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푸터 바로가기

전체

이전

유자와 불자의 담화

유석질의론

 

전효진(동국대학교 사학과 박사수료)

 


사진 : 儒釋質疑論표지 (1709-5)

 

 

 

유석질의론(儒釋質疑論)의 저술과 유통

 

 

조선은 정치체제부터 사회습속에 이르기까지 그 중심 가치를 유교에 두고자 하였던 나라였다. 성리학을 전공한 조선의 유학자들은 유교를 올바른 가르침, 정도(正道)’라고 하였다. 유교 이외의 사상이나 신앙은 이단(異端)으로 규정하여 배척하였다. 불교를 비판하는 입장을 두고 배불론(排佛論) 내지는 척불론(斥佛論)이라 하며, 반대선 상에서 불교를 긍정하는 입장을 호불론(好佛論)이라 한다.

배불론은 고려 말기 14세기 후반부터 적극적으로 제기되었고 그 주장은 두 가지 방향으로 흘렀다. 현실적으로 드러나는 사회문제로서 불교 교단의 폐해를 지적하였고, 동시에 윤리인식적 측면에서 불교 철학을 비판하였다. 여말선초 왕조 교체기에는 주로 현상적인 폐단을 근거로 한 배불론이 제기되지만, 점차 불교의 진리성 자체에 대하여 반문하는 철학적 비판이 주를 이루게 된다. 배불론의 예로 널리 알려진 것이 정도전(鄭道傳, 1342~1398)불씨잡변(佛氏雜辨)이다.

한편에서는 불교를 변호하는 서적들이 찬술되어 유통되었다. 배불론 주장을 반박하는 글 가운데에 유석질의론(儒釋質疑論)이 있다. 유석질의론을 소개하기에 앞서 저자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근대 시기 이래로 득통기화(得通己和, 1376~1433)가 저술하였다고 알려져 왔다. 기화의 생전 저서로 분명하게 알려진 현정론(顯正論)과 세트를 이루며 조선 초기 호불론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자료로 연구되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와 기화의 저술로 볼만한 근거가 전혀 없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철학적 개념을 전제하여 풀이해나가는 방식, 주역(周易)을 이해하여 인용하는 방식 등에서 큰 차이가 있어 동일 인물의 저작으로 볼 수 없다는 지적이었다.

일부 연구자는 여전히 기화의 저작으로 인정하고 있다.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검색되는 각종 지식백과에서는 오래된 연구를 참조하여 저자를 특기하기도 한다. 관련 사료가 확인되지 않는 상황이므로 저자를 확정하는 일은 잠시 미루는 게 온당할 것이다. 다만 저술된 시기에 관하여서는 호불 논서가 한창 나오던 때에 작성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유석질의론의 성리학 이해 수준이 한층 높다고 판단하여서 유석질의론이 기화의 현정론보다는 후대인 15세기 중반 이후에 지어졌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작성 연대의 추정 하한선은 어느 정도 짚을 수 있다. 가장 오래된 판본이 1537(중종 32)에 간행되었기 때문이다.

유석질의론이 세간에 활발히 유통되기 시작한 시점은 16세기이다. 현재까지 목판본(木版本)으로 4종의 판본이 알려져 있다. 연대가 불분명한 것을 제외하면 모두 중종~선조 연간에 간행된 것들이다. 지역적으로 전라도 흥덕 연기사(烟起寺), 경기도 용인 서봉사(栖鳳寺), 황해도 곡산 불봉암(佛峰庵), 평안도 맹산 등 전국 각지에서 간행되어 유통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문헌 성격이 유사한 현정론이 중종 연간 후반인 1520~40년대에 집중적으로 간행되었다. 두 문헌을 연결하여 보면 16세기에 유교와 불교 양자 사이를 논하는 저서들에 대하여 수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호불 논서의 주장과 논리는 조선 후기 불교계 내의 수행론 논쟁에도 영향을 주었다. 특히 유석질의론을 읽고 수용한 직접적인 사례가 바로 1686(숙종 12) 운봉대지(雲峰大智, 생몰미상)심성론(心性論)이다. 이 책은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 입각하여 불교와 유교의 심성(心性) 인식을 비교한 논서이다. 서두에서 심성론을 해석하는 글로서 주역을 인용한 것과 대승기신론을 활용한 것 2부류로 구별하여 소개하는데, 전자의 케이스로 유석질의론의 구절을 중요하게 언급하였다.

