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푸터 바로가기

전체

이전

순무영등록

병인년(1866) 프랑스 함대의 출현과 조선의 대응에 관한 기록

 

엄기석(조선대학교 학술연구교수)

 


사진 : 巡撫營謄錄(15063)

 

 

 

순무영(巡撫營)’이란 

 

 

 

조선은 전쟁(戰爭)이나 내란(內亂)이 발발하였을 때, ‘순무영(巡撫營)’이라는 임시 군영을 설치하고 순무사(巡撫使)를 임명하였다. 예컨대, 1728(영조 4) 이인좌의 난[무신란(戊申亂)], 1811(순조 11) 홍경래의 난, 1866(고종 3) 병인양요, 1894(고종 31) 갑오농민전쟁 발발 시 순무영이 설치되었고, 순무사에게는 국왕과 왕조 체제 보위(保衛)를 위한 제반 군사 운영을 총괄하는 임무가 부여되었다. 즉 순무사는 순무영에서 중앙 및 지방군의 동원, 군사 작전, 군수 보급 등 일련의 조선군 활동을 지휘하였던 것이다. 병인양요 당시에는 중앙군인 훈련도감의 최고 책임자인 훈련대장 이경하가 순무사[정식 명칭 : 기보연해도순무사(畿輔沿海都巡撫使)]에 임명되어, 프랑스 원정군 대응과 군비(軍備)에 관한 제반 군사 조치를 주관하였다. 한편, 순무영은 1866(고종 3) 98[양력 1016]부터 같은 해 1020[양력 1126]까지 존립하였다. 조선 조정은 프랑스 원정군의 강화도 상륙작전이 개시된 직후인 186698[양력 1016]에 순무영을 설치하였으며, 강화도 정족산성 전투에서 패배한 프랑스군이 철수(음력 105, 양력 1111)하자, 전쟁이 종식되었다고 판단하고 1020[양력 1126]에 순무영을 철파(撤罷)한 것이다.

 

 

 

순무영등록의 구성과 내용

 

 

 

순무영등록1866(고종 3) 병인양요 직후, 동년 78일부터 121일까지의 순무영 활동 기록을 정리하여 등록(謄錄)으로 남겨 둔 것이다. 프랑스 원정군 대응에 필요한 병력 및 군량, 무기 등을 동원하기 위해 순무영이 유관 관서와 주고받은 공문서를 등사(謄寫)하여 엮어 두었다. 순무영등록에는 비단 순무영이 존립했던 기간(186698~ 1020)의 군사 조치 및 戰況 전개에 관한 내용 뿐 아니라, 병인양요 전ㆍ후() 프랑스 함대의 동향, 조선-프랑스 간의 교섭 문서, 연해 읍진(邑鎭)의 해양감시 및 경계태세 신칙, 천주교 신자의 내응(內應) 단속, 군수 물자 운송을 위한 보부상(褓負商) 동원, 군병에 대한 호궤(犒饋), 전공자(戰功者)에 대한 포상(褒賞), ()의 원납(願納) 내역 등 다양한 내용이 담겨 있다.

현전하는 순무영등록은 규장각 소장본(15063)과 장서각 소장본(K2-3335)이 있다. 이 가운데 전자는 巡撫營謄錄 四라는 표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병인양요 이후 의궤청(儀軌廳)에서 편찬한 순무영등록의 제4책에 해당하며, 1866(고종 3) 음력 1010일부터 1017[양력 1116~ 1123]까지의 기록을 담고 있다. 후자의 경우, 5(1~5)이 전해지고 있다. 전자와 후자의 제4책 내용이 일치하며, 오기(誤記)된 부분까지 동일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규장각 소장의 순무영등록은 당시 등사한 여러 등본 중 하나임을 알 수 있다.

