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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놈, 바른대로 아뢰지 못할까!'

- 역모사건 수사재판 기록추안급국안


 


사진 : 推案及鞫案(15149) 1책.

 

 

 

 

조선의 통치 : 덕치-법치의 합주곡

 

조선의 건국 목표는 고려의 폐단을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고려시대는 불교가 흥성했기에 승려 세력이 국가 경제를 위태롭게 하고 있었고, 국가 통치의 체제가 체계적으로 잡혀있지 않았다. 이 때문에 신진 사대부들이 체계적으로 운영되는 국가, 그리고 새로운 통치이념에 근거한 국가를 만들고자 한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조선은 유교적 사상에 입각해 국가를 중앙집권적 법치국가로 운영하는 것을 목표로 운영되었다.

유교국가의 기본적인 통치 기조는 덕치였다. 피통치자를 감화시켜서 통치질서에 동참하도록 유도하는 방식이었다. 통치자의 덕성이 훌륭하고 정치가 잘 이루어진다면 모든 백성들이 임금을 따라 덕이 이뤄진 사회를 구현한다는 믿음에 근거한 통치 철학이었다. 중국 고대 사회인 하은주 삼대를 덕치가 구현된 이상사회로 설정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한 각종 노력이 시도되었다.

그러나 현실 사회에서 삼대와 같은 덕치가 성취된 사회는 없었다. 통치세력이 피통치자들을 교화시키려고 노력해도 사회의 규모가 커지고 복잡해질수록 사회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통치세력들은 사회에 약동하는 반통치적 요소를 순화시키기 위한 강제적인 대책을 집행해야만 했다. 법치적 요소를 활용하여 반체제적인 범죄행위를 형사 처벌했고, 그 세력을 사회에서 제거하고자 했다. 조선국가의 통치 이상은 덕치였으나, 통치 실상은 덕치와 법치가 혼합된 합주곡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조선은 전근대 사회였기 때문에 국가제도의 차원에서 현대 자유민주주의 사회와 큰 차이가 있었다. 이는 형사사법제도에서도 마찬가지로 차이를 드러냈다. 현대 사회는 개인의 권리를 중시하는 민주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근대법 체계도 개인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보호하도록 성립되었다. 전근대 사회의 법률 역시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측면이 있었으나, 기본적으로는 통치체제의 운영을 위한 행정법적 특성이 강했다. 조선에서는 법관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고 임금, 관찰사, 수령 등 행정관료가 법관을 겸임했다. 그리고 조선에서는 법률대리인 제도가 존재하지 않았고 당사자가 스스로 변호해야 했다. 한편 태형, 장형 등 신체에 대한 처벌이 자주 행해졌다. 이런 제도적 차이로 인하여 조선의 범죄자는 형사처분을 받는 과정에서 현대 사회의 범죄자와는 다른 방식의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추국청 운영과 추안급국안

 

조선시대 범죄자들은 어떤 과정을 거치면서 벌을 받았을까? 국가는 어떤 기준으로 피의자의 죄를 입증하고 어떠한 처벌체계를 적용하였을까? 이러한 자세한 내용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가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이다. 추안급국안1601(선조 34)~ 1892(고종 29)까지 약 300년간 추국청에서 조사, 심문한 추국기록을 담은 편년 사료이다. 무신란, 을해옥사, 신유박해, 임오군란, 갑신정변 등 중대 반란 사건을 비롯해 전패작변, 왕릉방화 등 왕실의 안녕을 위협하는 중대 사건들 다수가 수록되어 있다. 조선국가의 형사제도에는 다양한 형사기구가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추안급국안을 작성한 추국청은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한성부, 형조, 포도청등의 형사기관이 항상 설치되어 있는 상설 형사기관이었다면, ‘추국청은 특별히 왕명에 의해 설치되는 임시 수사 재판기관으로서 국가의 가장 중요한 사건을 처분하기 위한 기관이었다.

추국의 일반적인 절차는 심문-진술-형문-재심문-자백-결안-처형의 순서로 진행된다. 첫 심문인 평문(平問)에서는 대화로 조사를 진행하고, 첫 심문에서 자백이 나오면 정강이를 매질하며 심문하는 형문(刑問)과 재심문의 절차가 생략되었다. 그러나 정부가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거나 특정 내용을 은폐하려는 시도가 보이면 형문으로 전환하였다. 심문 결과 혐의가 입증되지 않으면 석방되었고, 관련은 있으나 그 사안이 심각하지 않다고 판단되면 유배 등의 처분을 받았으며, 사건과의 연관성이 높다고 판단되는 경우 자백 후 최종판결문인 결안을 작성하고 사형 처분을 받았다.

