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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산순절록

죽음으로 충절을 지킨 아들과 아버지에 대한 기록

 

엄기석(조선대학교 학술연구교수)

 


사진 : 嘉山殉節錄(經古951.053-J463)

 

 

 

’, 선택의 기로에서 목숨을 바쳐 충을 지키다.

 

 

()’()’, 선택의 기로에서 목숨을 바쳐 충을 지키다. 18111218일 평안도 청천강 이북에 위치한 가산 관아는 평상시와 다르게 적막하였다. 가산 인근에서 반란이 일어난다는 소식을 들은 아전과 나졸들이 달아나거나 반군에 합류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같은 날 가산 관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삼교(三橋)는 매우 소란스러웠다. 왜냐하면 스스로를 평서대원수라 칭하며 다복동에서 거병한 홍경래군이 병력을 이끌고 가산으로 향하자 가산 소속 아전 이맹억 등이 군악을 갖추고 나아가 맞이했기 때문이다. 반군에 합류한 이들은 홍경래가 격문에서 비판한 조선왕조의 뿌리 깊은 평안도 지역 차별의 문제점과 세도정치로 인해 재해가 끊이지 않는 것에 대해 동조하는 청북지역 지배층이었다.

가산군수 정시는 반군이 봉기하기 수일 전 큰 소요를 통해 적변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18일 저녁까지 병력을 동원할만한 반란에 대한 구체적인 진술을 직접 확보하거나 정황을 인근 군현으로부터 전달받지 못했다. 이 상황에서 아전 김정척이 파발마를 타고 적정을 탐지하고 돌아와 반군의 세력이 성대하니 항복하여 목숨을 보전할 것을 권유했다. 정시는 이 말을 듣고 나는 차라리 적의 손에 죽겠다. 네가 어찌 감히 이런 대역의 말을 지껄이는가?’하고 즉시 쫓아냈다. 그때가 밤 2,3경 사이였는데 관아 안에는 가산군수 정시(鄭蓍)와 그의 늙은 아비 정로(鄭魯), 동생 질()과 외삼촌, 수청기 연홍까지 5명만 남아있었다.

한편 홍경래는 가산 내응세력의 환대를 받으며 선봉장 홍총각과 함께 기병 30~40기와 보병 150여 명을 거느리고 관아로 쳐들어갔다. 홍경래군은 가산군수 정시의 상투를 잡고 네가 만약 살고자 한다면 부인(符印)과 각 창고의 열쇠를 속히 가져다 바치고, 투항하는 문자 또한 써서 올려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정시는 네 놈은 흉악하고 은혜를 저버리는 종자로 하늘을 거슬러 날뛰니, 참으로 큰 도둑이다. 내 목숨이 다하기 전에는 반드시 그럴 리가 없으니, 속히 나를 죽여 네 뜻을 시원히 풀어라.’라고 말했다. 반군은 몇 차례 위협에도 불구하고 정시가 뜻을 굽히지 않자 목을 베고, 그의 아버지와 동생도 함께 칼로 베었다. 그 결과 정시와 정로는 죽고 동생만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이후 관아를 점거한 홍경래 군은 다음 군현을 점령하기 위해 떠났다.

홍경래군은 미리 포섭된 내응자의 조력과 빠른 진격 속도를 바탕으로 삽시간에 청북지역 7개 군현을 점령했다. 7개 군현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관군과 반군의 군사적 충돌은 전무했다. 홍경래가 미리 포섭해둔 청북지역 지배세력의 내응으로 각 군현의 수령들은 병력도 제대로 동원하지 못하여 적이 오기 전에 피신하거나 반군에게 붙잡혀 감금되었다. 심지어 반군의 격문을 보고 싸워보기도 전에 투항하는 선천부사 김익순, 철산부사 이장겸과 같은 이들도 있었다. 이들 가운데 끝까지 충절을 지키다 죽임을 당한 수령은 정시가 유일했다.

중앙 조정에서는 가산군수 정시의 뛰어난 충성과 높은 절개가 적의 간담을 깨뜨리고 사방의 교훈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높이 평가하면서 아경의 관직에 추증하고 자식을 녹용하며, 장례 과정을 돕도록 하는 조치를 시행했다. 그리고 성을 버리고 인신을 잃어버린 정주목사 이근주ㆍ곽산군수 이영식과 병부를 잃어버린 박천군수 임성고 등을 처벌하고 반군을 보기도 전에 항복한 김익순과 이장겸은 잡아들여 추국을 한 뒤에 죽여 군율을 세웠다.

