, 6품 사선(司膳), 7품 전약이 음식이나 약제를 지어 바치는 일을 담당하였다. 상식은 음식을 차려 바치는 일과 음식의 품질과 맛을 고르게 하는 일[品齊]을 총괄하였다. 삶아 만드는 음식[제팽(制烹)]과 달여 만드는 음식[전화(煎和)]을 담당하는 사선과 처방 약제를 달이는 일을 담당하는 전약을 통솔하였다. 이는 궁중 음식을 담당하는 사옹원과 유사한 역할이다

다섯째는 접대의 영역인데 왕비의 곁에서 손님 접대와 그에 필요한 시설 환경을 조성하는 역할이다. 5품의 상침, 6품 사설(司設), 7품 전등이 이를 담당하는데, 왕비를 가까이 만나러 온 사람들을 왕비가 편하게 만날 수 있도록 안내하고 환경을 조성한다는 점에서 국왕을 모시는 내시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으며, 공적 영역에서는 예빈시나 전설사, 장전고 등 연향 및 시설 담당 관청의 역할과 통하는 측면이 있다

여섯째는 직조의 영역이다. 5품의 상공, 6품 사제(司製), 7품 전채가 담당하는데, 상공은 길쌈하는 여공(女功)을 관리 감독하고 전채는 비단을 짜고 물레질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직조의 영역은 왕비전에 부여된 상징적이고 독창적인 역할이었다. 사직신을 모시는 농업국가의 수장인 국왕이 적전(籍田)을 갈 듯, 왕비는 친잠례(親蠶禮)를 행하였다. 따라서 직조는 여성 궁관들만의 역할이라 볼 수 있는데, 다만 직물의 진헌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제용감과도 상통하는 측면이 있다

마지막으로 사법 또는 기율의 영역이 있다. 이 영역은 정5품의 궁정(宮正)과 정7품의 전정이 담당한다. 궁정은 전정을 통솔하여 계령(戒令규금(糾禁적벌(謫罰)을 담당한다. 계령이란 왕비가 궐내의 여성들을 단속하기 위해 내린 명령으로, 궁정과 전정은 이를 어긴 자를 잡아들이는 규금과 죄에 해당하는 벌을 주는 일[謫罰]을 수행하였다. 마치 일반 관료사회에서 사헌부·형조와 같은 법사의 기능을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궁궐은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공적 영역과 왕비를 중심으로 하는 왕실의 사적 영역이 공존하는 곳이다. 공적 영역은 국왕과 남성 관료들에 의해 운영되었지만, 왕실의 영역은 왕비와 내명부에 속한 여성들에 의해 운영되었다. 내명부에 속한 궁인들은 각자의 품계에 따른 역할을 부여받았는데, 특히 5품 이하의 궁녀들이 왕비를 비롯한 윗전의 일상을 보필하는 일에서부터 왕실 의례에 이르는 다양한 일들을 담당함으로써 원활한 왕실 운영을 도왔던 것이다.

 

 

 

 

궁녀의 위상

 

궁녀들은 궁중에서 어느 정도의 위상을 가지고 있었을까? 윗전을 시봉하는 일을 하였으니 높은 지위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가장 낮은 자들도 아니었다. 앞에서 본 궁관들의 일곱 가지 영역 중에는 의례와 의전을 돕는 역할 외에 의식주를 담당하는 일이 주된 것이었는데, 이것은 대체로 온갖 용품을 직접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원활하게 조달하는 관리자적인 측면이 컸기 때문이다.

궐 안에는 궁녀들의 시중을 드는 이들도 존재하였다. 이들 중에는 궁 안에 살면서 시중드는 이들도 있고, 궁 밖에 살면서 궁에 출입하여 시중드는 이들도 있었다. 이들의 경우 내명부에 소속은 아니었지만, 궁녀들이 위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부리는 이들이었다. 가장 많이 알려진 이들로 무수리’가 있다

