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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三國遺事)

- 베일에 둘러싸인 역작(力作) -

 


사진 : 삼국유사 (古貴951.03-Il9s-v.1-2)

 

 

 

 

1. 상식과 진실, 그 사이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이라는 동요를 기억하는가. 한국인이라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수십 번쯤 들었을 이 동요의 2절은 다음과 같이 끝난다.

 

해동공자 최충, 삼국유사 일연, 역사는 흐른다.”

 

주문과도 같은 말 삼국유사 일연”. 초등학생 시절 혹은 그 이전부터 우리는 현전하는 역사서 가운데 단군신화를 수록한 최고(最古)의 역사서가 삼국유사(三國遺事)이며 저자는 고려후기 스님 일연(一然, 1206~1289)이라는 사실을 배운다. 주입식 교육의 성과 덕분에 길을 지나가는 그 누구를 붙잡고 물어보더라도 삼국유사의 저자가 일연임을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모두가 공유하는 이 상식(常識)은 과연 진실일까?

 

 

 

 

 

2. 삼국유사의 기묘한 구성

 

삼국유사은 총 5권이며 왕력(王曆), 기이(紀異), 흥법(興法), 탑상(塔像), 의해(義解), 신주(神呪), 감통(感通), 피은(避隱), 효선(孝善)의 아홉 개 편목으로 나뉘어 있다. 1편 왕력은 고구려·백제·신라·가야 등의 역사를 동시기 중국과 비교하여 도표화 한 연표이다. 2편 기이는 고조선부터 시작된 우리나라의 역사를 나라와 왕대별로 정리한 역사서로서 왕조사의 성격을 강하게 갖는다. 3편 흥법 이하는 불교 관련 기록들을 담았기 때문에 흔히 주제사 또는 불교사로 규정된다.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3에 수록된 제3편 흥법과 제4편 탑상은 각각 고구려·백제·신라에 불교가 전래된 과정과 석탑··불상 등의 종교 건축물 또는 유물과 관련된 설화를 전한다. 4는 제5편 의해 한 편만을 수록하고 있으며 고승전(高僧傳), 즉 우리나라 명승(名僧)들의 전기문 성격을 갖는다. 5에는 제6편 신주부터 제9편 효선까지 가장 많은 편이 수록되어 있다. 신주는 불교의 다양한 종파 가운데에서 가장 신비적·주술적 면모를 보이는 밀교(密敎)와 관련되어 있고, 감통은 지극한 신앙심과 선행으로 신이나 세상을 감동시킨 사례들을 담고 있다. 피은은 혼란한 세상을 피해 은거한 사람들의 설화를, 효선은 다양한 계층의 효행과 관련된 설화를 전한다.

이제 왜 삼국유사의 권3부터 설명하였는지 의문을 갖는 독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삼국유사의 기묘한 구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삼국유사1과 권2는 통일적이지 못한 체제, 연구자에 따라 오류라고 의심할 만한 부분(기이가 제2편이 아니라 제1편으로 기재됨)으로 인하여 저자·작성연대·출판시기 등과 연관된 많은 이설(異說)을 양산하고 있는데, 어떠한 이설을 취하는가에 따라 권1과 권2를 나누는 방식이 달라진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의 삼국유사(正德本, 古貴951.03-Il9s-v.1-2) 1에서 제1편 왕력과 제2편 기이의 첫 번째 장, 아울러 권1의 마지막 장과 권2의 첫 번째 장을 아래 그림으로 살펴보자.

 

 

          

 <그림1> 1편 왕력의 첫 장(1, 002a)          <그림2> 2편 기이의 첫 장(1, 017a)

 

 


          

 <그림3> 1의 마지막장(1, 053b)               <그림4> 2의 첫 번째 장(1, 054a)

 



<그림1>은 왕력의 첫 장이자 삼국유사의 서두이다. 가장 오른쪽에 삼국유사왕력제일(三國遺事王曆第一)”이라는 문장이 눈에 들어온다. <그림2>에서는 오른쪽의 기이권제1(紀異卷第一)”, <그림3>에서는 왼쪽의 삼국유사권제1(三國遺事卷第一)”, <그림4>에서는 삼국유사권제2(三國遺事卷第二)”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만약 책을 간행할 당시 의도적으로 권1에 왕력과 기이 두 편을 모두 수록하였다면, <그림1>에서는 가장 오른쪽에 삼국유사권제1(三國遺事卷第一)”을 기재하고 그 다음 줄에 왕력제1(王曆第一)”을 따로 썼어야 한다. 그리고 <그림2>에서는 이라는 글자를 빼고 편수도 고쳐서 기이제2(紀異第二)”라고 썼어야만 한다. 실제로 권3부터 권5까지는 모두 이러한 방식을 따른다.