조정에서는 상벌을 분명히 하면서 기강을 세우고, 각 군현에서는 내응자를 색출하여 처벌하면서 전황이 반전되기 시작했다. 구성과 영변에서는 수령이 반군과 협조하는 이들을 잡아들인 뒤 성문을 닫고 방비에 힘쓰자 반군은 힘을 쓰지 못했다. 또한 평안병사가 주둔하고 있는 안주를 중심으로 각지에서 달려온 평안도 관군이 남진하는 반군을 상대로 1229일 송림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전세를 뒤집은 평안도 관군은 도성에서 파견되는 중앙군이 도착하기 전에 반군을 정주성으로 몰아넣고 빼앗긴 군현을 모두 수복하는데 성공하고 1812419일에는 정주성을 함락시키면서 반란을 완전히 진압했다.

 

 

 

정시와 정로의 순절(殉節)’을 기리는 과정

 

 

조정에서는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상벌을 분명히 하기 위한 상세한 조사를 진행했다. 순절한 이들 중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이는 바로 가산군수 정시였다. 정시의 순절 과정에 대해서 조사한 평안감사 이만수는 그의 드높은 충성과 높은 절개가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을 지키다 순절한 충렬공 송상현에게 견주어 부끄러움이 없다고 말할 만큼 높게 평가했다. 순조도 의견에 동의하면서 정시를 병조판서에 추증하고 함께 순절한 정시의 부친 정로도 추증하라고 지시했다. 또한 아버지를 보호하려다 칼을 맞고 살아남은 동생에게도 상이 끝난 뒤에 벼슬자리를 줄 것을 명하였다. 그리고 정시와 정로의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를 치를 때 필요한 물자를 지급하고 고향으로 호송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이 없도록 각 군현에서 도와주며 정시의 관이 서울을 지날 때 예관을 보내 치제하도록 분부를 내렸다. 이러한 조치는 충을 지키다가 순절한 현직 관료에 대한 예우를 갖추어서 이후에도 본이 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정주성 함락으로 홍경래 난이 완전히 진압된 이후 중앙 조정에서는 약 2달간 출정한 사람들의 공과 죄를 가리는 논의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69일 비국에서 별단을 올리면서 논공행상을 마무리했다. 약 한 달 뒤인 730일 유생 오성술 등 404인이 순절한 이들 가운데 대표적인 칠의사(七義士)’를 세워 사당에 배향할 것을 상소하였다. 이때 칠의사로 칭해진 사람이 바로 충렬공 정시와 증 참판 백경한ㆍ증 통제사 허항ㆍ증 참판 한호운ㆍ증참판 임지환ㆍ증 통제사 제경욱ㆍ증 병사 김대택이었다. 1813년 왕명으로 평안도 사민들은 정주성 남쪽 오봉산 밑에 사당을 세워 칠의사를 모시고 봄ㆍ가을로 모여 칠의사에 대한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약 10년 뒤인 1824(순조 24)에 사액되면서 표절사(表節祠)’라는 편액을 받게 되었다.

1858(철종 9) 경상도 유생 박해수 등 100여 명이 연명 상소하여 정로의 충절을 높이면서 그에 따른 시호를 내려줄 것과 죽음을 무릅쓰고 아버지를 몸으로 감싸다가 칼을 맞고 홀로 살아남은 질에 대해서도 벼슬을 내려 포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1859(철종 10) 2월 정로는 이조판서로 증직되고 충경공(忠景公)’이라는 시호를 하사받게 되었다.

이렇듯 홍경래 난이후 가산군수 정시와 그의 아버지 정로에 대한 추증 및 현창은 일회성에서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이루어졌다. 이는 정시와 정로가 보여준 을 지키기 위한 죽음이 조선왕조에서 지속적으로 기릴 정도로 모범사례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때문에 1863년 고종이 즉위하면서 세도정치가 무너지는 가운데 집권한 대원군이 전국 650개 서원 중 모범이 될 만한 47개의 서원만 남기고 나머지를 모두 훼철할 때 정주 표절사는 철폐되지 않고 계속 남아 정시를 포함한 칠의사를 배향하며 그들의 충절을 기릴 수 있게 되었다.

 

 

 

조선왕조는 왜 충신을 현창하는가 

 

 

전통사회를 이끈 핵심 개념인 충()ㆍ효()ㆍ열()은 군신ㆍ부자ㆍ부부 관계에서 신하ㆍ자식ㆍ아내에게 요청된 덕목이다. 여기서 충과 열은 혈연관계에 기초한 효 개념과는 달리 인위적인 성격이 강하다. 즉 효가 하늘로부터 주어진 도덕 감정이라면 충과 열은 개인의 노력과 의지를 요구했다. 자연적이라고 본 효의 실천이 시대에 따라 변하듯 관계적이고 인위적인 성격이 강한 충과 열의 변화는 더 큰 폭을 보인다.

