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푸터 바로가기

전체

이전

조선초 승려 기화의 삶과 글, 함허당득통화상어록


전효진(동국대학교)



사진 : 涵虛堂得通和尙語錄(古貴1840-28)

 

 

 

함허당득통화상어록의 피전자(被傳者) ‘기화

 

 

함허당득통화상어록(涵虛堂得通和尙語錄)은 기화가 평소에 남긴 언행과 글을 엮은 책이다. 한 인물이 남긴 기록을 모은 책에 대하여 말할 때 저자(著者)’피전자(被傳者)’라는 개념이 구별된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저자란 글을 써서 책을 지어 낸 사람이다. 뒤에서 자세히 이야기하겠지만 이 책은 기화 사후에 그의 제자들에 의하여 간행되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기화가 이 책의 저자라고 말하는 것은 오류이다. 이럴 때는 전기(傳記)의 주제가 된다고 하여 피동의 표현을 써서 피전자라고 한다. 물론 언행이나 글을 따로 떼어 내서 거론한다면 기화의 말, 기화의 글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함허당득통화상어록의 주인공인 기화(己和)1376(고려 우왕 2)부터 1433(조선 세종 15)까지 살다 간 승려이다. 자료의 서명에서 보이는 함허(涵虛)’는 당호(堂號)이고, ‘득통(得通)’은 법호(法號)이다. 처음에는 법명을 수이(守伊)’, 법호는 무준(無準)’이라 하였는데 꿈속에서 신승(神僧)으로부터 법명과 법호를 받아 바꾸게 되었다고 전한다. 우리에게는 당호와 새로 바꾼 법명을 조합한 함허기화로 익숙하게 알려져 있다.

본관은 중원(中原: 충주)이고 속성은 유씨(劉氏)이다. 전객시사(典客寺事)까지 올랐던 유청(劉聽)과 부인 방씨(方氏)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적에는 성균관에 입학할 정도로 뛰어난 유교 지식인이었다. 점차 불교에 귀의하더니 함께 공부하던 벗의 죽음을 계기로 삶이 덧없음을 절실히 깨닫고, 21세가 되던 1396(조선 태조 5) 관악산 의상암(義相庵)에서 출가하였다.

1397(태조 6) , 양주 회암사에서 무학자초(無學自超, 1327-1405)의 가르침을 받고서 여러 곳을 다니다가 다시 회암사로 돌아와 선 수행에 힘썼다. 이러한 인연으로 기화는 무학의 제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무학은 고려 말 선승인 나옹혜근(懶翁惠勤, 1320-1376)의 법을 이었으므로 기화가 나옹-무학의 계보를 이었다고도 이야기된다.

스승 무학이 입적한 후에는 공덕산 대승사(大乘寺)에 머물면서 금강경(金剛經)을 강설하는 반야강석(般若講席)을 세 차례나 베풀었다. 이후 천마산 관음굴(觀音窟), 불희사(佛禧寺), 평산 자모산 연봉사(烟峰寺) 등에 주석하면서 정진하였다. 1420(세종 2)에는 오대산에 들어가 여러 성인에게 공양하고, 영감암(靈鑑菴)으로 가 나옹의 진영에 제사를 올렸다. 이때 머물면서 법명과 법호를 받은 꿈을 꾸게 되었다고 한다. 이듬해에는 국왕의 명령을 따라 대자암(大慈庵)에 주석하면서 왕실을 축원하는 법회를 열고 왕실 종친에게 설법하였다. 1424(세종 6) 가을부터는 길상산, 공덕산, 운악산 등 여러 곳을 유력하였고, 1431(세종 13) 가을에는 희양산 봉암사(鳳巖寺)에 주석하며 가람을 중수하였다. 1433(세종 15) 세속의 나이로는 58, 출가한 나이로는 37세에 입적하였다.

기화는 생전에 강석(講席)을 통해 가르침을 펼치며 깊이 있는 저술을 다수 남겼다. 대표적으로 원각경설의(圓覺經說誼), 금강경설의(金剛經說誼), 금강경윤관(金剛經綸貫)』 『선종영가집설의(禪宗永嘉集說誼)등이 있다. 이들 문헌은 당시 선종에서 중시한 전적을 주석한 것으로, 현재 실물로 전하는 수량이 상당한 것으로 보아 후대에도 계속 유통되며 널리 읽혔다.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법화경(法華經), 아미타경(阿彌陀經)등에 대해서도 게송을 남긴 것을 감안하면 저술의 폭은 더욱 넓었을 것이다. 또 다른 주요 저서로 현정론(顯正論)이 있다. 이는 불교에 대한 비판에 대하여 잘못된 논리를 반박하고 유불도(儒佛道)의 근본이 서로 다르지 않음을 강조한 논설문이다.