순무영등록(15063)에는 고종 3(1866) 음력 1010일부터 17일까지의 이양선(異樣船), 즉 프랑스 군함의 출몰 상황에 대한 순무영(巡撫營)의 보고와 군사 대책이 수록되어 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인천부(仁川府) 팔미도(八尾島) 외양(外洋)에 정박했던 프랑스 군함이 부평부(富平府) 응도(鷹島)[프랑스 함대의 해도 및 사령관 로즈 제독의 보고서 상 ‘Fernande Island(Poung-to)’] 앞바다로 이동 정박하는 등 프랑스 함대의 움직임을 보고하고, 프랑스 함대의 퇴로 상에 위치한 영종도로의 상륙을 막기 위해 관서포수(關西砲手) 200여 명을 배치하는 등 일련의 대책과 그에 필요한 군량, 군선, 화약 등의 모급(募給), ()의 보조 물품의 기부 현황이 골자를 이루고 있다. 순무영등록(15063)은 프랑스 함대의 철수 국면에 대한 기록이라 할 수 있다. 해당 국면은 음력 103일 순무영 천총(千摠) 양헌수가 이끄는 조선군이 강화도 정족산성(鼎足山城)에서 매복 작전을 통해, 프랑스 상륙군에게 타격을 입힌 직후이다. 음력 104일 프랑스 원정 함대는 강화도 철수를 결정하고, 다음날인 음력 105일 새벽 2시부터 철군(撤軍)을 시작하였다. 순무영을 필두로 한 조선군이 철군하는 프랑스 함대를 예의주시하며, 퇴로 상에 있는 도서 및 연해 지역의 방비를 강화하였다.

한편, 전술하였듯이 규장각 소장본(15063) 외에도 장서각 소장본(K2-3335)이 확인되는데, 1(음력 78~ 916[양력 817~ 1024])은 병인양요 발발 배경과 전쟁 초기 조선의 초동 조치 상황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2(음력 917~ 927[양력 1025~ 114])과 제3(음력 929~ 108[양력 116~ 1114])은 각각 통진부 문수산성 전투와 강화도 정족산성 전투 국면, 대응 조치 등을 기록하였다. 4(음력 1010~ 1017[양력 1116~ 1123])은 전술한 바와 같이 프랑스 함대의 철군 국면을, 마지막으로 제5(음력 1018~ 121[양력 1124~ 익년 16])의 기록은 전쟁 종료 후, 전쟁을 복기하며 관련 중요 정보들을 정리하여 기록하였다.

 

 

 

순무영등록의 특징과 사료적 가치

 

 

순무영등록은 병인양요 연구는 물론, 19세기 西勢東漸의 상황 속에서 조선이 외국군의 침공을 어떻게 막으려 하였는지를 규명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다. 특히 비교적 단기간의 전쟁 과정에서 이루어진 제반 사항들을 하루 단위로 상세히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당시의 전장(戰場) 및 전황(戰況)을 구체적으로 복원, 재현할 수 있다. 물론, 순무영등록의 기사 내용 중 연대기 사료와 중복되는 내용도 적지 않다. 하지만, 연대기 사료에서 확인할 수 없는 내용이 다수 수록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가령 순무영의 조직 구조, 문서 왕래 방식, 전쟁 발발 시 초기 대응 매뉴얼, 선발대 및 본대의 편제와 규모, 지휘 권한, 병력 동원 방식, 군수ㆍ무기 확보 및 조달 방식, 각종 군관 및 행정 요원의 증편 사실, 전쟁에 소요되는 예산 등은 순무영등록을 통해서만 확인 가능하다. 이처럼 순무영등록에는 병인양요의 전황 전개와 조선 조정의 대응에 관한 방대한 기록이 담겨 있어, 이를 면밀히 검토한다면 19세기 조선의 서해안에 자주 출현하였던 이양선(異樣船)에 대한 조선의 대응 전략ㆍ전술을 밝힐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병인양요의 전말

 

 

병인양요는 1866(고종 3)에 발발한 조선과 프랑스 양국 간의 무력 충돌이다. 동아시아 지역의 교두보가 필요했던 프랑스는, 조선이 자국의 선교사를 살해했다는 것을 빌미로 프랑스 극동 함대를 조선에 파견하여 강화도 및 한강 수로 입구를 점령하였다. 이를 시작으로 양국의 군사 충돌이 전개되었다.

1866년 정월, 조선은 이른바 병인사옥(丙寅邪獄)’을 통해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천명하였다. 이에 9명의 프랑스 선교사, 8,000여 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되었다. 이때, 조선에서 활동하던 프랑스 국적의 리델 신부는 조선에서 탈출하여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병인사옥에 관한 전말을 알렸다. 이는 베이징 주재 프랑스 대리 공사 벨로네에게도 전달되었고, 프랑스 측은 조선을 침공할 계획을 수립하였다.

