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장각의 토대를 마련한 서명응
김문식 (단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사도세자와 정조를 가르친 스승 서명응(1716~1787)과 사도세자의 인연은 1747년(영조 23)에 시작되었다. 이 때 서명응은 동궁을 호위하는 세자익위사의 세마洗馬로 임명되어 사도세자를 보좌했다. 1754년에 사간원 정언 서명응은 사도세자에게 학문과 정치의 방략을 요약하여 제시한 「진치법서進治法書」를 올렸다. 당시 사도세자는 영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을 하고 있었다. 서명응은 이 글에서 ‘세자의 뜻을 크게 펼쳐라[奮睿志]’라는 취지하에 강학을 밝히고, 성실함에 힘쓰며, 안일해 지려는 욕구를 경계하고, 간언을 받아들이는 길을 넓히라고 제안했다. 또한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하면서 국가 전례를 바로잡고, 학교를 일으키며, 관리의 선발제도를 고치고, 전쟁 능력을 키우라고 조언했다. 서명응이 올린 글은 좋은 평가를 받았고『영조실록』에는 그 전문이 수록되었다. 최초의 규장각 제학 1776년 국왕이 된 정조는 창덕궁 후원에 규장각을 창설하고, 서명응을 규장각 제학에 임명했다. 당시 서명응은 평안감사로 있으면서 규장각 제학을 겸했다. 정조는 지방관이 관문전觀文殿의 태학사太學士를 겸했던 송나라의 고사를 거론하며 서명응을 특별히 발탁했다.
우리나라는 세종 조에 만든 활자가 국가를 전하는 부서符瑞가 된다. 아름다운 옥구슬처럼 모양이 고르고 반듯하여, 인쇄해 낸 책이 몇 백만 권인지 모르고, 길러낸 인재가 몇 천 명인지를 모른다. 여러 번의 전쟁을 거쳤어도 끝내 없어지지 않고 국가와 운명을 같이 했다. (중략) 그러나 활자가 전해진지 오래되고 지키는 사람이 잘 보관하지 못해 유실된 것이 열에 여덟아홉이다. 우리 성상[정조]께서 춘궁春宮에 있을 때부터 이를 개탄하고 임진년(1772)에 빈객으로 있던 신 서명응에게 명하여 대조大朝[영조]께 말씀드려 세종조의 활자를 주조했던 목본木本 3만여 자를 찾아내게 했다. 또 궁중에 보관하던 고본古本 『심경』 5질을 하사하여 그 유무를 따져 15만 자를 보충하여 주조하게 했다. 이제 왕위에 올라 규장각을 창립하고 신 서명응을 각신에 임명하며 교시하시기를 “규장각은 책을 보관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마땅히 인쇄하는 도구(활자)가 있어야 좋은 혜택이 사방에 미치고 사람들의 지식을 계발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그리고 평안감영에 활자의 개주를 명령하여 새로 15만 자를 주조하고 규장각에 보관하게 하시니, 이 때 내각과 외각에서 전후로 주조한 것이 모두 30여만 자였다.
[『보만재집保晩齋集』 권8, 「규장자서기奎章字瑞記」]
1777년에 서명응은 국립 출판소에 해당하는 교서관을 규장각에 합속시켜 규장각의 출판 기능을 강화하였다. 서명응은 교서관을 규장각의 외각으로 만들어 창덕궁에서 가까운 곳으로 이전시켰고, 규장각의 관리가 교서관의 관리를 겸하여 그 운영을 주관하게 했다. 당시 정조는 홍문관의 대제학이 교서관의 제조를 겸하게 하자는 견해를 보였다. 그러나 서명응은 자신의 견해를 끝까지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규장각과의 긴밀한 인연은 서명응의 후손에게 이어졌다. 맏아들 서호수는 1777년에 북경에서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을 구입해 왔고, 1780년(정조 4)에 규장각 직제학에 임명되어 활동했다. 둘째 아들 서형수는 1783년에 규장각 초계문신으로 선발되었고, 1799년에는 정조의 명으로 북경에 가서 『주자대전朱子大全』과 『주자어류朱子語類』의 선본善本을 구입해 왔다. 손자 서유구徐有?는 1790년에 규장각 초계문신에 선발되어 학문을 수련하다가 1792년에 규장각 대교待敎에 임명되어 국가적 편찬 사업에 참여했으며, 순조 대에 규장각 제학을 역임했다. 서명응은 역학易學에서 독특한 견해를 가졌으며, 서호수는 천문학, 서형수는 경학과 주자학, 서유구는 농학 분야에서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 영조와 정조의 어제를 정리한 서명응 서명응은 1778년에 대제학으로 있으면서 『영조실록』을 편찬하는 임무를 겸했다. 그러다가 서명응은 실록 편찬의 책임에서 벗어났는데 영조의 행장을 편찬할 임무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정조는 서명응이 행장의 편찬에 전념할 수 있도록 일체의 임무를 면제해 주었고, 자신이 기록해 둔 영조의 유사遺事 60조를 주어 참고하게 했다. 서명응은 30여 년간 영조의 근신近臣으로 활동했던 자신의 경험과 정조의 기록을 바탕으로 행장을 작성했으며, 경종, 영조, 정조 3대에 걸쳐 제왕의 정통성이 계승되었음을 강조하는 것으로 글을 맺었다. 서명응이 작성한 영조의 행장은 『영조실록』에 부록附錄되어 있는데, 아래 글은 영조 행장의 끝부분이다.
