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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대 신비로운 현상의 기록,

관음현상기

 

전효진(동국대학교 사학과 박사수료)

 


사진 : 觀音現相記(6611)

 

 

 

세조실록, 불가사의한 현상이 기록되다

 

 

 

1462년 겨울, 세조(世祖, 재위 1455~1468)는 경기도(京畿道) 양근(楊根)에서 강무(講武)를 실시하였다. 강무란 국왕이 직접 주도하는 군사훈련으로 단순한 무예단련을 넘어 수렵대회로서의 성격을 띤다. 이미 그해 가을에 전라·경상·강원·황해 지역으로부터 군사를 모아 강원도에서 강무를 행한 바 있었다.(927~106) 이로부터 한 달 후 겨울이 되어 다시 강무를 시행하였다.(1027~115) 당시 경기·개성·충청 지역으로부터 14,361명의 군사가 동원되었고 왕비와 세자, 종친, 재추 등이 수행단으로 동참하였다.

개국 이래 최대 규모였다고 평가되는 이해의 겨울 강무 기간에 아주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실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전한다.

 

임금이 상원사(上元寺)에 행차하였을 때 관음보살이 모습을 현현한 이적(異蹟)이 있었기 때문에 모든 관료가 전()을 올려 축하하였다. [임금이] ()를 내려서 모반(謀叛대역(大逆모반(謀反)한 것, 자손이 조부모나 부모를 모략으로 죽이거나 때리고 욕한 것, 처나 첩이 남편을 모략으로 죽인 것, 노비가 주인을 모략으로 죽인 것, 모략이나 고의로 사람을 죽인 것, 군령과 강도를 범한 것 이외의 죄를 용서하도록 하였다.”

- 세조실록29, 세조 8115

 

 

유난히 궂은 날씨 속에서 강무장으로 향하던 길, 세조는 지평현(砥平縣) 미지산(彌智山) 상원사(上院寺)에 거둥하였다. 지평현은 오늘날 행정구역상 경기도 양평군에 해당하며 미지산은 용문산(龍門山)의 별칭이다. 이곳에는 왕실 어른이었던 효령대군(孝寧大君, 1396~1486)이 경영하는 농장(農莊)과 신심을 가지고 후원하는 상원사가 있었다. 세조가 상원사에 행차하자 하늘에 관음보살(觀音菩薩)이 모습을 현현하였고 수많은 사람이 같이 목격하였다. 이 경이로운 상서(祥瑞)를 축하하며 신하들은 하례(賀禮)를 올렸고, 임금은 경범죄를 저지른 이들을 사면하라는 너그러운 명령을 내렸다. 그 사연이 실록에 짤막한 기사로 기록되었다.

나아가 세조는 이 신비로운 현상을 그림으로 그리고 글로 적어 널리 유포하도록 하였다. 그 책이 바로 관음현상기(觀音現相記)이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는 2종의 판본이 소장되어 있다.(6611; 6612) 조선 초기에 목판본으로 간행된 귀중본으로 분량은 전체 7장에 불과하지만 당시 상황을 아주 자세하고 생생하게 묘사한다. 그 신비한 체험담 속으로 함께 들어가 보자.

 

 

 

세조, 관음보살을 만나다

 

 

 

관음현상기는 이야기 구조상 3단으로 나뉜다. 전체 내용을 갈무리하자면 세조가 상원사에 오르게 된 경위와 행차 상황을 서술한 도입부, 관음보살이 현상하는 이적을 묘사하고 목격담을 이야기하는 본문부, 국왕 세조의 사후 조치를 전달하는 결말부로 구분된다.

 

* 이하 관음현상기한문 원문을 한글로 번역하고, 다시 윤문·요약하였다.