한편, 청국을 통해 프랑스 함대의 원정 소식을 접한 조선 조정은 서해안 일대와 변경(邊境)의 군비 태세를 강화하였다. 18669,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 제독은 리델 신부와 조선인 신도의 안내를 받아 3척의 군함을 대동하여 인천 앞바다를 경유, 강화해협 및 한강 수로를 조사하였다. 로즈 제독은 소규모 함대만으로는 한양 도성을 함락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수로 조사에 기반한 해도 작성, 한강 일대의 정찰 정도에 만족해야 했다. 프랑스 함대의 1차 원정은 별다른 무력충돌 없이 종료되었다. 조선 조정은 프랑스 함대의 재침을 우려하여 해안 돈대 및 포대를 정비하는 한편, 해양 감시 및 경계태세를 강화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스 함대는 프랑스 정부의 묵인 하에 7척의 군함을 동원하여 2차 원정을 단행하였다. 1014, 프랑스 원정군은 강화도의 갑곶나루에 상륙한 뒤, 강화읍성(江華邑城)을 공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1015일부터 16일까지 조선군과 프랑스군 사이에는 두 차례에 걸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결국 프랑스군은 16일의 전투에서 접전 끝에 강화읍성을 함락하였다. 프랑스군은 강화읍성 함락함으로써, 강화해협과 한강수로 입구를 봉쇄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기왕에 수로를 이용하여 도성으로 조달되던 조선의 미곡과 생필품 공급이 중단되었고, 프랑스군이 목표하였던 조선 조정의 심리적 압박이 고조되기 시작하였다.

조선 조정은 프랑스군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금위영(禁衛營) 위치에 순무영을 설치하고 훈련대장 이경하를 순무영의 총사령관인 기보연해 도순무사에 임명하였다. 아울러, 훈련도감 중군 이용희를 부사령관인 기보연해 순무 중군(中軍), 주교사(舟橋司) 도청(都廳) 양헌수를 기보연해 순무 천총(千摠)에 각각 임명하였다. 이들이 지휘하는 병력은 양화진(楊花津), 통진(通津), 광성진(廣城津), 부평(富平), 제물포(濟物浦) 등 한강 일대의 요충지와 문수산성, 정족산성 등에 배치되어 프랑스군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조선 조정이 이와 같은 초동조치를 취하고 있을 무렵, 1017일 프랑스군의 정찰대가 통진부(通津府)를 무혈 점령하였다. 이에 조선 조정은 순무 천총 양헌수의 군병을 통진부로 보내 대응하도록 하였다. 아울러, 순무 초관(哨官) 한성근으로 하여금 5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문수산성에 매복하도록 하였다. 순무 초관 한성근의 군병들은 1026일 문수산성으로 진출한 프랑스군 정찰대 70여 명에게 기습 공격을 가하여 3명을 사살하고 2명에게 부상을 입히는 전과를 올린 뒤, 통진 방면으로 물러남으로써 프랑스군의 예봉을 꺾을 수 있었다.

한편, 통진 일대에 주둔하고 있던 순무 천총 양헌수는 5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은밀하게 강화도 정족산성으로 이동하였다. 117일 야간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정족산성에 잠입한 순무 천총 양헌수의 군병은 3개 제대로 나뉘어 산성 외곽을 감시하였다. 프랑스군은 조선군의 정예부대가 정족산성에 거점을 확보하고 반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119150여 명의 병력을 정족산성으로 급파하였다. 이에 조선군과 프랑스군 간의 공방전이 벌어졌는데, 30여 분간의 고전 끝에 프랑스군은 30여 명의 부상자를 내고 갑곶진의 본대로 퇴각하였다. 그날 밤, 프랑스 함대는 긴급회의를 열고 철군을 결정한 뒤, 11일 새벽에 철군하였다. 그리고 13일에 조선해역을 벗어나 청국의 즈푸항으로 귀항하였다.

 

 

 

참고문헌



이헌주, 2004, 병인양요 직전 姜瑋禦洋策, 한국사연구124.

연갑수, 2001, 대원군집권기 부국강병정책 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배항섭, 2002, 19세기 조선의 군사제도 연구, 국학자료원

최진욱, 2011, 丙寅洋擾 전후 申櫶의 대내인식과 개혁론, 한국사학보42

박병선, 2013, 1866 병인년 프랑스가 조선을 침노하다, 조율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