1과 권2의 불완전성 때문에, 왕력과 기이를 어디에 배치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명쾌한 답변을 내리기는 어렵다. 삼국유사가 일연의 단독 저서임을 의심하지 않았던 옛날 연구자들은 당연히 일연이 권1에 제1편 왕력과 제2편 기이 전반부를 넣고 권2에 기이 후반부를 배치한 것이라고 믿었다. 조선시대 삼국유사를 간행했던 유학자들이 삼국유사의 가치를 폄훼하고 대충 간행했기 때문에 단순 오류가 발생한 것이라고 본 것이다. 반면에 최근 연구자들은 대체로 별개의 책이었던 왕력이 나중에 추가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1에 제1편 기이를 수록하고 권2에 제2편 기이를 수록한 최초의 삼국유사가 있었는데 후대에 제3자가 왕력을 권1 앞에 부록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연구자도 있고, 일연이 처음에 권1에 제1편 기이를 배치하여 삼국유사를 만들었다가 별개의 책인 왕력을 권1에 추가 삽입하면서 편집상 오류를 범하였다고 추정하는 연구자도 있다.


 

 

 

 

 

3. 발간과 유통

 

삼국유사의 구성상 문제, 이에 대한 연구자들의 이설들을 장황하게 설명하였으나 사실 어느 누구도 정답을 알지 못한다. 삼국유사원본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삼국유사는 조선 건국 이후 여러 차례 목판 인쇄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나마도 다섯 권이 온전하게 남아있는 것은 조선중기 판본이다. 정덕본(正德本) 또는 임신본으로 널리 알려진 이 판본은 1512(중종 7) 경주부윤(慶州府尹) 이계복(李繼福)의 주도로 경주에서 간행된 것이다.

조선초기에 간행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고판본(古版本)도 여러 종류 남아있다. 석남본(石南本), 이산본(泥山本), 조종업본(趙鍾業本), 범어사본(梵魚寺本), 송은본(松隱本), 파른본이 그것이다. 안타까운 사실은 현재까지 알려진 6종의 고판본 가운데 삼국유사전질은 한 종도 없으며 각 판본이 간행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연대 또한 조선초를 넘어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여러 연구자들이 고려말부터 삼국유사가 유통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하지만 현재로서는 고려시대 판본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때문에 삼국유사의 원형(原形)을 찾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이라고 볼 수 있다.

 

 

 

 

 

4. 어디까지 진실일까

 

현전하는 한국의 역사서 가운데 가장 오래된 책은 삼국사기(三國史記)이지만, 단군신화를 수록한 최고(最古)의 역사서는 삼국유사로 알려져 있다. 삼국시대보다 훨씬 이전 고조선이라는 국가가 존재하였음을 밝히고 고조선 이래 고려까지 이어져 온 다양한 국가의 흐름을 체계적으로 정립한 책은 삼국유사가 최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삼국사기가 배제한 고조선의 역사를 삼국유사에서 포함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기이편의 서문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대저 옛 성인(聖人)은 바야흐로 예악(禮樂)으로 나라를 일으키고

인의(仁義)로 가르침을 베풀 적에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말한 만하지 못한 것으로 두었다.

그러나 제왕이 장차 흥할 때 부명(符命)에 응하거나 

도록(圖籙)을 받음에 반드시 남들과 다른 바가 있은 연후에야

(중략)

삼국의 시조가 모두 신이(神異)한 데에서 나온 것을 어찌 족히 괴이하게 여기겠는가 

 

 

제목에 명기되어 있듯 삼국유사는 유사(遺史), 즉 남겨진(버려진) 역사이다. 무엇에 대한 유사였는가를 두고도 이설은 분분하지만, 확실한 것은 삼국사기와 같은 기존 정사(正史)에 수록되지 못하고 버려진 이야기들이나 항간에 떠돌던 이야기들을 수록하는 것이 삼국유사의 편찬 목적 중 하나였다는 사실이다. 기이편 서문을 보면, 기존 역사서술에서는 괴상하고 신기한 이야기[怪力亂神]들을 언급할 만한 가치도 없는 것으로 치부하였으나 이러한 이야기 속에도 진실이 담겨 있으므로 기록해두어야만 한다는 저자의 신념을 확인할 수 있다.

삼국유사는 대체로 정사에서 공인되지 않은 역사, 설화적 요소가 가득한 역사를 담고 있다. 유교의 합리주의적 역사관에 걸맞지 않아 버려질 수밖에 없었던 한국 토속의 역사를 현재까지 전수해준 유일무이한 책이 바로 삼국유사. 이러한 점에서 최남선(崔南善)과 같은 근대 역사학·고전학 연구자들은 삼국유사를 통해 고대문화의 원형을 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최근 연구자들은 삼국유사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태도를 경계한다. 삼국유사안에 여러 지역에서 수집된 고문서, 비문, 또는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 옛 책[古記]의 일부가 직접 인용되어 있으나, 어디까지나 고려말에 취사선택 및 편집되어 수록된 것이기 때문에 이들 자료를 고대문화의 원형으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삼국유사에는 저자의 개인적 경험에 기반한 서술도 확인되기 때문에 역사서로서의 객관성이 삼국사기에 비하여 현격히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여타 문헌자료나 고고학 자료와의 교차검토를 토대로 삼국유사에서 사료로서의 가치를 갖는 자료를 엄밀하게 간추려낼 필요가 있다.

