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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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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 월급날

 

 

 

 

서강에 가면

 

오늘날 우리는 은행이 점검 중인 시간을 제외하면 스마트폰을 들어 은행 앱을 켜고 간편하게 돈을 보내고 받을 수 있다심지어 은행 앱을 켜지 않고 메신저만 켜고도 금융거래를 할 수도 있는 시대가 됐다하지만 19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한국 청소년의 사랑을 받은 만화 도라에몽과 짱구는 못말려를 보자두 만화의 주인공 가족은 모두 직장인 아빠의 외벌이로 살아간다그런데 두 만화 각각에서는 아빠가 월급을 봉투에 받아서 가져오다 분실한 사건이 다뤄진다왜 월급을 봉투에 받아서 왔는지 의문이 들지 않는가혹시 두 만화가 일본 원작이라 일본 사회의 특징을 반영한 것일까그러나 이런 일은 서울 올림픽 직후 출생한 세대까지 흔히 본 모습이다월급 또는 보너스를 담아온 봉투의 행방을 둘러싼 직장인 아빠와 주부 엄마의 갈등도 월급만큼의 지폐를 봉투에 받아오던 생활상이 외벌이가 보통이던 시대와 맞물려 낯설지 않은 시절이었다.

조선에서 직장인이라고 할 만한 사람들은 누구였을까시장이 취약하여 지금 같은 형태의 기업을 찾기 어려웠던 시기였으니조선에서 가장 많은 사람을 고용한 존재는 국가로 보는 편이 무난할 것 같다그렇다면 조선을 대표하는 직장인은 공무원이라고 할 수 있다은행이 없었고 경제생활에서 동전보다 다른 실물을 중시하던 조선에서 공무원은 월급을 실물로 받아야 했다1품부터 종9품까지 품계를 지닌 공무원이 받는 급료는 녹봉(祿俸)으로 불렸으며 법전에 규정이 실렸다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르면 조선 전기의 녹봉은 네 번의 맹삭(孟朔), 곧 음력 1·4·7·10월에 집행됐다하지만 조선 후기에 제도가 바뀌면서 영조 때 편찬된 속대전(續大典)에서는 품계가 있는 공무원의 녹봉을 매달 지급하는 것으로 규정이 달라졌다녹봉의 액수도 녹봉을 지급하는 주기가 바뀌면서 조정됐다.

 


 

품계를 지니며 백관(百官)의 반열에 들어간 사람의 급료는 광흥창(廣興倉)이라는 기관을 통해 집행됐다현재 서울지하철 6호선에 광흥창역이 있는데 여기에서 딴 이름이다광흥창역에서 신내역 방향으로 한 정거장 가면 대흥역이 나오고이곳의 부역명은 서강대앞이다광흥창역 일대에서 여의도 쪽으로 건너가려면 서강대교를 지나야 한다서강대학교와 서강대교에 붙은 서강은 오늘날 서울특별시 마포구 앞의 한강 권역을 부르던 이름이다광흥창은 서강변에 있었다녹봉을 지급하는 날이면 서강 일대는 녹봉을 받을 수 있다는 증명서인 녹패(祿牌)를 들고 온 사람들이 광흥창의 일꾼들과 쌀과 콩을 헤아리고 옮기느라 분주했을 것이다.

 

 

 

 

 

월급명세서

 

광흥창의 녹봉 집행이 어떻게 이뤄졌는지 보여주는 자료는 드물다앞서 언급한 녹패는 규장각에 현재 20여 개 존재한 것으로 확인된다녹패를 발급한 이조(吏曹)와 녹패를 확인하고 녹봉을 지급한 광흥창의 도장이 각각 찍혀있다그런데 규장각에 전해지는 녹패의 수량은 20건이 넘는 데에 비해이들 녹패를 받은 사람의 수는 4명에 그치고 그나마도 3명은 왕족이었다훗날 아들이 왕이 되어 대원군(大院君칭호를 받게 될 흥선군(興宣君)의 아버지 남연군(南延君), 형 흥녕군(興寧君)과 흥인군(興寅君)이 그들이다하지만 녹패는 그것을 지닌 개인이 얼마나 녹봉을 받았는지는 보여주지만특정 시점의 녹봉 규모와 수령자의 전모를 보여주지는 못한다.

 

 

규장각은 광흥창에서 집행된 조선 후기의 녹봉과 관련하여 귀한 자료를 하나 소장하고 있다광흥창차하중기[廣興倉上下重記]가 바로 그것이다중기(重記)는 회계장부를 뜻하는 조선 시대의 용어이다한자음대로 읽으면 광흥창상하중기이지만 상하를 차하로 읽었는데이것이 이두(吏讀)이기 때문이다차하[上下]는 지급한다는 뜻이다광흥창에서 녹봉을 지급한 것에 대한 장부가 광흥창차하중기인 셈이다책의 겉면에 쓰인 제목은 백관반록부(百官頒祿簿)로 백관에게 녹봉을 나눠준 것에 대한 장부이다이 책은 경술년(庚戌年정월(正月)에 집행할 녹봉을 기록했는데등장하는 인물과 관직 등을 대조해보면 철종 원년인 1850년의 일임을 알 수 있다녹봉은 높은 품계부터 순서대로 매달 25~29일에 지급됐다철종 경술년 정월의 녹봉이 지급된 날을 양력으로 바꾸면 1850년 3월 초이다.