 

 

 

함허당득통화상어록의 간행

 

 

선사의 덕행은 이미 참으로 위대하여 변변치 못한 글과 거친 말로는 제대로 기술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억지로 이를 적어 뒷시대에 남기는 것은 효를 높이기 때문이니, 이는 효자·효손들의 지극한 정성이다. 하물며 직책이 붓을 잡는 일이니 어찌 감히 완강하게 사양할 수 있겠는가? 이에 어쩔 수 없이 거칠게나마 시말을 적어 오래도록 전하여 없어지지 않게 하고자 할 뿐이다. 행적을 적는 말은 이미 다 하였지만, 대사를 경모하는 마음은 다 서술하기가 어려우므로 시 한 수를 붙여서 마음을 드러내고자 한다.

 

법유를 주신 은혜의 깊이는 하늘처럼 광대한데

슬프구나, 스승님께 보답할 힘이 없네.

붓으로 덕을 적는 일은 참으로 아이들 장난일 뿐이니

영원토록 사람마다 그 입이 바로 비석 되리라.

 

- 함허당득통화상어록, ‘함허당득통화상행장에서

 

함허당득통화상어록의 간행은 기화의 추모사업 중 하나로 이루어졌다. 책에 실린 서문과 행장을 통하여 자세한 경위가 파악된다. 1433(세종 15) 41일 기화가 입적하고서 5일 후에 상장례 절차에 맞추어 시신을 화장하였다. 그리고 사리를 수습하여 4곳의 사찰에 부도(浮屠: 승탑)를 세워 봉안하였다. 당시 효령대군(孝寧大君)이 세종(世宗)에게 주청하고 문도들에게 직접 명하였다는 언급이 있어 왕실 차원에서 큰 후원이 있었던 것 같다. 이어서 제자들은 기화가 남긴 각종의 주석, 시부(詩賦) 등을 모아 필사하고 교정하여서 책으로 간행하였다.

서문의 작성 연대와 책 말미에 기입된 간행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1439(세종 21) 8월 이전에 초고가 완성되고, 이듬해 7월 무렵에 판각 작업이 마무리되었다. 실무적으로는 제자 가운데에서 야부(野夫), 기화를 생전에 가까이 모시던 학미(學眉)가 주도적 역할을 맡았다. 야부는 자료를 모아 원고를 정리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학미는 원고를 가지고 목판본으로 간행하는 일 전반을 맡았다. 아울러 학미는 기화의 절친한 친족이었던 전여필(全汝弼)에게 서문을 청탁하여서 어록으로서의 격을 더욱 갖추게 하였고, 야부는 행장을 직접 작성하여서 기화의 생애와 업적, 어록 간행의 전후 상황을 소상히 남겼다.

책에는 어록 간행에 동참한 인물들의 명단이 부가적으로 기입되어 있다. 책판 간행에 있어 직책을 가지고 임한 이들부터 살펴보자면 어록의 판하본(板下本)은 문수(文秀)가 썼다. 정심(正心) 3인의 각수승(刻手僧)이 판각을 도맡았으며, 완성된 책판은 기화가 만년에 머물렀던 희양산 봉암사에 보관하였다. 어록을 간행하는 데에 필요한 경비와 물자를 조달하기 위하여 앞에서 언급한 학미를 비롯한 7인의 문인들이 모연(募緣)을 담당하였다. ‘조양(助揚)’이라 하여 서문을 쓴 전여필 등 13인의 일반 속인(俗人)이 확인되는데, 이들은 직임을 맡지는 않았지만 물심양면으로 간접적인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 판하본(板下本) : 책판을 새길 때, 판목에 뒤집어 붙여서 비치는 대로 새길 수 있도록 원고를 종이에 먹으로 바르게 쓴 것.

* 모연(募緣) : 선행을 권한다는 뜻으로 권선(勸善)’이라고도 함. 절에서 어떠한 일을 할 때 신자(信者)들에게 보시(布施)를 청하는 것.

 

 

 

 


사진 : 함허당득통화상어록(涵虛堂得通和尙語錄)의 서문

 

 


사진 : 함허당득통화상어록(涵虛堂得通和尙語錄)의 행장

 

 


사진 : 함허당득통화상어록(涵虛堂得通和尙語錄)
간행 기록

 

 

고문헌(古文獻)으로서 연대가 분명한 것으로는 1440(세종 22)에 간행된 판본이 유일하며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동국대학교 중앙도서관 등의 소장본이 알려져 있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본의 표지에는 백악산방문고(白岳山房文庫)”, “휴암(休庵)”이라는 글씨가 묵으로 쓰여 있다. 이는 소장처와 소장자를 표기한 것인데 표제와 서체가 달라 애초의 소장자는 달랐을 가능성이 있다. 표지를 넘겨 첫 장을 보면 고교형인(高橋亨印)”이라는 인장 기록이 눈에 띈다. 이것은 식민지기 대표적 관학자인 다카하시 도오루(高橋 亨, 1878~1967)의 인장이다. 경성제대 재직시절 소장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이후 경성제대 도서관을 거쳐 서울대학교 도서관으로 이관하였다가 규장각으로 입수되었다. 본 소장본은 내용상 일부 결락되었으나 상태가 양호하며 내용은 동국대 소장본과 대조하여 살필 수 있다.

