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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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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민(警民) : 범죄를 주의하시오

 
 

 


사진 : 警民編(一簑古340.0951-G421gb)

 
 
 

 

 

 

해야 할 일과 하면 안 되는 일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백성을) 인도하기를 법으로 하고, 가지런히 하기를 형벌로 하면, 백성들이 형벌을 면할 수는 있으나 부끄러워함은 없을 것이다. (백성을) 인도하기를 덕으로 하고, 가지런히 하기를 예로써 하면 (백성이) 부끄러워함이 있고, 또한 선에 이르게 될 것이다.”

위정」 『논어

子曰, 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

爲政」 『論語

 

 

 

1428(세종 10) 진주(晉州) 사람 김화(金禾)가 아버지를 죽였다. 세종은 이러한 일이 발생한 것에 대해 자책하며, 여러 신하를 불러 효제(孝悌)를 돈독히 하고 풍속을 후하게 이끌 방책을 논의하였다. 변계량(卞季良, 1369~1430) 등은 효행에 관한 서적을 널리 반포하여 어리석은 백성을 깨우쳐 주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이들은 백성들이 효행에 관한 이야기를 항상 읽고 외워서 자연스럽게 효제와 예의를 내면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종은 임금과 신하,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三綱: 君爲臣綱, 父爲子綱, 夫爲婦綱]를 인륜의 근본이자 사회의 규범으로 보았고, 백성들이 이를 제일 먼저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고금의 충신ㆍ효자ㆍ열녀 중에서 뛰어나게 본받을 만한 자 110인을 여러 책에서 뽑아 편집하고 그림 등을 붙여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만들었다.

이후, 삼강행실도는 여러 왕을 거치며 개정되거나 언해본이 제작되어 널리 보급되었다. 이 책은 왕조가 추구하는 유교적 가족 윤리와 사회 윤리를 비교적 쉽게 다루고 있어 교화의 효율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로 여겨져 여러 차례 간행ㆍ배포되었다.



사진 : 동국신속삼강행실도(1832-v.1-18) 046a~b(1)



그러나 생업에 치이는 백성들에게 유교적 가치는 요원한 일이었고, 향촌에서 실질적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수령에게 백성 교화는 지난한 일이었다. 강상(綱常)과 관계된 범죄는 지속적으로 발생했고, 정부는 국가적 차원에서 백성들에게 해서는 안 되는 일과 이에 대한 처벌만이라도 홍보하고자 했다. , 위법(違法) 행위를 알리고 방지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를 독법(讀法) 혹은 독법령(讀法令)이라 불렀는데, 일정한 시기마다 하급 관리와 백성들을 모아놓고 법률 조문을 알려주어 범죄를 예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독법령(讀法令)을 내렸다. 형조에서 아뢰었다. “서울과 지방의 어리석은 백성들이 법률(律文)을 알지 못하여 죄에 빠지니 가엾게 여겨 도와야 합니다. 지금 대명분류율(大明分類律)을 간행하였으니, 빌건대 서울 오부(五部)와 지방 각 관에 반포하십시오. (또한) 서울에는 율학(律學) 1명을 나누어 보내고, 매번 아일(衙日)마다 오부의 관리가 각 관령(管領)과 이정(里正)을 이끌고 혹 문자로써, 혹 강론으로써 사람들을 타이르게 하십시오. 지방에는 각 관 수령이 신명색[申明色: 태종대 각 고을 수령의 불법을 규찰하기 위해 파견한 관원]과 율학 생도로 하여금 육아일(六衙日)에 모여 각 이방별감(里方別監)과 이정에게 문자와 강론으로 전하고 가르치게 하소서. 부령과 수령은 무시로 고찰하여 그 가운데 어리석은 백성에게 (율문을) 통달하게 한 자와 한갓 문구로만 삼아 봉행하는데 마음을 쓰지 않는 자는 서울은 형조에서 지방은 감사가 때때로 고찰하여 이에 따라 상과 벌을 가하소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태종실록29, 태종 1556(임인)

 

下讀法令. 京外愚民不知律文, 陷於罪辜, 可爲矜恤. 今刊大明分類律, 乞於京中五部, 外方各官頒行. 京中則律學各一人分差, 每衙日五部官吏各率管領里正, 或以文字, 或以講論諭衆. 外方則各官守令, 使申明色與律學生徒, 以六衙日聚會, 各里方別監里正, 文字講論傳傳敎諭. 部令及守令無時考察, 其中令愚民有能通曉者及徒爲文具, 不爲用心奉行者, 京中本曹, 外方監司以時考察, 仍加賞罰. 從之.

