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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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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승방략

-북방을 지켜온 역사와 전략

 

문형준(한양대학교 사학과 박사과정)

 


사진 : 制勝方略(奎貴132)

현재 규장각에 소장된 제승방략(奎貴132). 1588년 이일이 주관해서 내용을 개정한 제승방략1670년 이선(李選)이 복간한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시대 군사 제도에서 제승방략(制勝方略)”이라는 단어는 일반인들에게 좋은 인식을 주지 못한다. 제승방략 체계는 임진왜란 초기, 조선의 연패에 원인이 된 잘못된 군사 동원 제도로 흔히 인식되기 마련이다. 특히 유성룡은 임진왜란 후 전쟁을 회고하며 쓴 징비록에서 제승방략 제도를 강하게 비판했다. 을묘왜변을 계기로 남쪽의 병력동원 체계를 제승방략 제도로 바꾸었는데, 각자 자기 고을을 지키도록 한 국초의 진관법과 달리 집결한 병력이 한 번 지면 그대로 무너지며, 조정에서 보낸 장수가 도착하기 전에 적이 나타나면 그대로 무너진다는 것이 유성룡의 주장이었다.

 

 


사진 : 유성룡의 징비록.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비상시에 집결지로 병력이 모이고, 이를 중앙에서 파견된 경장(京將)이 지휘하도록 한 제승방략 시스템이 임진왜란 초기 패전의 주요 원인이었다고 비판하였다.

 

 

 

 

원래는 북방영토를 지키기 위한 계획이었던 제승방략

 

 

그런데 실록에 제승방략이라는 명칭이 공식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선조 때이고, 명종 대에는 제승방략이란 명칭도 나오지 않는다. 재미있는 것은, 이 제도명칭과 동일하게 제승방략이라는 제목을 가진 단행본에 담긴 내용은 유성룡이 이야기하는 것과 차이가 크다는 것이다. 1670년 이 책을 복간하면서 남긴 발문에서 이선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위의 제승방략은 누구의 손에서 나온 것인지 알 수가 없으나, 그 시행한 것은 아주 오래된다. 그 의도는 또한 절재(節齋) 김종서가 변방의 시사를 다스리려던 것이고, 그 내용을 증보하고 개수한 것은 또 고() 장수 이일(李鎰)이 한 일이다.

右制勝方略, 未知出於誰手, 而其行盖久. 意亦節齋金相制閫時事, 若其增補修明, 則又故將李鎰所爲也.

(제승방략2 발문)

 

 

그러니까 원래 제승방략이 처음 고안된 취지는 남쪽에서 일본의 대규모 침공을 막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증언이다. 임진왜란 전까지, 조선의 국방정책에서 쟁점이 된 지역은 북쪽, 특히 두만강 일대였다. 세종대 46진 개척과 함께 두만강 일대로 강역을 확대한 것은 좋았지만, 그만큼 국경선의 길이가 늘어났다. 6진은 이 두만강 유역을 따라서 배치되어 있었고, 겨울철이 되면 두만강이 얼어붙으면서 하천이 주는 자연적 방어 기능이 없어졌다. 조선으로서는 여진족을 상대로, 두만강의 분산된 방어진들을 수비하는 것이 과제가 되었다. 이에 대한 대응책이 제승방략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제승방략이 언제부터 우리가 아는 형태로 자리를 잡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적을 제압()해서 승리()하기 위한 방법과 계략(方略)”이라는, 그럴싸하지만 모호한 명칭이 언제 처음 나와서 확정되었는지도 명확한 견해가 없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날 제승방략으로 알고 있고, 이 제목으로 전해진 책자에 남은 북방 방어전략이, 조선 초기 세종 때 처음 구상되었고, 중기 무렵에 구체적인 내용을 담은 책자가 만들어져서 전해지고 있다는 것에는 큰 이견이 없다.

 

 

 

 

북쪽 국경을 지키기 위한 상호협조적 방어체계

 

 

1. 적변이 일어난 곳의 여러 장수들은 같은 수령과 변장을 나누어서 소속시킨 것이다. 그렇더라도 군중에 명령계통이 없을 수 없으므로, 관직이 높은 자에게 지휘를 받도록 하며, 우후가 도착하면 우후에게 지휘를 받도록 하고, 절도사가 도착하면 절도사에게 지휘를 받도록 하되, 각 소속된 장수들은 첩보를 사용할 일.