이제 사왕嗣王 전하[정조]께서 신[서명응]이 학문이 없다고 하지 않으시고 유사遺事와 자료를 모아 행장行狀을 만들라고 명하시니, 신은 황공하여 굴러 떨어질 듯하며 책임을 다할 방법을 모르겠다. 가만히 듣건대 제왕의 대절大節은 오직 마땅한 사람에게 종사를 부탁하는 것뿐이라 한다. 우사虞史가 요전堯典을 만들면서 순舜에게 왕위를 전한 일을 반복하여 상세히 말한 것이 한 편의 반이나 되지만, 세상에서 우사를 천고千古 사신史臣의 근본으로 삼는 것은 이 때문이다. 신은 감히 경묘景廟[경종]께서 왕[영조]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왕께서 전하에게 모든 것을 맡기신 것을 한 편의 위아래에 갖추어 실어, 요전의 단례斷例를 따르고 들은 바를 존중한다.
[『영조실록英祖實錄』 부록, 「행장行狀」]
정조는 『영조실록』을 편찬한 후 영조의 보감寶鑑을 작성하게 했다. 영조의 50년 행적이 실록에 고스란히 담겨있지만 이는 공개되지 않는 기록이므로, 영조의 업적 중에서 중요한 것을 선별한 보감을 만들어 세상에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또한 정조는 역대의 국왕 가운데 보감이 없는 12조朝의 보감을 추가로 만들어 『국조보감國朝寶鑑』을 완성시켰다. 1782년 『국조보감』의 편찬이 시작되자 서명응은 편찬당상에 임명되었지만 사양하고, 우의정 이복원李福源과 함께 『국조보감』의 교정을 담당했다. 벼슬길에서 물러난 후의 예우 서명응은 1780년(정조 4) 3월에 벼슬길에서 물러나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정조가 즉위한 후 서명응과 서명선徐命善 형제는 당대의 권력자였던 홍국영洪國榮과 심각하게 대립했고, 홍국영이 정계에서 축출될 때 서명응도 함께 물러났다. 서명응이 영조 말년에 역적 홍계능洪啓能과 가깝게 지내면서 서형수를 홍계능의 제자로 보냈다는 비난도 관직에서 물러나게 된 원인이 되었다. 정조는 창덕궁 인정전에서 서명응의 은퇴식을 성대하게 치러주었다.
보만재고保晩齋稿를 구해보고 한 수 읊다.
비 지나간 염막簾幕에 남풍 솔솔 부는데 염계恬溪[서명응]의 열 축軸 글을 한가롭게 펼쳐보네. 깨달음은 대부분 삼역三易의 깊은 곳에서 나왔고 전례와 법식에는 아직도 사가四佳[서거정]의 자취를 보겠다.
음양을 착종하여 마음속에 자못 깨달았고 구름가고 물 흐르듯 바탕은 본디 텅 비었네. 보만당 집에서 초고를 일찌감치 구해보니 한 문제가 문원文園[사마상여] 원고 보던 것과 지금을 비교하면 어떨까?
[『홍재전서弘齋全書』 권5, 「구견보만재고음기일률求見保晩齋稿吟寄一律」] 규장각에 소장된 서명응의 문집 현재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은 서명응의 문집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다. 그의 문집은 『보만재집』, 『보만재사집保晩齋四集』, 『보만재총서保晩齋叢書』, 『보만재잉간保晩齋剩簡』 등 네 종이 있다. 앞의 두 가지는 시문집과 저술을 합한 것이고, 나머지는 저술만 편집한 것이다. 서명응의 문집을 편찬한 사람은 아들 서호수?서형수 형제와 손자 서유본?서유구 형제이다.
명나라에는 『한위총서漢魏叢書』 『당송총서唐宋叢書』 『격치총서格致叢書』가 있지만 모두 여러 사람의 저술을 모아 만든 것으로 한 사람의 말이 아니다. 한 사람의 말로 총서를 만든 것은 당나라 육구몽陸龜蒙의 『입택총서笠澤叢書』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는 시문뿐이고 저술은 거의 없으니 어찌 ‘총서’라 하겠는가? 나는 어려서부터 육경六經의 본 뜻, 하늘과 땅의 법칙, 예악 정법의 유래를 궁구했고 이를 서술한 글들이 모여 저술이 되었다. 나이가 들어 자식과 손자들을 시켜 이를 합치고 교정 대조하여 『보만재총서』를 만들었다. ‘보만재’란 우리 성상[정조]께서 나에게 하사하신 호이다.
[『보만재총서保晩齋叢書』 권수卷首, 「보만재총서인保晩齋叢書引」]
『보만재잉간』(64권 25책)은 『보만재총서』를 편집하면서 빠트린 저술을 편집한 것이다. 서명응은 1784년에 이를 정리했으며, 여기에 수록된 저술은 한가한 시간에 재미로 편찬하거나 왕의 명령으로 편찬했다가 미처 출판하지 못한 것이라고 했다. 현존하는 『보만재잉간』 필사본은 수정된 문구가 많고 기록 사이에 상충되는 것도 있어 수정이 진행되던 상태에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현재 규장각에는 서명응의 문집 4종 가운데 3종이 소장되어 있다. 『보만재집』은 활자본이므로 규장각을 비롯하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국립중앙도서관, 연세대 중앙도서관, 고려대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보만재총서』의 필사본은 규장각과 고려대 중앙도서관 두 곳에만 있다. 규장각의 필사본을 보면 “소화 10년(1935)에 성낙서成樂緖씨 소장본을 필사했다.”는 기록이 있어, 고려대에 소장된 것이 성낙서 소장본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보만재잉간』의 필사본은 완질은 아니지만 규장각에 소장된 것이 유일본이며 그 원본으로 추정된다. 이를 보면 정조대에 시작된 규장각과 서명응의 특별한 인연은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