 

 

 

 

역모 가담자는 어떤 처벌을 받았을까?

 

추안급국안에는 265사건 3,300여 명의 심문기록이 수록되어 있다. 이들의 최종 처분내역을 살펴보면, 33%가량이 석방, 23%가량이 사형을 당했고, 17%가량이 유배를 갔으며, 16%가량이 수사 도중에 사망했다. 이외의 처분 결과인 미상, 도배, 노비화, 징계 등의 처분은 극히 적은 비율을 차지한다. 선조 34(1601)~고종 29(1892)까지 약 300년간 2653,300여 명 심문자의 최종처분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면, 10명 중 3명은 석방되고, 10명 중 2명은 유배되고, 10명 중 4명은 사형당하거나 도중에 사망한 것으로 확인된다.

이 중 중요하게 살펴볼 부분이 16%가량을 차지하고 있는 물고(物故)인데, 물고란 핵심 관련자로 의심을 받고 자백을 강요받으며 형신을 당하는 도중에 사망하는 경우를 말한다. 이들의 대다수의 경우는 정강이를 때리는 신장(訊杖), 무릎을 짓누르는 압슬형(壓膝刑), 인두로 살을 지지는 낙형(烙刑) 등을 당하고 상처가 덧나 사망하였다. 그렇다면 왜 사람을 죽이면서까지 수사를 했을까?

조선시대에는 피의자를 자백을 받아내기 위한 신체고문 관행이 있었다. 우리가 드라마를 보면서 자주 보는 장면 중에 하얀 옷을 입은 죄인에게 네 죄를 네가 알렸다.’, ‘네 이놈! 바른대로 아뢰지 못할까?’라고 윽박지르며 고문하는 장면이 있다. 조선 시대에는 자백이 가장 중요한 범죄 입증 근거로 여겨졌다. 자백은 범인이 자신의 죄를 실토하고 뉘우친다는 도덕적인 의미가 있는 것으로 전근대 시기에는 조선뿐 아니라 전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자백을 최고의 범죄입증근거로 채택하였다.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선 여러 가지 방법이 활용되었는데, 그중에서도 신체에 고통을 가해 자백을 유도하는 고문 방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문 방식에는 법전에 공식적으로 수록된 공식적 고문이 있었고, 법전에는 수록되지 않은 가운데 비공식적으로 행해지는 고문 방식이 있었다. 가장 일반적으로 활용되는 공식적인 고문은 신장(訊杖)’을 가하는 형문이었다. 정강이를 몽둥이로 때리는 방식인데, 한 번에 30대 이상 때릴 수 없었고 한번 때린 후에는 3일이 지나야 다시 때릴 수 있도록 규정하였다. 하지만 실제 사례를 살펴보면 하루에도 30대가 넘는 신장을 가한 경우가 많고, 3일이 지나기 전에 신장을 다시 가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편 비공식적인 고문방식도 있었다. 압슬형, 낙형과 같은 고문이 이에 해당하는데, 이들은 공식적으로 법전에 규정되지는 않았지만, 추국청에서 공공연하게 활용되었다. 추안급국안에는 압슬형, 낙형을 당한 사례가 풍부히 수록되어 있다. 무릎 위에 나무판자를 올리고 누르는 방식이 압슬형이고, 뜨겁게 지진 인두로 살을 지지는 방식이 낙형이다. 위의 고문들은 사람에게 극심한 고통을 주어 자백을 유도하는 방법이었다.

모든 죄인에게 무차별적으로 비공식적인 고문한 것은 아니었다. 추안급국안전체 3,300여 명의 피심문자 중 총 160여 명에 대한 압슬형, 낙형 집행 기록이 확인된다. 이들은 주로 사건의 주동자이면서 사건의 비밀을 잘 알고 있는 대상이었다. 몇 차례 신장이라는 공식적인 고문을 가한 후에도 국가가 원하는 대답을 하지 않는 경우 비공식적 고문을 진행하였다. 고문 집행을 결정하는 권한은 오로지 국왕에게 있었다. 기타 대신이나 형조 관리들도 압슬형, 낙형 고문을 권하거나 시행할 수 없었고, 국왕의 결정 하에만 집행이 결정되었다.