조선왕조는 효와 함께 충과 열을 강조하기 위해 일찍이 세종대 삼강행실도를 편찬하였고 이후에도 여려 차례 내용을 보완해가면서 간행하였다. 특히 왜란이 끝난 광해군대에는 동국신속삼강행실도간행을 통해서 사적인 영역에서의 효가 국가, 군주에 대한 충성으로 확대되기를 기원하기도 했다. 이러한 정책의 일환으로 조정에서는 충절을 지킨 사람을 추증하고 시호를 내려 신하와 백성들에게 이와 같은 행동을 격려하였다. 또한 충절을 지킨 이들을 모아 세운 사당에 사액을 내려 후대에도 계속해서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조처하여 후대에도 기릴 수 있도록 하였다.

 

 

 

규장각에 소장된 가산순절록의 내용

 

 

가산순절록은 홍경래난 당시 가산군수로 있던 정시와 그 아버지 정로가 항거하다가 순절한 사실을 기록한 책이다. 본서는 1929년 현손 정두용과 삼종손 정오영에 의해 간행되었다. 73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1~3은 주로 충경공(忠景公) 정로의 사적과 관련된 내용이 기록되어 있으며, 4~7은 충렬공 정시의 사적을 정리했다.

1에서는 정로가 선비의 몸으로 아들을 따라 가산으로 갔다가 아들 시와 함께 절의를 지켜 적에게 굴복하지 않고 순절한 사실과 1858(철종 9) 경상도의 유생 100여 명이 연명 상소하여 정로의 충절을 높이 찬양하고 그에 따른 시호를 내려줄 것과 죽음을 무릅쓰고 아버지를 몸으로 감싸다가 칼을 맞고 홀로 살아남은 질에 대해서도 벼슬을 내려 포상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이조판서의 증직을 내리고 충경이라는 시호를 하사한 내용을 수록하고 있다. 2에는 충경공에 대한 뇌문(誄文) 61편이 실려 있는데 뇌문의 찬자는 관직에 있는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재종질족손외종제 등 친연관계에 있는 사람들도 눈에 많이 띤다. 3은 충경공에 대한 만사 168수가 실려 있는데 2‚ 3행으로 된 것이 다수를 차지한다.

4충렬공 일기(忠烈公 日記)1811(순조 11) 1218일부터 1812(순조 12) 118일까지의 사건 기록으로 생존한정로의 작은 아들 질이 쓴 지평공일기(持平公日記)와 종형이 종제의 부탁을 받아 1812119일부터 219일까지 반장(返葬) 기록으로 쓴 종형일기(從兄日記)로 나누어진다. 5에는 계하관문(啓下關文)‚ 보영초(報營草)‚ 회제(回題)‚ 계초(啓草)‚ 장계(狀啓)‚ 회계(回啓)‚ 이문(移文)‚ 윤음(綸音) 등 공적의 조사처리과정과 포상의 실시에 따른 각 관청간의 왕복문서와당시의 사실이나 일생의 사적을 기록으로 남겨 후세에 전하려고 한 사적비명(事蹟碑銘)‚ 신도비명(神道碑銘)‚ 사제문(賜祭文)‚ 치제문(致祭文)‚ 정려(旌閭) 상량문(上樑文)‚ 통문(通文) 등 다양한 글이 실려 있다. 6에는 안주목사 조종영 등 66인이 쓴 충렬공에 대한 뇌문이 수록되어 있다. 7에는 충렬공에 대한 만사 71편이 실려 있다.

따라서 가산순절록을 통해 충절이 강조되던 사회에서 19세기에는 어떠한 행동을 이라고 평가하였고 이러한 가치를 지킨 이들에 대한 보상은 조정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해주었는지에 대해서 살펴볼 수 있다. 또한 충을 지키다 순절한 이들을 현창함으로써 가문과 집단, 지역사회에서 어떠한 정치경제적인 이익을 확보하는지에 대해서도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김선주, 2020, 조선의 변방과 반란, 1812년 홍경래 난, 푸른역사.

오수창, 2002, 조선후기 평안도 사회발전 연구, 일조각.

이숙인, 2020, 충절과 정절의 정치학 - 조선후기 절() 담론의 전개 양상 -, 민족문화연구86.

정석종, 1972, 洪景來亂性格, 韓國史硏究7.

정호훈, 2018, 전쟁의 기억과 정치론,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 韓國思想史學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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