광흥창차하중기는 목판으로 찍은 부분과 그 안에 사람 손으로 쓴 부분이 공존한다녹봉의 액수와 녹봉을 받을 관직은 어느 정도 고정돼있었다그래서 관청품계지급 시기(), 녹봉 액수(·), 관직관직 정원은 정해진 양식처럼 목판으로 출력됐다관직을 맡은 사람과 지출할 총액은 그때그때 달랐을 것이다그래서 사람 이름과 관청별 지출 총액은 목판으로 출력된 양식 안에 사람 손으로 쓰였다하급 관직의 경우 정원각 정원에서 취재(取才)로 뽑을 인원수가 얼마인지 기록하기도 했다그러나 목판으로 출력된 모든 관직에 인원이 배치된 것은 아니었다이 책은 국가가 결정할 사안을 심의하는 가장 큰 책임을 맡은 의정부(議政府)의 공무원들로 시작하는데당장 삼정승 중 우의정이 비어있었다하급 실무직으로 내려가도 사람이 항상 꼬박꼬박 채워진 것은 아니었다한 사람이 여러 보직을 겸하는 현상법으로 정해진 보직에 사람이 비어있는 현상은 조선 관료제 안에서 공존하고 있었다.

이쯤에서 광흥창에서 어떤 기준으로 녹봉을 지급했을지 짚고 넘어가자조선 건국 후 녹봉은 18()로 나뉘어 지급됐다1품에서 종9품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품계마다 하나의 등급을 주었기 때문이다속대전에서는 이 내용이 크게 바뀌어 녹봉의 등급은 13과로 조정됐다이 내용은 정조 때 편찬된 대전통편(大典通編)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1850년까지 아직 새로운 법전이 나오지 않았으므로 이 시기의 기본 법전은 대전통편이고 녹봉의 등급은 속대전의 규정을 따랐을 것임을 알 수 있다속대전에서 규정한 백관의 녹봉은 <표 1>과 같다.

 

<표 1> 속대전에 규정된 녹봉 등급

 

광흥창차하중기는 녹봉 집행과 얽힌 여러 종류의 장부를 한 곳에 모으다 보니 복잡하게 구성됐다그런데 그 이유를 장부 기록자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조선의 관료제가 꽤 복잡하게 이뤄졌기 때문이기도 하다조선의 공무원 모두가 항상 정규적으로 근무하는 실직(實職)은 아니었다적지 않은 수의 관직이 교대 근무한 기간에 따라 녹봉을 받는 체아직(遞兒職)으로 운영됐다광흥창차하중기에 따르면 실직에 지급될 녹봉이 쌀이 618석 3(9,273)인데잡군직체아(雜軍職遞兒), 원군직체아(元軍職遞兒등의 녹봉으로 지급될 쌀이 각각 300여 석(4,500여 두)이었다체아직이 거의 실직만큼 녹봉을 잡아먹는 셈이었다.

녹봉 지출이 가장 많이 필요한 관청들은 어떤 곳이었을까광흥창차하중기의 실직’ 부분에서 녹봉 총계가 가장 큰 관청 5개를 정리하면 <표 2>와 같다이 시기 법정 환산가로 쌀은 콩의 2배 값으로 정해졌음을 알고 보면 순위에 문제가 없을 것이다.

 

<표 2> 녹봉 총계 상위 5개 관청

 

의외의 관청들이 주로 눈에 띈다중추부는 그 자체로서 하는 일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며실질적으로 고위 대신들을 우대하기 위해 유지하고 있는 관청이었다훈련원은 군사훈련을 담당하는 기구였으나 점차 기능이 줄어드는 추세였고실병력을 보유하고 군사활동을 책임진 것은 훈련도감을 비롯하여 조선 후기에 설치된 군영들이었다각릉이라는 것은 왕릉의 유지보수를 담당하는 관직을 총칭한다왕릉마다 차이는 있었지만 령(/5), 직장(直長/7), 참봉(參奉/9), 별검(別檢/9등 관직을 두고 있었다사람들이 능참봉이라도 해 보겠다고 분주하게때로는 부정하게까지 움직인 데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승문원은 왕에 관련된 문서 업무를 담당했고성균관이야 잘 알려진 조직이다.