무수리는 한자로 수사(水賜)’ ‘수사이(水賜伊)’ ‘수사리(水賜里)’ ‘수사노(水賜奴)’라고 쓰이는데 이는 몽골어를 음차한 것이다. 이들은 궁궐에서 심부름 하는 여종으로 궁 안에 거주하는 이들도 있고, 궁 밖에 살면서 궐에 드나들며 일을 하였는데 간혹 남편이 있는 여자도 무수리가 되었다. ‘수모(水母)’는 세수간을 담당하는 여종인데 원래는 각 관서에서 일하는 어린 남자 노비를 궁궐로 들였으나 소녀로 바꾸었다. ‘방자(房子)’는 여러 관서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여종으로, 궁궐에서는 주로 시녀들의 사사로운 잔일을 맡아 주었으며, ‘아기배비(阿只陪婢)’는 국왕의 어린 자녀가 있을 때 그에게 딸린 여종을 말하며, ‘유모배비(陪婢陪婢)’는 국왕의 자녀에게 젖을 먹이는 유모에게 딸린 여종을 가리킨다. 다만 유모배비가 시중드는 국왕의 유모는 봉보부인(奉保夫人)’이라 하여 외명부 종1품에 해당하는데, 비록 내명부가 아닌 외명부 소속이지만 궐 안에 상주하였다. 이러한 이들이 궁녀에게 딸린 이들이자 궁에서 일하며 식사를 하는 궁중 식구들이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궁녀와 궁중 식구들은 어떠한 보상을 받았을까. 요즘은 노동에 대한 보상으로 월급이라는 돈을 받지만, 전통시대에는 그 보상의 내용이 좀 다양했다. 국가 기관의 공적 직무를 수행하는 구성원 가운데 문무 양반의 정규 관원은 녹(祿)을 받았고, 정규관원 보다 낮은 체계에 소속된 사람들은 요()를 받았다. 하지만 궁녀는 녹과 요를 받는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들은 무엇을 받아 살았던 것일까

이들은 궁궐에서 살아가는 이들인 만큼, 필요한 물건이 현물로 지급되었다. 녹이나 요를 받는다면 그때그때 필요한 물건을 사기 위해 교환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궐 안에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적합하지 않은 지급 형태였던 것이다. 때문에 조선에서는 호조의 전례방(前例房)이라는 부서를 통해 전궁(殿宮) 즉 왕과 왕비, 왕실 가족과 후궁 이하 상궁시녀 등에게 매달 지급되는 쌀, , 물고기, 젓갈, 각종 반찬 등의 수요를 관장하도록 하였다. 각각의 품목마다 공상하는 주관 부서가 달랐기 때문이다사도시(司䆃寺)에서는 왕과 왕비 이하의 시녀와 상궁, 무수리, 유모를 시종하는 여종에게까지 미곡이나 장류 등의 식료품을 공급하였다. 사재감(司宰監)은 육류나 소금, 땔나무 등을 공급하였고 내자시(內資寺)를 통해서는 쌀, , , , 기름, , 채소, 과일 등을 공급받았으며 내섬시(內贍寺)에서는 식용 기름 및 반찬거리 그리고 사흘에 한 번 비누용 팥도 공급받았다. 상궁 시녀들에게는 조명용 연료인 등법유도 매일 지급되었으며 제용감(濟用監)에서는 옷감을 받았다고 한다특히 상궁은 더운 여름 귀한 얼음을 하사받는 대상이기도 했다. 얼음은 왕실과 종친고위 관원들에게만 특별히 하사되었던 품목이다. 이것은 이들이 국왕과 왕실을 측근에서 모시는 이들로서 대우를 받았던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궁녀뿐만 아니라 궁궐에서 기거하며 일했던 궁중 식구들은 현물로 반대급부를 받았다. 이 현물은 녹(祿)도 아니고 요()도 아닌 왕실에 진상된 물품들이었는데, 이런 점에서 볼 때 궁중 식구들은 국가 관료기구의 공식 구성원으로 인정받지는 못하였지만 왕실 구성원에게 사적으로 예속되기만 한 존재도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궁녀들이 윗전을 모시면서 그 일을 수행하기 위해 자신도 아랫사람을 부리는 중간자적인 위치에 있었던 존재였던 것과 같이, 이들을 수발하는 궁중 식구들 또한 왕실에 물품을 조달공급하는 관청으로부터 현물을 공급받고 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공적 위상도 점한 반공반사(半公半私)의 경계위에 있었던 존재들이었던 것이다.

 

 

 

 

 

 

참고문헌

 

홍순민, 조선시대 궁녀의 계보학 궁궐 살림을 책임진 여성 일꾼들, 조선 전문가의 일생규장각 교양총서 4, 글항아리, 201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