太宗實錄29, 太宗 1556(壬寅)

 

 

나아가 대죄(大罪)와 관계된 조항은 이두로 번역하고 민간에 반포할 수 있도록 조처하였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백성들의 윤리 규범 준수 문제에 관해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1518(중종 13)년 김정국(金正國, 1489~1541)은 황해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다. 그는 황해도 여러 고을 순행하며 지역의 풍속을 돌아보았다. 유교적 가치를 실천하고 있는 백성들도 일부 있었지만, 대다수는 짐승의 무리와 다름이 없었다. 황해도 지역 백성들은 형과 원수를 지거나 부모와 다투었다. 황해도 연안(延安) 사람 이동(李同)은 밥을 먹다 아버지와 다투었는데, 밥그릇으로 아버지를 구타하였다. 아버지를 폭행한 것은 강상죄에 해당하므로 이동을 붙잡아 신문하였다. 그는 아버지를 일상적으로 구타하였으며, 이것이 반인륜적 행위인지조차 알지 못하였다. 김정국이 부자(父子) 관계의 중요성과 앞으로의 처벌에 대해 그에게 차근히 알려주자 이동은 깜짝 놀랐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김정국은 무지한 백성들에게 삼강오상(三綱五常)의 규범과 그를 위반했을 때 받을 형벌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려줄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하여 1519(중종 14) 경민편(警民編)을 찬술하였다.

 

 

 

 

교화와 형벌의 이중주

 


대체로 제도에 형법을 만든 것은 모두 선왕께서 백성을 사랑하시는 인()에서 나온 것이다. (백성을) 인도하는 것으로서 우선으로 함이 있지 않고 법을 가지고 (백성을) 가둘 것을 논하는 것은 백성을 법망에 걸리게 하는데[罔民: 그물질 하는데] 가깝지 않겠는가. 내가 스스로 분섬[分陝: 지방을 다스리는 장관 혹은 장수를 가리킴]의 근심을 차지하여 소부()를 살펴 백성의 풍속을 관찰하니 매번 옥사를 결단하는 것에 당면하면 일찍이 이에 대해 깊이 탄식하지 아니한 적이 없었다. 어리석은 백성은 인륜의 중대함을 알지 못하니 제법(制法)의 상세함을 어찌 알겠는가. 어리석고 어리석어 장님ㆍ귀머거리와 동일하며, 무식하고 무식하여 입고 먹는 것에만 뜻이 있을 따름이어서 자신도 깨닫지 못하고 과조(科條)를 범하여 죄고(罪辜)에 흘러 빠진다. 이에 유사(有司)에서 안율(按律)하는 것이 참새를 잡기 위해 그물을 얽는 것과 같고 짐승을 잡기 위해 함정을 벌리는 것과 같으니 어찌 백성으로 하여금 선을 쫓고 죄를 멀리하게 하겠는가. 내가 민망하게 여겨 사람의 도리에 가장 관계되고 백성이 쉽게 범하는 바의 것을 들어 12조목을 만들어 엮어 경민(警民)이라 하였다. 간행하여 널리 반포하여 모든 어리석은 백성으로 하여금 이목(耳目)에 익숙하지 않은 것을 닦아서 그 악한 것을 제거하고 선한 것을 따르기를 만에 하나라도 바란다. 경민편을 만듦에 반드시 근본을 미루어 이치를 들고자 한 것은 백성들이 감발하여 흥기하는 바가 있고자 한 것이며, 법을 인용하여 참정(參訂)한 것은 백성들이 두려워하여 알고 피하는 바가 있고자 한 것이다. 말이 간략하면서도 속된 것은 백성들이 배우지 아니하고도 쉽게 깨닫는 바가 있고자 한 것이다. 장차 이 경민편이 문구(文具)로만 귀결되고 우원(迂遠)함에 붙여진다면 앉아서 공름(公廩)을 먹고 편안함을 즐기고 재물을 탐하여 세월을 허비하는 것이니 백성을 교화하는 길에 만약 마음을 다하지 않고 정성을 다하지 않는 것이다. 비록 경민편의 뜻이 아닐지라도 무릇 우리 백성을 다스리는 자는 오직 또한 유념할 따름이다.