이후 시기 심성 논쟁의 대표적인 논객을 참고로 소개하자면 18세기에는 연담유일(蓮潭有一, 1720~1799)과 묵암최눌(默庵最訥, 1718~1790)이 있다. 19세기에는 백파긍선(白坡亘璇, 1767~1852)과 초의의순(草衣意恂, 1786~1866) 사이의 선 논쟁으로 계승되었다. 여말선초 유불 인식과 이를 둘러싼 논쟁은 세대를 거치며 주안점을 달리해 지속되었다. 이러한 사상사적 흐름 안에서 유석질의론의 역할과 자료적 가치가 높이 평가된다.




사진2 : 유석질의론(儒釋質疑論)(1709-5)의 권수면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본은 20세기 전반 무렵 연기사본(1537년 간행)을 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권수제 아래 함허득통저(涵虛得通著)”라고 적힌 것이 눈에 띄는데, 이는 저자를 기화(己和)로 오인하여 적은 것이다. 현재까지 유석질의론이 저술된 시기와 저자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유자(儒者)가 묻고 불자(佛者)가 답하다

 

 

유석질의론이라는 서명에서 마지막 글자 ()’은 글의 형식으로서 논서(論書)’를 의미한다. 나머지 유석질의(儒釋質疑)’라는 제목을 직역하자면 유자[]가 불자[]에게 질의(質疑)한다정도로 해석된다. 유교를 전공한 사람이 불교(釋敎=佛敎)를 전공한 사람에게 의문점을 질문한다는 뜻이겠다. 앞서 이 책의 저자가 알려지지 않았다고 말하였지만 화자의 태도를 고려하여 볼 때 승려나 불교를 깊이 공부한 속인(俗人)이 썼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논설문을 쓸 수 있을 정도라면 불교와 유교에 모두 어느 정도 통달하였던 것은 분명하다.

오늘날 우리는 대체로 주장하는 글을 쓸 때 서론, 본론, 결론의 삼단 구성을 갖추어야 한다고 배웠을 것이다. 하지만 옛사람들의 글쓰기 방식은 생각보다 다양하였고, 자신만의 논리를 펼치는 글을 쓸 때는 문답(問答) 형식을 자주 애용하였다. 가상의 인물들을 세워 묻고 답하게 하거나 자문자답하는 방식이다. 이 책은 제목에서 밝힌 것처럼 유교 측에서 먼저 질문하면 이를 불교 측에서 답변하는 식으로 서술되었다. 상권 초반에서는 불교 비판과 이에 대한 반박으로 입장이 엇갈리지만, 점차 유자가 불교 측 주장에 감화되면서 매우 긍정적인 태도로 질의해나가는 지점이 흥미롭다.

이 책은 단권으로 되어 있고 내용이 상2권으로 구분되었다. 각 권 첫머리에는 개관하는 글이 실리고 전체 19개의 문답이 순차적으로 서술되었다. 다소 내용이 길지만 질의 내용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상권

1. 당신이 불교를 논한 것은 ()’을 위주로 한다. 유학자들도 을 해명하였으니 이단에게서 취할 이야기가 없다. 그렇다면 불교의 가르침은 배우는 데에 군군더기가 되고 세상에 아무런 이로움이 없지 않은가 

2. 불교 승려들 가운데에는 양의 바탕에 호랑이 가죽을 쓴 자들이 열 중에 여덟아홉은 된다. 나라에 이로움은 없고 가르침에는 해로움이 있어서 새싹 사이에 강아지풀이 난 것보다 해롭다. 이들을 가려내어 쫓아내고 백성들의 요역에 대신 편재하려는데, 그리하면 불교계나 국가에나 모두 이롭지 않겠는가.

3. 지금의 유학자들은 부화뇌동하여 불교를 배척하는 것을 능사로 여긴다. 다하지 못한 설명을 이어서 시비의 문을 막아버리면 다행이지 않겠는가.

4. 불교를 헐뜯는 유학자들은 불교는 서양 오랑캐의 가르침이니 중국에서 시행할 수 없다고 한다. 중국 성인의 가르침에서 하도(河圖)낙서(洛書)보다 앞서는 것이 없는데 불교에서는 논하지 않는다. 이에 불교가 열등하다고 보는 것이니,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5. 출가하고 중생들을 구제하고 열반에 들어가는 일에 어찌 방편이 없겠는가.

6. 하늘과 땅의 조화에 관한 묘한 의미는 하도낙서보다 더 자세한 것이 없는데 부처가 논하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7. 부처가 나타난 것이 주나라 소왕 때라면, 어찌 이 시기에 이 땅까지 함께 교화하지 않았는가. 교학의 법은 한나라 때에 들어왔고 선학의 법은 양나라 때에 이르렀다. 천년이나 늦은 것은 어째서인가.

 

   하권

8. 삼재(三才)의 시작이 유학자들이 말하는 혼돈(混沌), 반고(盤古) 등의 말과 같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9. 오행(五行)이 생성하는 수()가 그러한 이유에 대하여 설명해달라.

