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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가장 오래된 역사책의 역사(歷史) -

 
 
 
 


사진 : 삼국사기(奎貴3614-v.1-10)

 

 

고구려, 백제, 신라 등 한국 고대 사회를 탐구하는 데 있어 가장 기본이 되는 자료는 바로 삼국사기이다. 또한, 우리는 아주 어릴 적부터 현재 남아 있는 역사책 중 가장 오래된 것이 바로 삼국사기(三國史記)라고 배워왔다. 삼국사기는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을까. 우선 삼국사기의 구성을 먼저 살펴보자.

삼국사기는 김부식(金富軾)이 왕명에 따라 참고(參考)’라는 직을 가진 8명의 조수와 함께 편찬해 고려의 제17대 왕인 인종(仁宗) 23(1145)에 완성한 책이다. 삼국사기의 분량은 총 50권에 이르며 본기(本紀), 연표(年表), 잡지(雜志), 열전(列傳)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와 같은 역사의 서술 체재(體裁)는 사마천(司馬遷)사기(史記)로부터 시작된 방식으로 기전체(紀傳體)라고 불린다.

삼국사기의 본기는 총 28권으로 신라본기 12, 고구려본기 10, 백제본기 6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숫자로만 본다면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신라가 중요하게 다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삼국을 통일한 신라 왕조의 역사가 가장 오래 지속되었다는 것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앞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본기는 왕의 사적을 중심으로 국가의 정치 문제나 전쟁, 기후, 천문 현상 등을 기록한 것인데 기록의 순서는 연(()에 따랐으며 춘···동의 계절도 함께 기록해두었다. 특히, 비교적 서술이 자세한 신라본기에서는 날짜까지 기록되어 있는 사건들도 종종 확인할 수 있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은 건국 이후 7세기 중반까지 병존하는 동안 서로 다양한 관계를 맺어왔다. 이처럼 삼국 중 2개 혹은 3개 이상의 국가가 관련된 내용은 하나의 국가의 본기에만 기록되지 않고 해당 국가의 본기에 이중 혹은 삼중으로 기록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삼국사기본기의 기록을 3권의 연표(年表)와 비교해서 살펴보면 더욱 흥미롭다. 삼국사기의 연표는 간지를 기준으로 하여 중국 및 삼국의 연대, 각국 왕의 즉위 시기·재위 기간·사망 연대, 왕의 성과 이름, 연호 등의 정보는 물론 왕실의 혈통이나 국가의 멸망 과정 등도 아울러 서술하고 있다. 그런데 연표와 본기의 서술이 다른 부분이 종종 확인된다. 대표적으로 신라본기에는 태종 무열왕으로 기술되지만 연표에서는 태종왕으로 기술되어 있거나 고구려본기에는 태조대왕을 주로 사용한 것에 비해 연표에서는 태조대왕의 다른 호칭인 국조왕을 여러 번 사용한 것을 사례로 들 수 있겠다. 이러한 사례는 뒤에서 자세히 서술하겠지만 삼국사기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자료들이 사용되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에서의 ()’는 통치제도, 지리, 자연현상 등 여러 제도와 문물을 자세하게 다루고 있으며 이후의 중국 역사책의 역시 그러하다. 그런데 삼국사기의 경우 중국 정사(正史)의 여러 역사책과는 달리 자료가 부족하여 다양한 주제로 ()’를 구성할 수 없었던 데다가 하나의 권 안에 여러 주제가 포함되어 있어 잡지(雜志)’라고 불렀던 것이다. 삼국사기의 잡지 9권 중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또 자세히 서술되고 있는 것은 바로 지리에 관한 내용이다. 지리 정보는 곧 국가의 영토에 관한 정보이기에 국가를 통치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이고도 중요한 정보이므로 총 4권에 걸쳐 지리와 관련된 사항을 서술하였던 것이다. 또한, 지리지에 기록된 지명 자료를 통해 다양한 연구도 가능하다. 본기와의 비교 연구를 통한 삼국사기원전 자료 탐구는 물론 남아 있는 지명 자료를 통해 고구려·백제·신라의 언어를 연구할 수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10권의 열전을 통해 삼국사기는 국가의 영웅이나 큰 공적을 남긴 인물, 당대에 유명했던 문장가, 특이한 행적을 보인 인물은 물론 반역자까지도 자세히 서술해두었다. 중국과는 달리 별도의 명칭을 붙여서 분류하지는 않았지만 서술 양상을 볼 때 유사한 성격을 가진 인물을 한 권으로 묶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열전 10권 중 무려 3권을 김유신에 대해 서술하기 위해 사용하였던 것은 삼국통일의 주역 중 하나였던 김유신의 위상을 짐작하게 한다.

 

 

 

 

 

삼국사기속 또 다른 역사책[舊三國史]의 흔적 찾기

 

일찍부터 삼국사기를 편찬하는데 다양한 전거자료가 사용되었음이 지적되었다. 세세한 부분은 연구자별로 다르지만 삼국사기의 전거자료로 국내의 고유사료와 중국의 사료가 이용되었다는 것에는 대체로 동의가 이루어졌으며 본기나 잡지 각각의 원전(原典) 자료의 종류와 층위 등 더욱 세밀한 연구도 이루어졌다.