경민편발

夫制爲刑法, 皆出於先王愛民之仁也, 不有以導之於先, 執法而論囚, 不幾於罔民乎. 余自叨分陝憂, 按所部, 察民風, 每當斷獄, 未嘗不深喟於斯, 蠢愚之民, 不知人倫之重, 焉知制法之詳. 蚩蚩然有同乎瞽聵, 貿貿焉惟衣食之趣, 自不覺其觸犯科條, 流陷於罪辜. 有司於是, 按律繩之如罥羅捕雀, 機檻取獸, 烏在其使民遷善而遠辜耶. 余爲之憫然, 擧其最關於人道而民之所易犯者爲十二條, 編曰警民, 刊行廣布, 俾諸蠢氓, 靡不習於耳目, 以冀其去惡從善之萬一. 爲編, 必推本而擧理者, 欲民之有所感發而興起也, 引法而參訂者, 欲民之有所畏懼而知避也, 語簡而辭俚者, 欲民之有所不學而易曉也. 將是編歸之文具, 付之迂遠, 坐食公廩, 翫愒歲月, 其於導民化俗之道, 若不盡心而致誠焉. 殊非編者之意, 凡我牧民者, 尙亦念哉.

警民編跋

 

 

김정국은 백성을 가르치지도 않고 인륜을 어겼다 처벌을 한다면 법이라는 그물을 쳐서 백성을 잡아들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백성 대부분은 인륜의 중대함을 알지 못하여 자신도 모르게 죄를 짓고, 그에 따라 어떠한 형벌을 받는지 모른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백성[]을 깨우친다[]는 점에 유의하여, 인륜의 기본적인 규범 및 인간관계와 사회생활 중 벌어질 수 있는 일들을 유형화하고 도덕적으로 해야 하는 일들을 하나하나 설명하였다. 또한 그것을 어기는 경우 어떠한 형벌이 기다리고 있는지 경국대전대명률의 구체적인 조항을 들어 밝히고 있다. , 유교적 가치의 근본 원리와 그에 대한 법적 강제를 동시에 설명하려 했다.

현존 경민편에서 다루는 내용은 열세 가지인데 혈연에서 시작하여 사회공동체로 확장되는 구성이다. 인간관계와 관련해서는 부모 및 조부모ㆍ부처(夫妻)ㆍ형제ㆍ족친(族親)ㆍ노비(奴婢)ㆍ인리(鄰里) 6항목 서술하고 있고, 사회생활과 관련해서는 투구(鬪毆)ㆍ근업(勤業)ㆍ저적(儲積)ㆍ사위(詐僞)ㆍ범간(犯姦)ㆍ도적(盜賊)ㆍ살인(殺人) 7항목을 제시하고 있다. 대체로 삼강오륜(三綱五倫)의 차원에서 도덕적 당위성을 설명하며, 이와 관련된 범죄는 능지처사(陵遲處死)ㆍ참형(斬刑)ㆍ교형(絞刑)ㆍ유형(流刑)ㆍ도형(徒刑)ㆍ장형(杖刑)ㆍ태형(笞刑) 등과 같은 처벌을 예고하고 있다. 또한 지키지 않아도 실질적으로 처벌할 수 없는 근업이나 저축의 항목은 권면의 차원에서 적은 것으로 보인다. 각 항목별 내용을 일부 발췌하여 제시하면 1과 같다.

