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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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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노비를 추쇄하러간 마지막 관리

 

 

 

 

 

노비 추쇄하고 신공 거두기

 

노비는 조선왕조의 최하층 신분으로서 국가기관이나 개인에 속해 노동력 또는 경제력을 바쳐온 존재였다. 낮은 사회적 지위로 인해 끊임없는 도피가 일어났지만, 부모 중 한 사람이라도 노비이면 그 소생도 무조건 노비로 삼는 일천즉천(一賤則賤)과 끊임없는 추쇄(推刷)를 통해 노비의 숫자는 일정한 규모를 유지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증가 일로의 노비가 감소 추세로 돌아선 것은 18세기 중반부터였다.

추쇄는 공노비와 사노비 모두에게 실시되었지만, 규정이 제도적으로 정비된 것은 공노비에 대해서이다. 추쇄를 통해 노비를 낱낱이 색출하는 것은 그들로부터 거둘 신공을 최대한 확보하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처럼 추쇄가 국가적 제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추쇄와 신공의 밀접한 관계를 직접 보여주는 자료는 매우 드문 편이다. 다만 정조 연간 경상도 안동지역의 공노비는 추쇄관이 노비를 조사하고 기록한 결과물, 그리고 이에 기반해 신공을 수취한 문서가 동시에 남아있다는 점에서 매우 주목되는 사례이다.

육상궁노비병술이후을미지계추쇄도안(毓祥宮奴婢丙戌以後乙未至計推刷都案, 18725)1777(정조 1) 작성된 것으로 육상궁에서 파견한 추쇄관이 병술년부터 을미년, 1766~1775년까지 10년간 변화한 노비 신상을 정리한 문서이다. 그리고 안동 수령은 이 기록에 근거하여 1778(정조 2)조 신공을 거두고 경상도안동현육상궁노비무술조수공성책(慶尙道安東縣毓祥宮奴婢戊戌條收貢成冊, 18724)을 작성하였다. 추쇄도안과 수공안에 실린 노비의 이름들이 대부분 겹친다는 점에서 추쇄된 이들 가운데 실제로 신공을 납부한 이가 누구인지 살펴볼 수 있다.

 


 

 

 

 

육상궁 노비들은 왜 안동에 집중되었을까

 

본 자료의 배경이 된 안동은 경상도 가운데서도 중앙각사에 신공을 바치는 노비가 집중적으로 분포한 지역이었다. 중앙각사의 납공노비 가운데 절대 다수는 경상도에 거주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안동·예천·의성·경주에 집중되었다.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조선 태종대 고려의 사원노비(寺院奴婢)를 혁파하고 이들을 공노비로 일괄 흡수하였는데, 그때 후손들일 것으로 추정된다.

육상궁(毓祥宮)은 숙종의 후궁이자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신위를 모신 궁방이다. 정례적으로 제사를 지낸다는 명목 하에 토지와 노비를 보유하였으며, 이를 통해 명실상부한 왕실 재정기구로 거듭났다. 노비의 경우, 다른 중앙각사의 노비를 떼어와 규모를 늘렸다. 보통 국왕이 내려주었으며 이러한 행위를 사패(賜牌), 획급된 노비는 사패노비(賜牌奴婢)라고 한다. 안동은 본래 중앙각사 소속의 노비가 많았던 지역이라서 사패노비로 분정되는 이도 많았다.



 

육상궁은 영조 연간(1750) 당시 총 291구의 노비를 가졌다. 이 가운데 243구가 경상도에 있었으며, 안동에 107(49, 58), 의성에 133(60, 73)가 거주하였다. 아울러 이들 노비는 육상궁 소속이지만 본래 어느 기관에서 왔는지 그 출처도 표시되었다. 추쇄도안과 수공안에도 육상궁 노비의 본래 소속이 일일이 밝혀져 있는데, 군기시, 내섬시, 내자시, 사섬시, 예빈시, 의빈부, 장예원, 제용감, 종친부 등에서 온 경우가 많았다.

 

 

 

 

노비를 추쇄하러 간 마지막 관리

 

추쇄는 새로 태어나거나 은루한 노비를 색출하고, 도망 또는 사망, 나이가 60세 이상이 된 노비는 면역하도록 허락하는 일련의 과정을 지칭하였다. 노비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추쇄는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매 식년(3)마다 중앙각사의 관원이 추쇄하였으며 20년마다 임시기구인 도감(都監)을 설치해 대대적으로 추쇄를 시행해야 했다. 그렇지만 1657(효종 8) 추쇄도감 설치로 인해 행정체계가 거의 마비될 정도로 업무에 과부하가 걸렸던 이후로, 이와 같은 대규모 이벤트는 조선후기에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대신 정례적인 추쇄는 꾸준히 실시되었다.

그렇지만 최대한 많은 노비를 확보하려고 하는 중앙각사의 추쇄관과, 되도록 적은 노비를 보고해 신공 부담을 줄이고자 하는 지방각관의 수령들 사이에서는 추쇄를 둘러싸고 끊임없는 불화가 발생하였다. 중앙에서는 수령이 협조하지 않아 노비를 제대로 확보하지 못한다고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에 지방에서는 추쇄관이 해당 지역에 길어야 고작 2~3일 머무를 뿐이라며 이렇게 훑고만 지나가서는 노비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거나, 접대비용이 만만치 않다고 비판하였다.