10.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해와 달의 운행과 차고 기욺, 추위와 더위에 대한 설명이 역상(曆象)과 같지 않은데 그 까닭은 무엇인가.

11. 유교에서는 불교의 삼세인과(三世因果)와 죄복응보(罪福應報)의 설이 황당하다며 믿지 않는다. 어떠한 증거로 그러하다는 것을 아는가.

12. 앞선 대답에서 선한 일을 쌓았을 때의 인과는 해명하였으나 악한 일을 행하였을 때의 응보는 아직 설명하지 않았다. 이어서 설명해달라.

13. 선악을 행하는 것이 이런 것에만 그치겠는가. [이어서 설명해달라.]

14. 불교의 시식(施食)에서 일곱 알로 온 세상[十方]에 두루 베푼다는 말은 터무니없으며 유자들은 감히 믿을 수 없다. 또 신주가지(神呪加持)로 불사하면서 반드시 3, 7, 49(7*7)으로 제한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15. 세간에 정토(淨土)를 수행하는 자들은 부처에 예배하면서 언제나 10가지로 형상을 나누어서 열 가지로 이름을 읊는다. 그리고 여러 알의 염주로 그것을 세는데 염주의 개수는 언제나 108개에 그친다. 그 이치는 어째서인가.

16. 당신이 증명하여 보여준 가르침은 매우 자세하고 숭상할 만하다. 어떻게 배워야 이를 수 있는가.

17. 지금 불교를 배우는 자들은 반드시 화두를 참구하는 것을 도에 들어가는 방편으로 삼는다. 정혜(定慧)의 논변은 이와 어찌 다른가.

18. 지금의 선사 대부분 모두가 나는 불법을 회통하였다고 말하는데, 어떻게 하면 그들의 삿됨과 바름을 변별할 수 있는가.

19. 윤회에서 초탈하고 불도를 이룰 수 있는 성품을 보는 배움은 가능하지만, 그 도와 가르침이 어떻게 땅의 이치에 관여하겠는가. 앞선 왕조에서 왕씨가 나를 세우고 백성들을 수고롭게 하고 재물을 써서 곳곳에 수천 수백의 가람을 세우고는 비보(裨補)’라 불렀다. 그 까닭은 무엇이며 불교 안에 이와 같은 이치가 있는가.

 

 

책 속의 불자는 각각의 질문에 각종의 근거를 달아 상세히 설명한다. 대답을 종합적으로 보자면 유불도(儒佛道) 3교가 마음에 근본을 둔다는 점에서 같다고 전제하고, 유교의 개념을 이용해 불교의 개념과 역사를 설명하였다. 예를 들어 무극(無極), 태극(太極), 건곤(乾坤), 팔괘(八卦) 주역에 나오는 주요 개념을 차용하여 삼신(三身), 연기(緣起) 등 불교의 이론을 설명하였다. 특징적인 부분은 유교보다 불교를 우위에 두어 전개하였다는 점이다. 유교는 마음을 닦고 다스리는 자취를 전공하지만, 불교는 본성을 밝히고 깨우쳐서 진리에 계합하므로 조금 더 수승한 가르침으로 보았다.

끝으로 불교를 폐기하면 국토의 안정을 지키지 못하므로 선왕(先王)의 법도를 폐지하지 않으면서 새로운[維新] 천명(天命)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유불도 삼교가 모두 협조하여 백성을 교화하면 나라에 이로움이 될 것이며, 서로 배척하면 이익이 없을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유교, 불교, 도교 등 세상에 쓰이는 진리들이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점을 중요하게 이야기하면서 현상적으로 각기 차별된다고 인정하였다. 사상에 대한 우월을 논하여 일방적으로 탄압할 것이 아니라, 서로를 잘 이해하여서 공존할 수 있기를 바랐다. 이러한 저자의 태도는 오늘날 현실문제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며 귀감이 될 만한다.

 

 

 

참고문헌

 

 

박해당 옮김(기화 외 지음), 2021, 현정론유석질의론, 동국대학교출판부

박해당, 2005, 「『현정론유석질의론의 삼교론, 불교학연구10, 불교학연구회.

김용태, 2009, 조선시대 불교의 유불공존 모색과 시대성의 추구, 조선시대사학보49, 조선시대사학회.

김용태, 2009, 조선후기 불교의 心性 인식과 그 사상사적 의미, 한국사상사학32, 한국사상사학회

김방룡, 2018, 유불교섭사의 맥락에서 바라본 조선 전기 불교 심성론의 변용, 동서철학연구87, 한국동서철학회.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