 

 

 

함허당특통화상어록에 담긴 기화의 말과 글

 

 

책의 제목에서 어록(語錄)’이란 표현은 선승(禪僧)이 남긴 말을 기록한 문헌이라는 뜻이다. 비교 대상을 들자면 문집(文集)은 운문인 ()’와 산문인 ()’을 중심으로 하여 정형화된 구성을 띤다. 이에 비하여 어록은 형식적으로 자유로운 듯하면서 변별되는 특징을 지닌다. 본래 어록은 입을 통해 이루어지는 대화, 설법, 문답 등의 언행을 기록하여 책으로 펴낸 것이다. 그러나 점차 시대를 내려오면서 글씨로 쓴 시와 문을 함께 편차시키면서 문집의 체제를 띠기도 하였다. 이에 편의상 어록을 문집이라고 통칭하기도 한다. 해당 소장본에도 표지의 왼쪽 상단에 함허집(涵虛集)’이라는 표제가 묵서로 적혀있어 함허의 문집이라고 인식한 것을 엿볼 수 있다.

이 책에서는 기화가 구두로 전한 법어(法語)를 적어서 수록하면서 어록으로서의 형식을 명확히 갖추었다. 전체적인 체제는 책장마다 차례로 기입된 숫자, 판심(版心: 책판의 중심 부분)의 상단에 기입된 제목를 기준으로 나뉜다. 서문과 행장을 제외한 본문은 총 48장이며 전반부 1~19, 후반부 1~29장으로 구분된다. 다시 판심제(版心題)를 보면 전반부에는 통어(通語)”라고 되어 있고 후반부에는 통송(通頌)”, “통가(通哥)”, “통송(通頌)”이라는 단어가 순차적으로 기입되었다. 이는 기화의 법호를 따서 간략하게 칭한 것으로 득통의 법어[]’, ‘득통의 게송[]’, ‘득통의 가요[]’ 등을 뜻한 것으로 보인다. 즉 문체(文體)에 따라 글을 편차하였음을 보여준다.

책의 형태적인 부분을 참조하여 장르에 따라 내용을 분류하면 법어 29, 문헌을 주석하여 지은 글 4, 가요 8, 편지글 93편이다. 이 가운데 법어는 대부분 영가(靈駕: 죽은 영혼)를 위하여 설한 것들이며 대상은 왕실 일원과 승려들이었다. 기화가 왕실 원당으로 지정된 사찰들에서 주석하면서 여러 상장례 의식을 주관하면서 설한 것으로 보인다.

나머지는 기화가 글로 지어 남긴 것들이다. 우선 선종영가집, 원각경, 법화경, 아미타경등 각종 불교전적을 대상으로 지은 글이 있다. 기화는 경전을 깊이 이해하고 신행 활동으로 연결시켜 대중을 교화했음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 그리고 매우 다양한 소재를 가지고 쓴 시와 도반들에게 준 편지글이 수록되었다. 기화 본인의 감정과 생각을 거침없이 풀어내고 있어 개인적인 면모를 살필 수 있게 한다.

한국불교사 연구를 위한 자료로서 조선 초기 불교계를 대변하는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함허당득통화상어록은 몇 안 되는 자료 중의 하나로서 희소가치가 있다. 거시적으로는 불교 수행과 신앙의 경향성, 한문 문학의 흐름 등을 추정하는 근거가 된다. 미시적 측면에서는 자기표현, 시대인식, 교유관계 등 인물의 삶을 곳곳이 탐색할 수 있게 한다. 기화라는 과거의 인물이 오늘날까지 학문의 경계에 구애받지 않고 활발히 연구되는 데에는 함허당득통화상어록있기에 가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으로 기화와 기화가 살았던 시대에 대하여 심층 깊은 이해가 이루어질 것이라 기대된다.

 

 

 

참고문헌

 

 

김두재 옮김(범해각안 지음), 2015, 동사열전, 동국대학교출판부.

박해당 옮김(득통기화 지음), 2017, 함허당득통화상어록, 동국대학교출판부.

 

박해당, 1996, 기화의 불교사상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엄기표, 2006, 朝鮮初期 已和大師 涵虛堂分舍利 石造浮屠에 대한 考察, 문화사학25, 한국문화사학회.

전재강, 2020, 「『涵虛堂得通和尙語錄소재 日常詩開放性志向性, 대동한문학65, 대동한문학회

조서호, 2022, 涵虛堂 己和金剛經五家解說誼硏究,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