삼국사기에 이용된 국내의 고유사료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우선 주목되는 것은 바로 고기(古記)”라는 표현이다. 현재 남아 있는 삼국사기의 판본은 조선시대에 간행된 것이므로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인종에게 바치며 함께 올린 글, 일명 진삼국사기표(進三國史記表)는 붙어 있지 않지만, 해당 내용이 조선시대에 편찬된 동문선(東文選)에 남아 있다. 그런데 김부식은 진삼국사기표에서 왕의 말을 인용하며 옛 기록, , “고기(古記)”를 언급하고 있다.

 

 

 


사진 : 동문선(東文選)(11881-v.1-45 17156, 157)

 
 
 

그런데 이러한 삼국에 대한 옛 기록[古記]’은 단순히 옛날 기록을 말하는 것 같지 않다. 오히려 지금은 남아 있지 않지만 삼국사기편찬 당시까지는 확인할 수 있었던 특정한 역사책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진삼국사기표가 아닌 삼국사기내에서도 고기16회 정도 인용되는데, 그 등장 형태는 해동고기, 본국고기, 신라고기, 제고기(諸古記), 고전기등으로 다양하다. 물론 이처럼 서로 다른 이름을 가졌다고 하여 모두 다른 역사책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 삼국사기내에서 동일한 역사책을 언급하면서 다양한 명칭으로 서술하는 사례가 확인되기 때문이다. 신당서(新唐書)송기신서(宋祁新書), 신서, 송기당서등으로도 불리는 하나의 예이다. 다만, 인용되는 방식 혹은 관련 내용을 통해 볼 때 고기중 다수의 경우는 고려 초에 편찬된, 신라 말까지의 역사를 포함하여 삼국의 역사를 전부 아우른 역사책을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견이 있기는 하나 이처럼 고려 초에 정리 및 편찬된 역사책은 구삼국사(舊三國史)로 불리는 경우가 많다. 구삼국사라는 명칭은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서 처음 확인된다. 이규보는 동국이상국집동명왕편(東明王篇)에서 자신이 구삼국사동명왕본기(東明王本紀)를 보았으며 그 기록이 김부식의 삼국사기보다 훨씬 자세하고 특히 신이(神異)”한 내용이 많았다고 언급하고 있다. 아마도 고려 초에 정리 및 편찬되었을 삼국의 역사는 현재 남아 있는 삼국사기와는 다른 내용이 많이 담겨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를 현재는 확인할 수 없어 아쉬울 따름이다.

물론 삼국사기를 구성하고 있는 자료의 층위가 매우 다양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인용되고 있는 모든 고기를 곧 구삼국사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단지 다양한 자료들로 구성되었던 고기구삼국사가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였다는 정도만 추정가능할 것이다. , 삼국사기구삼국사와 당시에는 존재했을 또 다른 국내 고유의 기록들을 기반으로 하여 편찬되었을 것이다. 김유신비문과 같은 금석문 자료 또한 중요한 원전 자료였다. 이에 더하여 삼국사기구당서(舊唐書)신당서(新唐書)등을 비롯한 중국의 여러 역사책들을 이용하여 기록이 부족한 부분들을 채워넣기도 했다. 정리하자면 삼국사기는 국내외의 여러 자료들을 망라하여 편찬되었던 것이다.

 

 

 

 

 

신기하고 이상한[神異] 역사를 넘어

 

왕명을 받아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에 대해서는 다소 야박한 평가가 이루어져 왔다. 단재 신채호의 평가가 대표적인데, 묘청을 고구려 계승으로, 김부식을 신라 계승으로 파악하는 속에서 김부식이 승리하며 한국사의 전개가 사대적보수적유교적으로 전개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근현대 역사학에도 큰 영향을 미쳐 삼국사기의 성격 자체가 평가절하되기도 했다. 또한, 삼국사기의 편찬 과정에서 고구려사를 중시한 구삼국사의 흔적이 은폐되었다는 논리가 등장하기도 했다. 이는 삼국사기초기 기사에 대한 불신론과 맞물리며 삼국사기의 사료적 가치를 흔들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서 읽어낼 수 있는 편찬자의 역사적 인식은 현대적 관점이 아니라 편찬 당시의 맥락에서 판단되어야 한다는 점 등이 지적되며 삼국사기의 가치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김부식이 중국을 모화한 것이나 유교적 사관을 도입한 것이 당시의 관점에서는 문화의 자긍심을 높일 수 있는 한 방안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유교적 관점을 도입하여 역사를 재정리함으로써 신이(神異)’하다는 표현으로 압축될 수 있는 고대 사회의 역사 서술 방식을 넘어 중세 사회의 역사 서술로 나아갔다는 평가도 가능할 것이다. 당연하게도 김부식이 구삼국사의 내용을 은폐할 특별한 이유를 찾을 수 없기도 하다다.

다시 한번 진삼국사기표에 주목해보자. 김부식은 진삼국사기표을 통해 삼국에 관한 옛 기록[古記]’로 불렸던 여러 역사책들의 기록이 거칠고 부족하기 때문에 삼국사기를 편찬하였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다시 말해, 새로운 역사관 아래에서 당시 존재하던 여러 역사책을 이용하되 해당 역사책들의 문제점을 수정하고 금석문, 중국의 역사책 등 다양한 자료를 이용하여 보완한 끝에 탄생한 것이 바로 삼국사기였던 것이다. 결국 삼국사기는 한국 고대사 연구를 위한 핵심 자료이며 동시에 한국 중세(中世) 역사학의 시작점이기도 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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