실제로 1777(정조 1)에 작성된 안동 소재 육상궁 노비의 추쇄 결과를 보면 숫자 자체는 151(73, 78)에 달하지만 도망·물고·노제 등을 제외하면 85(44, 41)에 불과하였다. 30여년 전 107구에 비하면 20구 이상 줄어든 상황이었다.

결국 조선왕조는 정조 즉위를 기점으로 추쇄관을 더 이상 파견하지 않기로 하였다. 대신 도별로 반드시 확보해야 할 노비의 액수를 정해준 뒤 실제로 추쇄하는 업무는 해당 군현의 수령이 도맡도록 하였다. 위의 추쇄도안은 육상궁에서 마지막으로 파견한 추쇄관이 안동과 의성을 돌아보고 작성한 최후의 결과물인 셈이다.

추쇄관은 안동의 숨은 노비를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인다. 같은 추쇄관이 의성을 조사한 결과는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해준다. 의성의 경우 10년 동안 새로 태어난 1~15세 사이 노비가 전혀 없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그리고 조사한 노비 169구 가운데 16~60세 청·장년층은 25구로 14.8%에 불과하나 60세 이상 노년층은 144구로 85.2%에 달하고 있다. 이러한 기이한 인구 구성은 추쇄도안이 사실을 그대로 반영한다기보다 신공과 관련해 일정하게 조정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61세는 신공 납부자와 면제자를 나누는 기준인데, 이를 전후로 노비 구수가 현저히 적고 많기 때문이다. 신공 낼 이를 되도록 적게 보고하려는 의성군과 이를 어느 정도 인정하고 추쇄도안에 노비를 실어야 하는 추쇄관의 입장이 동시에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비하면 안동은 추쇄관이 좀 더 의지를 갖고 추쇄에 임한 지역이었다. 1750(영조 26)과 비교했을 때 신공을 납부하는 노비의 수도 의성만큼 큰 폭으로 줄지 않았으며, 연령별 인구 구성도 청장년층이 84.8%, 노년층이 15.2%이었다. 무엇보다 의성과 달리 병술추현(1776), 을미추현(1775)이라 하여 어린 노비들을 조사하고, 그들의 나이와 이름, 아버지 이름과 직역명, 거주지를 일일이 기재하였다. 이들은 노비의 재생산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추쇄 후 1, 사망한 수십 명의 공노비들

 

하지만 이듬해 신공을 거두는 모습을 볼 때, 이와 같은 추쇄관의 노력은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안동에는 의성과 달리 수공안이 남아있는데, 이에 따르면 추현한 노비 13구 가운데 절반인 7구가 물고 및 탈하로 바뀌었고, 추쇄 당시에는 신공을 거둘 수 있다고 파악된 노비 85구 가운데 정작 신공을 거둔 이는 29구에 불과하였다. 28명은 물고, 15구는 속량, 9구는 노제, 4구는 탈하로 빠져나간 것이다.

추쇄가 끝나고 신공을 거두기까지 2년도 안 되는 사이에 28명이 한꺼번에 사망했다고 볼 수 있을까. 물고는 진짜 사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지방 차원에서 납공하는 노비를 줄이기 위해 활용된 명목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노비가 신공을 면제받기 위해 택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물고, 속량, 노제, 탈하, 병폐 등이 있다. 하지만 노제는 기존의 노비안이나 수공안, 호적에 이름이 남아있는 한 나이를 속이기가 쉽지 않으며, 탈하와 병은 추쇄관이 직접 눈으로 확인한 후에야 허락된다는 점에서 적용하기 어려운 명목이었다. 이에 비해 물고는 입안을 추쇄관이 아니라 수령이 검장(檢狀)과 삼절린(三切隣)이 낸 공초에 입각해 발급하므로 해당 군현의 의지가 상대적으로 크게 반영될 수 있었다.

실제로 물고 했다는 28구 가운데 16~60세 사이가 27구로 대부분이며 61세 이상은 1구도 없었다. 61세 이상에게는 노제라는 선택지가 있지만 16~60세는 물고 이외에 신공을 면제 받을 길이 전혀 없다는 사정과도 관련 있을 것이다.

 

추쇄는 이처럼 노비를 색출하려는 자와 노비를 숨기려는 자의 이해관계가 치열하게 충돌하는 작업이었다. 천한 신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노비 당사자와 군현 차원의 신공 부담을 늘리지 않으려는 수령 입장은 절묘하게 맞아 들어갔다. 추쇄에서 설령 색출되었다 하더라도 정작 신공을 낼 때는 허위 사망 신고를 하는 등, 노비제는 결코 중앙의 의도대로 원활하게 흘러가지 않았다.

이처럼 신분이란 국가의 제도와 사회의 관행이 함께 만들어가는 유기체로서, 노비제의 점진적인 해체 및 폐지 역시 두 주체가 얽히고설키면서 만들어간 결과물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참고문헌

 

전형택, 조선후기노비신분연구, 일조각, 1989.

도주경, 18세기 내시노비 비총제의 시행과 운영, 조선시대사학보88,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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