 

 

 

 

 

5. 다음 처음으로, 삼국유사의 저자 문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삼국유사의 저자 문제를 살펴보자. 지금까지 설명한 삼국유사의 기묘한 구성, 발간 및 유통 과정 모두 최종적으로는 저자가 누구인가라는 문제로 수렴된다.

그 동안 많은 사람들이 의심의 여지없이 삼국유사의 저자를 일연으로 지목해왔으나, 사실 전체 다섯 권 가운데 저자의 이름을 명시한 것은 권5 한 권뿐이다. 5의 첫머리에만 국존 조계종 가지산하 인각사주지 원경충소대선사 일연 찬(國尊 曹溪宗 迦智山下 麟角寺住持 圓鏡冲照大禪師 一然 撰)”이라는 문장이 등장하여, 일연이 국존에 임명된 이후 인각사 주지를 역임하며 삼국유사 권5를 찬술하였다는 정보를 전달한다. 이 시기는 1280년대 중후반, 즉 일연의 말년에 해당한다. 5를 제외한 나머지 권들에는 저자의 정보가 전혀 기재되어 있지 않다.

 

 

<그림5> 5의 첫 번째 장(2, 089a)

 


독자들 가운데에는 나머지 권도 일연이 저술하였으나 매 권마다 저자 정보를 남기는 것이 번거로워 마지막 권에만 남긴 것이 아닐까 추측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아쉽게도 이러한 추측 또한 다음의 반증(反證)들로 인하여 부정된다.

첫째, 삼국유사안에는 일연의 제자였던 무극(無極)의 문장[無極記]들이 확인된다. 무극은 보감국사(寶鑑國師) 혼구(混丘, 1250~1322)라는 승려로, 일연이 사망할 때까지 청분(淸玢)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다가 1290년대 후반에서 1300년대 초반 비로소 무극이라는 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둘째, 공식적으로 확인된 삼국유사의 두 저자 일연과 무극 모두 각자의 저서에서는 매 권마다 첫머리에 저자 정보를 기록하였다. 이러한 두 사람이 삼국유사에서만 마지막 권 첫머리에 저자 정보를 기록했다는 점은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셋째, 일연과 무극의 비문에 기재된 저서 목록 가운데 삼국유사가 확인되지 않는다. 이는 일연과 무극이 현전하는 삼국유사의 아홉 편 중 일부를 쓴 것은 사실이지만 두 사람이 저술한 부분이 그들 생시 아직 삼국유사라는 제목으로 묶이지 않았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최근에는 삼국유사의 저자가 복수였다고 추정하는 입장이 우세하다. 일연과 그 제자들의 공동작업 결과물이었다고 보는 설, 일연과 제자들 외에 제3자가 참여하였을 것이라고 보는 설, 심지어 삼국유사는 왕력편, 기이편, 흥법이하편으로 구성된 세 개의 서로 다른 책을 하나로 묶은 미완성작이라는 설 등등 복수 저자의 정체를 추정하는 견해도 다양하다. 물론 삼국유사를 여전히 일연 개인의 저작으로 보는 입장도 있다. 무극기와 같은 후대의 가필(加筆)은 스승의 글을 받들면서 제자가 약간의 첨언을 하는 문화가 있었기 때문에 나타났던 것이며, 비문에서도 서명이 명확히 기재되지 않은 기타 수백권의 책삼국유사가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단독저자설을 주장하는 연구자 또한 왕력은 일연의 저작이 아닐 것으로 추정한다. 별도로 성립되어 있던 왕력을 일연이 삼국유사안에 편입시켰다고 보는 것이다.

주문과도 같은 말 삼국유사 일연”. 몽골과의 전쟁으로 피폐해진 고려에서 일연이라는 스님이 민족정신을 고취하기 위하여 삼국유사를 썼다는 그간의 추정. 이러한 말들은 결국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고 볼 수 있다. 삼국유사의 저자와 작성연대, 저술목적 등등 그 무엇 하나 명쾌한 해답을 내릴 수 있는 문제는 없다. 한국인에게 이토록 많은 영향을 미치고 이토록 큰 감흥을 안겨 주면서 이토록 겹겹이 베일에 싸여있는 책이 과연 또 있을까.

 
 
 
 
 
 

 

 

 

 

참고문헌

 

김상현, 1982 「《三國遺事刊行流通」 『한국사연구38

김상현, 2013 삼국유사 고판본과 파른본의 위상」 『동방학지162

김철준, 1976 蒙古服屬期間史學性格三國遺事」 『한국학논집4

남권희, 2015 「『三國遺事諸版本의 서지적 분석」 『한국고대사연구79

남동신, 2007 「『三國遺事史書로서의 특성」 『불교학연구16

남동신, 2019 「『三國遺事의 성립사 연구: 紀異를 중심으로」 『한국사상사학61

하정룡, 2003 1394年以前流通三國遺事에 대하여」 『한국상고사학보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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