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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인사 행정의 기록물

정사책

 

서민주(고려대학교 역사학과 박사수료)

 


사진 : 政事冊(奎貴12222)

 

 

 

정사책

 

 

조선시대의 인사(人事) 행정은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에서 나누어 주관하였다. 이조가 주도하는 인사는 이비(吏批)에서, 병조가 관장하는 인사는 병비(兵批)에서 행해졌다. 이비와 병비가 담당하는 업무의 핵심은 관원을 선발하는 것이었다. 이때 관원에게 특정 관직을 제수하기에 앞서 후보자를 선별하는데, 이 과정을 의망(擬望)이라고 지칭하였고 의망을 통해 작성된 후보 명단을 망단자(望單子)라고 불렀다. 최고 인사권자인 국왕은 망단자에 나열된 후보자 가운데 한 명에게 점을 찍어 내려주는 낙점(落點)의 행위를 통해 인사권을 행사하며 낙점을 받은 후보자는 임명 절차에 따라 해당 관직에 최종적으로 임명된다. 이조와 병조의 인사 행정은 매년 6월과 12월 정기적으로 행해지는 도목정사(都目政事)와 관직에 빈자리가 생기면 비정기적으로 개최되는 전동정사(轉動政事)으로 구분되며, 전동정사에 비교했을 때 도목정사에서 발생하는 인사 이동의 규모가 훨씬 컸다.

정사책(奎貴12222)은 조선시대 관료 임명의 중추를 담당하는 이조에서 실시된 인사 행정의 결과물이다. 제목이 정사책이기는 하지만 병조가 주관한 정사를 제외하고 이조에서 담당한 인사 행정만이 기재되었다. 현전하는 정사책은 총 132책으로, 1735(영조 11)부터 1894(고종 31) 사이에 총 58년간의 인사 기록이 남아있다. 왕대별로 구분하면 영조대 7개년, 정조대 7개년, 순조대 16개년, 헌종대 9개년, 철종대 5개년, 고종대 14개년이 전해진다. 여기에는 앞서 설명한 관원 선발에 참여한 관료, 관직 후보자 명단, 낙점 결과뿐만 아니라 이비가 국왕에게 올린 문서인 이비계사(吏批啓事), 국왕이 이비에 하교한 전교도 기록되었다. 이조에서는 관원의 선발 이외에도 사후 관직을 추증하는 증직(贈職), 관원의 자급(資級)을 올려주는 가자(加資) 등의 업무도 담당했던 만큼 이와 관련한 내용도 함께 기재되었다.

정사책의 내용을 구성하고 있는 각각의 요소들을 엮어내면 당시의 인사 행정을 재구성할 수 있다. 먼저 법전에 규정된 이조의 인사 업무의 내용과 주체를 확인해보자. 이조는 경국대전이 완성된 시점부터 대전회통단계까지 문선사(文選司), 고훈사(考勳司), 고공사(考功司)의 속사를 포함하였다. 문선사는 종친과 문관의 관직 제수, 고신(告身), 녹패(祿牌) 관리 등의 업무를 맡았다. 고훈사는 봉작(封爵)이나 시호(諡號)에 관련한 사무를 담당했으며, 고공사는 문관과 아전들의 근무 실태와 휴가를 관장하였다. 현재에 빗대어보면 문관 인사를 전반적으로 관리하는 이조라는 부서 아래에 각각의 업무를 분할하여 담당하는 세 개의 작은 부서가 있는 것과 같다. 이조의 업무는 장관(長官)인 이조판서 1인과 함께 이조참판 1, 이조참의 1, 이조정랑과 좌랑 각 2(원래 3인이었다가 대전통편에서 2인으로 줄어들었다)이 함께 수행하였다.

이조의 속사에 배정된 모든 업무가 정사책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이조의 업무 가운데서도 특히 문관의 관직 제수를 담당하는 문선사와 관련된 업무들이 정사책의 주를 이루고 있다. 정사책은 어떠한 구성으로 이루어졌고, 또 어떠한 내용을 담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확인하기 위해 정사책의 일부를 함께 살펴보자.




그림 1 : 정사책의 기본 구성

 

 