이처럼 압슬형, 낙형을 당한 사람들은 중대한 혐의를 받는 사람이었는데, 최종적으로는 어떤 처분을 받았을까? 압슬형, 낙형을 당한 피심문자들의 경우 대부분 사형 또는 물고에 이르렀다. 실제로 추안급국안에 기록된 압슬형, 낙형을 당한 사람 159명 중 81명이 심문 도중에 사망하고, 62명이 처형당하였다. 최종 기록이 알려지지 않은 12명 역시 대체로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실제로 살아남은 사람은 유배 3, 포도청으로 이송된 1명에 불과하다. 비율적으로 보면 압슬형이나 낙형을 당하면 살아남을 확률은 3%가량에 불과하며 대부분의 사람은 죽게 되었다는 것이다.

조선 사회에서 가장 파장이 컸던 고문 사례는 1689(숙종 15) 기사환국에서의 박태보 고문치사 사건이다. 박태보는 서인 출신의 강직한 성품을 가진 인물로서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숙종의 분노를 일으켜 추국청으로 소환되었다. 박태보가 어떤 과정으로 고문을 당했는지 살펴보자.




사진 : 추안급국안102, 11쪽.



위의 자료를 살펴보면 진행 과정을 알 수 있다. 먼저 이미 박태보는 형문을 2차례, 압슬형을 1차례 당한 상황에서 살을 뜨거운 인두로 지지는 낙형을 당하였다. 그러나 박태보가 원하는 대답을 하지 않자, 숙종 임금이 다시 낙형을 가하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낙형을 1차례 더 추가하였으나 역시 원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처럼 박태보는 짧은 기간 안에 수차례의 신장, 압슬형과 낙형을 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임금을 위한 직언을 멈추지 않았다. 사형을 할 죄목에 해당되지 않아 사형당하지는 않았지만 짧은 시간에 반복적으로 행한 고문으로 인해 상처가 덧났고, 유배를 가는 도중에 사망하였다. 이때의 숙종 임금의 분노, 박태보의 충절 그리고 잔혹한 고문 상황은 소설 박태보전, 인현왕후전으로 상세히 기록되어 전국에 전파되었다.

 

 

 

 

18세기 탕평정치와 잔혹한 고문의 퇴조

 

현대인은 헌법에 의해 신체고문을 당하지 않을 권리를 보장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사정권 시기에는 많은 민주화 투사들이 국가로부터 물고문, 전기고문 등 비공식적인 고문을 당하였고, 그로 인한 신체적 정신적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나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비공식적 고문마저 모두 철폐되어 한 개인으로서의 법적인 권리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조선 시기 사람들은 근대 사회가 되기 이전까지 지속해서 신체고문에 시달려왔던가?

18세기 조선 사회는 이른바 탕평정치의 시대로 불린다. 영조, 정조라는 유능한 군주가 당쟁으로 얼룩진 정치구조를 개혁하고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친 시기로 잘 알려져 있다. 비공식적인 고문 역시 영조, 정조 시기를 거치면서 점차적으로 금지되기 시작했다. 무릎을 짓누르는 압슬형(영조즉위년), 다리 사이에 나무막대를 넣어 짓누르는 전도주뢰형(영조 8), 인두로 살을 지지는 낙형(영조 9), 얼굴에 문신을 새기는 자자형(영조 16), 여러 명이 동시에 구타하는 난장형(영조 46) 등 차례차례 잔혹한 형벌들을 금지시켰다. 이러한 조치들로 인하여 정조 시기 이후에는 추안급국안에 신장을 제외한 불법적인 고문 기록이 등장하지 않게 되었다. 한편 공식적인 고문인 신장 역시 제도 정비를 통해 무차별적인 남용이 금지되었다. 정조는 형구의 규정을 명시한 흠휼전칙(정조 2)을 반포하여 관리의 형장 남용을 방지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탕평정치기 임금들의 조치는 백성들이 억울하게 생명에 피해를 보지 않도록 하려는 방안이었다. 백성을 사랑했던 탕평군주의 정신과 그 정치적 의미를 다시 한번 새겨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심희기, 1997, 18세기의 형사사법제도 개혁」 『한국문화20

심재우, 1995, 18세기 옥송의 성격과 형정운영의 변화」 『한국사론34

심재우, 2003, 조선시대 법전(法曲) 편찬과 형사정책(刑事政策)의 변화」 『진단학보96.

조윤선, 2009, 영조대(英祖代) 남형·혹형 폐지 과정의 실태와 흠휼책(欽恤策)에 대한 평가, 조선시대사학보48

이하경, 2018, 조선후기 추국장의 정치적 의미 - 영조 13(1737) 김성탁 사건을 중심으로」 『한국학연구50.

정진혁, 2022, 조선후기 말세론 사건에 대한 추국청의 형사 대응」 『한국사연구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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