……

1. 어떤 진보에 적의 침입이 있을 때는 좌우에 있는 이웃 진보에서 성을 지킬 군사를 계산해서 남겨두고 정예 군사를 이끌고 즉시 달려가서 구원하는데, 만일 머뭇거리면서 지체하면 스스로 그 군율을 적용할 일.

. 凡生變處諸將等, 以同是守令邊將分屬爲乎乙喩良置. 軍中不可無等級, 是昆職上處受節制爲旀, 虞候到則虞候受節制, 度使到則節度使處受節制爲乎矣. 各其所屬將處用牒呈事.

……

. 某鎭堡有變, 則左右隣鎭堡, 守城軍計除, 率精銳登時馳援爲乎矣, 萬一逗遛, 則自有其律事.

(제승방략2 군무 29(軍務二十九事))

 

제승방략 제도에서 중요한 것은 적의 공격이 발생한 지점에 병력이 집결해서 서로 도와줘야 한다는 것이다. 여진족이 조선의 변경을 침공하는 경우는 대개 소규모 부대로 기습해서 약탈하는 경우였다. 이에 맞서기 위한 방어대책으로 조선은 6진을 비롯해 중요지점에 거점이 되는 진보(鎭堡)를 구축해서 방어부대를 배치하고, 이들이 서로 상호협력할 수 있도록 체계화했다. 공격을 받은 지점은 굳게 수비하고, 그 사이 나머지 진보에서 구원군이 돕도록 한다는 발상이었다. 실제로 현재 남아있는 제승방략에는 이렇게 여진족을 상대로 북방 기지들을 지키며 전투를 벌인 사례들이 수록되어 있다.




사진 : 제승방략1 녹둔도. 1583년 수확이 한창이던 녹둔도를 여진족이 기습했는데, 이 때 조산보 만호로 복무하고 있던 이순신(李舜臣)은 경흥부사 이경록(李景祿)과 함께 목책진지를 지키고, 퇴각하는 적을 추격해서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전사자 10여 명에 포로 160여 명이라는 큰 피해가 발생했기 때문에 이순신은 백의종군을 해야했다.

 

 

북방영토를 지키기 위한 방어계책이었던 제승방략은 을묘왜변 이후 1558~1563년 무렵 제도화되어 한반도 남쪽 지역에도 적용되었다. 북쪽 지역의 분군법에 따라 병력들을 재배치하고, 비상시 후방에서 지원병력이 집결할 곳을 선정한 체계였다. 그리고 현장의 최선임자가 1차적 지휘를 맡도록 한 북도제승방략과는 달리 중앙에서 파견된 지휘관(京將)이 지휘하도록 했다. 대응의 신속성은 좀 떨어지겠지만 지휘권을 명확하게 해주는 장점이 있었다.




사진 :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의 종사관이었던 정경달(丁景達)이 필사본으로 남긴 반곡진법(盤谷陣法). 남도제승방략은 별도의 책자가 남아있지 않고, 대신 이 책에 남은 절제방략(節制方略)이 남쪽 지역에서 시행되었던 남도제승방략의 부분적인 내용으로 추정된다.

 

 

 

 

다른 상대, 다른 상황에서 무용지물이 된 계획

 

 

그런데 남도제승방략의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최종 지휘권은 중앙에서 내려온 경장이 맡는데, 아무리 빨리 대응한다 해도 중앙에서 경장이 파견되는 동안 시간이 걸린다. 그 사이 적이 먼저 나타나면 어떻게 한다는 것일까? 그리고 예비부대가 후방에 집결해서 전방을 지원하는데, 만약 적이 빠르게 진격해서 후방의 집결지를 먼저 공격해서 동원체제 자체를 와해시킨다면? 그리고 애당초 제승방략 체계의 원초적인 약점이 있는데, 만약 적이 대병력을 동원해서 어느 한 곳을 집중적으로 공격해 들어오면, 주변의 병력이 모일 틈도 없이 전선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불행하게도 이 약점들이 임진왜란 때 그대로 찔렸다. 1만 명이 넘는 일본군의 1진이 상륙했을 때, 부산진의 수비 병력은 1천 명도 되지 않았다. 부산진은 그대로 함락되었고, 바로 다음날 5천 명 정도의 군민이 지키고 있던 동래성이 함락되었다. 두 성이 벌어준 시간은 한나절 가량에 불과했다.