[그림 1]정사책가운데서도 1804(순조 4) 15일에 이루어진 정사 결과를 작성한 내용의 일부이다. 빨간색으로 표기된 갑자정월초오일정사(甲子正月初五日政事)’판서서매수패부진 참판김면주진 참의박종래진(判書徐邁修牌不進 參判金勉柱進 參議朴宗來進)’으로 구분된다. 전자는 이비 정사가 실시된 날짜와 정사의 형태(정사, 도목정사, 친림도목정사 등이 있다)를 의미하며 갑자년(1804) 15일의 정사 내용이라는 것을 서두에 밝힌 것이다. 후자는 정사 일자 아래에 주석의 형태로 기재되었는데, 이조 당상관(이조판서, 이조참판, 이조참의)의 출석부라고 지칭할 만하다. 15일의 경우 이조판서는 패를 보내어 정사에 참여할 것을 독촉하였으나 나오지 않았고 이조참판인 김면주와 이조참의인 박종래는 참석[]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으로 , 을 면밀하게 검토해보자. 사실 는 동일한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앞서 설명하였듯 망단자정사책에 정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만 가 서로 다른 위치에 작성된 이유는 실제 수행된 정사의 내용을 시간 순서에 따라 기록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망단자라는 동일한 형태를 취한다고 하더라도 의 예조참판을 먼저 선발하고 나서 에 나타난 승지 선발 과정을 거친 이후에 비로소 건원릉의 영()을 뽑기 위한 망단자를 작성하였다고 이해할 수 있다. 에서 드러나는 망단자의 구체적 형태는 예조참판(禮曹參判)’, ‘’, ‘우윤오재소(右尹吳載紹)’, ‘가선(嘉善)’, ‘호군유한모(護軍俞漢謨)’, ‘좌윤이상도(左尹李尙度)’이다. 예조참판을 선발하기 위한 망단자에 오재소, 유한모, 이상도 총 3명이 후보자로 거론되었고 이들 가운데 오재소가 예조참판에 최종적으로 낙점받았음을 로 표기한 것이다. 오재소, 유한모, 이상도의 이름 앞에 각각 적혀있는 우윤, 호군, 좌윤은 예조참판에 의망될 당시 그들의 관직 이름이다. 최종적으로 낙점을 받은 관원에게는 이름 아래에 가선과 같이 작은 글씨로 해당 관원의 자급(資級)을 명시하기도 했다.

다음으로 은 이비 정사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국왕의 의견 전달을 보여준다. ‘전왈(傳曰)’ 아래에 적힌 내용은 국왕이 이비에 전송한 것인데, 풀이하면 승지의 이전 망단자를 들여보내라. 예조참의 김명순에게 낙점하라이다. 승지를 선발하는 과정에서 국왕은 이전에 이미 작성된 망단자에 후보로 올라있던 예조참의 김명순을 승지로 결정하였고, 그 결과 김명순은 좌부승지에 임명되었다. 국왕의 전교 옆에 작성된 좌부승지(左副承旨) 예의김명순(禮議金明淳)’이 그 증거이다. 좌부승지를 제수받은 김명순에 대한 정보 이외에도 우부승지(右副承旨)나 동부승지(同副承旨)에 관한 내용이 함께 기재된 것은 김명순이 좌부승지에 임명됨에 따라 기존에 좌부승지였던 윤익열(尹益烈)이 우부승지가 되고, 우부승지였던 김기상(金箕象)이 동부승지가 되는 변화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국왕만이 이비에 전교를 내려 관원 선발에 관련한 사항을 지시하는 것은 아니다. 정사를 담당하는 이비에서도 국왕에게 관직 제수에 있어 필요한 내용을 문의하기도 했다. 일례로 1804(순조 4) 421일 정사에서 있었던 이비의 계사(啓事)는 새로 원릉별검에 제수된 심방(沈鈁)의 신병(身病)으로 인한 관원 교체를 주요 사안으로 구성되었다. 해당 내용은 정사책56책 첫 번째 페이지에 위치한다.

 

 

이비 : 새로 제수된 원릉별검 심방의 정장(呈狀) 안에 저는 평소에 앓던 비증(痺症)이 고뿔로 인해 더욱 심해져서 가까운 시일 내에는 직임을 수행할 가망이 전혀 없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신병이 이처럼 위독하다면 억지로 직임을 살피게 하기는 어려우니, 개차(改差)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국왕 : 윤허한다.

 

 

이비에서 국왕에게 계사를 올린 데 대하여 국왕은 윤허한다는 비답을 내렸고, 결국 심방은 원릉별검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다만 원릉별검을 새로 선발하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더 소요되어 다음 정사인 54일 새로운 원릉별검을 뽑기 위한 망단자가 작성되었다. 정사를 행하는 이비와 최고 인사권자로서 국왕 사이에서 이루어진 위와 같은 의견 교환은 정사책뿐만 아니라 승정원일기의 해당 일자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된다(승정원일기1879(탈초본 100) 순조 4421). 이비-국왕 간의 문서 전달을 매개한 관원이 승정원의 승지(承旨)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승정원일기정사책으로 확인되는 당시의 인사 행정을 보다 입체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수단 가운데 하나임을 알 수 있다.