병조가 눈에 띄지 않는 것을 의외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녹봉 총계 상위 10위권에 들어있다다만 병조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일반 군졸이 받는 급료는 녹봉과 별개의 범주에 해당하기 때문에 여기에 계산되지 않았다또한 병조로 포함됐다면 병조의 녹봉 총계를 크게 끌어올렸을 만한 사람들은 소속을 달리하며 녹봉을 받아먹고 있었다수도 한성의 방위를 책임진 훈련대장금위대장어영대장은 광흥창차하중기에 따르면 모두 자신이 지휘하는 군영군영의 상위 기관인 병조가 아닌 다른 곳에 소속되어 녹봉을 받았다세 군영은 실직’ 부분에서는 다뤄지지도 않았다중앙집권적 관료제가 유럽 국가보다 빨리 성장했음을 들며 자화자찬만 하고 있기에는조선의 관료제를 둘러싸고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이 많아 보인다.

 

 

 

 

엇갈리는 신세

 

경술년 정월 백관에게 지급된 녹봉 액수는 대단히 커 보인다녹봉으로 나간 쌀과 콩의 무게감을 느껴보자조선 시대 1두의 용량은 6리터이므로 1(=15)의 용량은 90리터이다실직과 체아직을 포함하여 녹봉으로 지출할 쌀만 약 1,200석을 잡아야 한다무려 10만 리터가넘는다부피를 무게로 환산할 때 비율이 정확히 1:1은 아니지만편의상 1:1로 놓고 보면 너녹봉으로 지급할 쌀만 108톤이 필요하다여기에 콩이 더 필요하다쌀만 먹고 살 수도 없고 쌀 수급이 항상 안정되리라고 기대할 수 없으니 콩도 거의 50여 톤은 필요했을 것이다이것은 어디까지나 백관으로 분류되는 공무원에게 지급되는 녹봉일 뿐이다한성을 지키는 군졸들의 월급은 병과나 근무일수에 따라 다양했지만 쌀 9두 안팎이다당장 훈련도감 군졸 5천여 명에게 지급할 쌀만 3,000석이다금위영어영청에 소속된 군졸들도 있다다양한 종류의 공무원에게 지급할 급료를 계산하기가 녹록지 않다.

 

 

그런데 이 액수가 사람들의 생계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를 따지면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른다현재까지 알려진 조선 후기의 식사량에 따르면 한 사람이 한 달에 먹는 쌀의 양은 3~5두 정도라고 볼 수 있다경술년 정월에 영의정 정원용이 받을 녹봉 중 쌀 38두는 적게는 7많게는 13명이 한 달 동안 먹을 수 있는 양이었다정원용이 청렴하다는 평을 받기는 했지만이 시기의 그에게 살림 걱정을 할 이유는 크게 보이지 않는다장남 정기세가 승정원에서 좌승지(3품 당상관)차남 정기년이 사복시(司僕寺)에서 주부(主簿/7)로 근무하며 녹봉을 받았기 때문이다하지만 정원용 아래의 많은 공무원은 살림을 고민했을지도 모른다본인부인자녀노비로 구성된 집이라면 15두에 미치지 못하는 쌀로 한 달 먹고 살기도 빠듯했기 때문이다품계가 8~9품인 공무원에게 주어지는 녹봉은 한성에서 근무하는 군졸 일부에게 주어지는 월급보다 적을 수 있었다.

조선 후기 양반의 내부 경쟁은 치열했다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입했다고 해서 평생 고용을 보장받는 사회도 아니었다백관의 반열에 들어도 급료는 충분하지 않았다하급 공무원의 뇌리에 어서 6품으로 승진해서 현감 자리라도 한 번 나가리라” 하는 생각이 일하던 중에도 문득 스쳤을 것이다수령(守令)은 입신양명을 꿈꾸던 조선 양반에게 기회의 자리였다오늘날 청탁과 대등한 조선 시대의 개념으로 칭념(稱念)이 있었다수령은 물품 조달조세 행정법적 분쟁 등 과정에서 칭념을 수락하거나 거부하면서 양반들 사이의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었다6품만 돼도 현감을 할 수 있었으니그보다 아래 품계의 공무원은 수령으로 나가서 목민(牧民)의 경험을 쌓는 것 말고도 다음 관직으로 나아갈 발판을 마련할 생각도 충분히 해 보지 않았을까더구나 중앙정부가 지방 차원의 자율적 재정 운영을 전면 통제하지 않던 조선의 체제에서는 한 몫을 노려볼 만도 했다두메산골과 바닷가에서 백성들이 내쉬던 한숨의 뿌리에 그들이 있었다한때는 광흥창에서 받는 박봉(薄俸)’에 한숨을 쉬며 자신과 집안의 앞날을 걱정하던 정치인이자 공무원이었던 사람들 말이다.

 

 

 

 

참고문헌

 

김현영, 2016, 지방관의 칭념’ 서간을 통해 본 조선말기 사회상 - 1884~1885년에 민관식이 받은 간찰을 중심으로고문서연구』 49.

송양섭, 2018, 반계 유형원의 국가재정 개혁구상과 녹봉제 실시론한국실학연구』 36.

이성임, 2004, 조선 중기 양반관료의 칭념에 대하여조선시대사학보』 29.

임성수, 2015, 조선후기 녹봉제 연구동방학지』 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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