 

 

1】『경민편의 구성과 내용

 

분류

경민편항목

도덕적 당위

처벌 내용

인간관계

1

부모(父母)

낳고 기르신 은혜를 생각

부모와 조부모를 의도하여 살해

능지처사(陵遲處死)

2

부처(夫妻)

부부가 화목하면 집을 보존

아내가 남편을 구타하여 중상

교형(絞刑)

3

형제(兄弟)

한 부모에게서 출생

형제 사이의 재산 분쟁

100대에 도형(徒刑)

4

족친(族親)

뿌리와 근원이 같은 사이

숙부모를 구타하여 중상

100대에 전가입거(全家入居)

5

노비(奴婢)

노비와 주인은 군신 관계와 동일

주인에게 욕설

교형

6

인리(鄰里)

같은 지역에 거주하며 환난상구(患難相救)

호강(豪强)한 자가 백성을 침해

전가입거

사회생활

7

다툼(鬪毆)

한때의 분노를 참지 못하면 끝없는 후회

타인을 구타

태형(笞刑)

10

사기(詐僞)

간사하고 거짓된 일은 감출 수 없음

문서기록을 위조한 경우

100대에 도형

11

범간(犯奸)

정욕을 참지 못하면 죄에 빠짐

강간

교형

12

도적(盜賊)

타인을 물건을 훔치면 패가멸신(敗家滅身)

절도

60, 초범 오른팔에 자자(刺字)

13

살인(殺人)

사람의 목숨은 지극히 중요

살인을 모의할 경우

주모자는 참형(斬刑), 하수인 교형

8

근면(勤業)

부지런히 경작하면 배부르고 따뜻

농사일에 근면하지 않을 경우

진전(陳田)에 세금 부여

9

저축(儲積)

낭비하면 굶주리고 궁핍함

모여서 술을 마시고 낭비

 

 

 

 

 

 

 

 

경민편의 지속적 활용

 

 

김정국이 편찬한 경민편은 당대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인하여 김정국과 사림들이 대거 정치 일선에서 탈락하면서 경민편을 활용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민편은 임진왜란 이후 본격적으로 간행ㆍ확산되었는데, 이때 출간된 판본은 엮은 자가 내용을 추가하고 생각을 덧붙이기도 하였다. 현재 전해지는 판본은 허엽(許曄, 1517~1580)과 이후원(李厚源, 1598~1660)에 의해 새롭게 구성된 경민편이다. 허엽은 동인(東人)의 영수로 활동하였는데 경상도 감사로 재직하던 시절 경민편을 재간행하여 배포하였다. 그는 군상(君上)’이라는 항목을 경민편첫머리에 추가하였는데, “군주는 백성의 주인이고 국가는 백성을 양육한다는 정언과 국가로부터 부여받는 임무와 역할에 원망 없이 참여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특히, 국가에 예기치 못한 사태가 일어났을 때 도피해서는 안 됨을 역설하고 있는데 임진왜란 직후의 상황을 잘 보여 준다 할 것이다. 이후원은 서인(西人)의 학맥을 잇는 주요한 인물로 효종 7년부터 경민편의 간행을 추진하였다. 이후원의 판본은 군상항목이 없고 중국 학자들의 권유문(勸諭文)과 정철(鄭澈, 1536~1593)훈민가(訓民家)를 부록으로 실었다.

경민편에 대한 새로운 체제 구상은 일정 정도 차이가 있었지만, 이 책이 당시 동인과 서인 두 학파 모두에게 유효한 대민 교화서였음을 알 수 있다. 시대가 더 흘러 정조로부터 경민편은 윤리서보다는 법률서에 가깝다는 평을 얻기도 하였지만, 사회 질서 유지의 방법과 실천 차원에서 그 효용 가치는 지속적으로 논의되었다.

 

 

 

 

 

 

참고문헌

 

김정국 원저ㆍ정호훈 저, 2012, 경민편, 아카넷

김정국 지음ㆍ김병헌, 성당제, 임재완 옮김, 2016, 사재집, 아담앤달리

安秉禧, 1978, 解題」 『李倫行實圖警民編,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김호, 2017, 權道의 성리학자 金正國, 警民編의 역사적 의의」 『동국사학63

이상민, 15세기 지방 지식인층의 활용과 평민(平民) 교화」 『역사와 현실118

정호훈, 167세기 警民編간행의 추이와 그 성격」 『韓國思想史學26

한민섭, 2010, 徐命膺 一家博學叢書類書 編纂에 관한 硏究,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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