[그림 1] 정사책의 기본 구성에서는 정사가 실시된 일자, 정사에 참석한 당상관의 여부, 각종 관직의 망단자, 국왕의 전교와 이비의 계사가 확인된다. 하지만 앞서 지적하였듯 이조의 업무 범주가 보다 넓었던 만큼 정사책에는 사망한 관원의 증직(贈職), 관료들의 자급을 올려주는 가자(加資), 관직을 서로 바꾸는 상환(相換) 등에 대한 정보도 기재되었다. 아래의 그림들을 통해 기본 정보 이외의 추가적인 정보들에 대해 확인해보자.




그림 2-1 : 정사책57책 중 일부

 


       그림 2-2 : 정사책56책 중 일부


그림 2-3 : 정사책56책 중 일부

 

 

[그림 2-1]은 모두 ()’이나 ()’로 시작한다. 전자는 이전에 이미 증직을 받았는데 증직을 다시 받는 경우이고, 후자는 증직을 받았던 적은 없지만 이번 정사에서 증직을 받게 되는 경우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가장 오른쪽의 증이조참의김한희(贈吏曹參議金漢禧) 증이판예겸(贈吏判例兼)’은 이전에 이조참의를 증직받았던 김한희라는 인물에게 보다 높은 이조판서예겸직을 증직한 것으로 해석된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 줄의 고동지이영순(故同知李永淳) 증이판예겸(贈吏判例兼)’은 동지였던 이영순에게 이조판서예겸직을 증직한 것이다.

[그림 2-2]는 관원의 자급(資級)에 관련한 정보를 보여준다. 자급 또는 품계는 문관이나 무관에 관계없이 주어지는 것으로, 관직 세계 내부에 존재하는 상하질서를 나타내는 위계이다. 관직이 없다고 하더라도 자급은 취득할 수 있다. 이조에서는 관원들의 자급에 관한 업무도 주관하였던 만큼 정사책에 관련 내용이 기재되었는데, [그림 2-2]에서 가자된 관원들의 정보가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최우측의 종부정윤함(宗簿正尹涵)’은 선원보략을 찬수한 공로로 인하여 가자된 결과, 3품의 하계인 통훈대부에서 정3품의 상계인 통정대부로 자급이 올랐다. 오른쪽으로부터 세 번째와 네 번째는 묶어서 이해해야 한다. 세주에 이상금가의(已上今嘉義)’가 포함하는 구간이기 때문인데 한순민(韓舜民)과 신유악(申維嶽) 모두 해당 정사에서 종2품 하계의 가선대부에서 종2품의 상계인 가의대부로 승진하였다.

[그림 2-3]은 두 가지의 상환 사례를 보여준다. 상환(相換)은 글자 그대로 서로 바꾼다는 의미로 각각 현재 직임을 맡고 있는 관원의 관직을 서로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첫 번째 상환은 의금부도사인 정환조(鄭煥祖)와 감찰인 신의묵(申宜黙) 사이에서 이루어졌고, 두 번째 상환은 의금부도사 이종효(李宗孝)와 내자시봉사 서영수(徐英修) 간에 발생했다. 모두 의금부에서 죄인을 추국하는 일로 업무가 가중되는 상황에서 의금부 도사인 정환조와 이종효가 지방으로 출장을 가면서 벌어졌다(승정원일기 1881(탈초본 100) 순조 465). 그들의 출장 역시 업무의 연장선상에 있었으나 당장 도사로서 담당할 업무가 처리되지 않으면 안 되었기 에 상환을 통해 도사를 차출한 것이었다. 감찰이었던 신의묵과 내자시 봉사였던 서영수는 1804(순조 4) 65일 이후부터 도사가 되었다.

정사책에는 이처럼 인사 행정에 관련한 여러 가지 정보가 기재되어있다. 정사일자에 따라 후보자 명단인 망단자, 국왕의 전교와 이비의 계사, 사망한 인물 가운데 공로가 인정되면 부여되는 증직, 가자 등이 정사책에 나열된 정보들의 사례이다. 정사책이 포함한 모든 내용을 설명하지는 못했으나 대략적으로 정사책이 이조에서 수행한 인사 행정의 실제를 보여주는 자료라는 것에는 동의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정사책은 특히 정조대 국왕의 직접적인 열람이라는 형태로 활용되었다. 정조는 인사 행정의 규례를 확인하거나 망단자를 검토하는 등의 목적으로 정사책을 열람하였다. 정조 이외에는 관찬 사료에서 정사책을 별도로 활용하는 국왕의 모습이 발견되지는 않지만, 이조의 인사행정을 담당한 관원들 역시 관직 제수 정보를 확인하거나, 망단자를 검토하는 등의 이유로 정사책을 활용하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정사책은 당대 인사 행정이 축적된 결과물이었으며, 기록의 대상이 될 만큼 인사 행정이 중요하고 또 복잡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하겠다.

 

 

 

참고문헌

 

정구선, 2021, 조선시대 薦望制度 연구 - 삼망을 중심으로 -, 동아시아고대학62

李成茂, 1980, 朝鮮初期 兩班硏究, 一潮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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