그리고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이 때문에 곤욕을 치른 사람이 바로 앞서 북쪽 변경에서 제승방략 체계를 개정했던 이일이었다. 1592417일에 전쟁이 터졌다는 것을 알은 조선 조정은 이일을 순변사로 임명해서 파견했지만, 한성에서 징병이 지체되면서 3일이나 출발이 늦어졌고, 그것도 병력 없이 급하게 떠났다.

문제는 서울에서 내려오는 이일보다 일본군이 더 빨랐다. 그 사이 경상도에서는 경상감사 김수가 경상도 방면 병력의 집결 명령을 내렸고, 해당 병력은 대구로 집결했다. 그러나 가토가 이끄는 일본군 2군과 구로다 나가마사가 이끄는 3군이 대구에 먼저 나타났고, 당황한 조선군은 흩어졌다. 이때 상주지역의 병력도 흩어져서, 이일이 상주에 도착했을 때는 수령과 병력 모두 없는 상황이었다. 이일은 급한 대로 수백 명의 병력을 모아봤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고니시가 지휘하는 1군이 조선군을 덮쳤다. 이일은 간신히 전장에서 목숨만 건져 탈주했고, 조선군은 전멸했다.

 

 

 

 

시대와 상황이 바뀌면 제도도 바뀌어야 한다

 

 

임진왜란에서 나타난 한계로 인해 실패한 제도로 이름이 남았지만, 원래 제승방략은 북방의 여진족을 막기 위해 조선 나름대로 최선의 대책을 세운 것이었다. 그리고 변경을 침입하는 여진족을 상대로 실제적인 효과를 보기도 했다. 그러나 임진왜란이라는 대규모 전면전을 상정한 계획은 아니었고, 일본군이 이 약점을 정확하게 찌르고 들어오면서 조선군은 허망하게 무너졌다.

국가가 운영되기 위해서는 제도가 필요하고, 시대와 상황에 따라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더욱이 국방분야의 제도는 적국의 의도를 예측하고 계획해야 하기 때문에 더욱 주의가 필요하다. 조선이 흔히 알려졌던 것처럼 임진왜란을 대비해 전쟁 준비를 하나도 안 한 것이 아니었지만, “조선 나름대로의 준비였지 알맞은 준비가 아니었던 것이 패착이었고, 그 결과 전국적으로 전쟁의 피해를 입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우리는 종종 제도의 문제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세상에 취지부터 악질인 제도는 별로 없다. 대개는 처음에 제정할 때는 좋은 의도로 정비하고 효과를 거두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황이 변하면서 맞지 않거나 부작용이 점점 커지는 경우이다. 이런 것을 분석할 때 제승방략은 조선 중기에 시행되었던, 실패한 방어체계이다는 식의 기계적 사고는 우리가 본질적인 부분을 볼 수 없도록 호도한다.

우리는 흔히 역사를 통해 배운다고 하고, 역사에서 배우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쉽게 비판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모든 사람이 역사와 경험에서 배운다. 겉보기에 역사는 과거에 발생한 사건에 현자들의 말씀 몇 마디 얹어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는 그것을 넘어서는 고민을 주기 위한 학문이다. 보다 많은 원인과 조건들을 찾아내고, 통찰을 발휘해서 인간의 행동과 제도 속에 숨어있는 요소와 사고의 조건을 찾아내야 한다. 만약 역사적 사고가 너무 어렵거나 애국적으로 느껴진다면, 그것은 역사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역사적 지식과 관념을 다른 방향으로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참고문헌

 

허선도, 1973·1974, 「「制勝方略硏究 (·)-壬辰倭亂 直前 防衛體制實相, 진단학보36·37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99, 국역 제승방략, 세종대왕기념사업회

김병륜, 2017, 「『節制方略으로 본 南道制勝方略 주요 특징의 형성과정과 ‘4체제, 역사와실학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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