 

  세조의 상원사 행차

 


사진 : 觀音現相記의 권수면

 

 

천순 6(세조 8, 1462) 1027일 임금이 중궁, 세자와 함께 경기에서 사냥하였다. 29, 지평현 미지산 아래에 멈추어 대군 등을 머물게 하고 몇몇 호위 군사만 이끌고 효령대군의 원찰인 상원사에 거둥하였다. 전날부터 천둥번개가 치고 어두워졌다가 우박이 내리곤 하더니 임금이 탄 수레를 따라 하늘이 점차 개기 시작하였다. 절에 올라가는 동안 범패 소리가 크게 울렸는데, 임금은 효령대군이 미리 승려에게 법석을 하며 기다리게 한 것이라 여겼다. 막상 절에 이르러 보니 사람이 없었고, 어디선가 온화한 범음(梵音)이 들리기에 절 바깥에서 승려들이 법석을 한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상원사의 승려들은 진작에 피해 있었고 절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 모든 것은 범천성중(梵天聖衆)이 이적을 드러낸 것이었다.

 

 


사진 : 당시의 관세음보살 현상 이적을 표현한 변상도

 

 

상원사에서의 관음보살 현상 이적

 

이때 군영에 머무르던 장수들과 군사들 모두 경이로운 구름이 절 위로 솟아오르는 것을 보았다. 색이 샛노랗고 하늘로 이어졌는데 관세음보살의 모습으로 변하였다. 흰옷을 열어 걸치고 상서로운 빛이 밝게 빛나니 그 빛이 허공에 두루 가득하여 천지의 산천초목과 의복, 병기, 의장을 모두 비추며 금빛 세상을 이루었다. 사람들이 놀라며 미증유의 일이라고 감탄하고 우러러 바라보며 엎드려 절하였다.

상원사 근처 반야암(般若庵)에는 빛을 본 승려들과 속인들이 구름처럼 모였다. 임금이 상원사에 들어가서 조금 있다 상원사 담화전(曇華殿) 위를 바라보니 흰 기운이 위로 솟아올라 변화하여 하얀 천의(天衣)를 입은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 되었다. 키는 3장 남짓이었고 천의의 길이가 또한 1장 남짓 더하였다. 원만한 빛이 찬란하게 오색으로 겹쳐 이루어졌는데 가운데부터 검은색, 붉은색, 하얀색, 푸른색, 노란색이 서로 섞였다. 보살의 모습은 삼엄하고 광채가 환하게 빛나 꽤 오래 천지를 비추다가 곧 흩어졌다. 사람들이 서로 더불어 찬탄하며 예를 올렸다.

미지산으로부터 삼십리 쯤 떨어진 강 주변에 천녕현(川寧縣: 현재 경기 여주시 소재 지역)이 있는데, 현의 백성들이 멀리서 산허리에 노란 구름의 바퀴 다발이 위로 솟구치는 것을 보았다. 서로 예배하며 오늘 임금님의 수레가 상원사에 행차하셨으니 이것은 그 상서로운 기운이다라고 말하기도 하고, ‘비룡(飛龍)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라고도 하였다.

 

  관음보살 현상 이적, 그 이후

 

임금이 크게 기뻐하며 경사스럽게 여겨 상원사에 쌀 이백 석을 내리고 내관을 보내어 향과 비단을 봉헌하였다. 112일에 효령대군이 이 상서로운 응화를 듣고 대중을 이끌어 밤새워 기도하자 또 큰 빛이 비추었으니, 촛불을 치워도 손금을 볼 수 있을 정도로 빛이 밝았다. 4일에 임금의 수레가 풍양(豊壤)의 이궁(離宮)으로 귀환하니 여러 신하가 전을 올려 축하하였다. 임금이 손수 교지를 내리어 경내에 사면하며 명령하였다. 그리고 5일에 도성으로 돌아왔다. 7일에는 의정부 및 육조의 관리들과 종친, 장수들이 술잔을 올려 축하하고 상원사에 불상을 만들고 전각을 짓도록 하였다. 임금은 명령하여 관음 현상 이적을 그림으로 그려 나라 안에 널리 유포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영의정부사 신숙주(申叔舟), 도승지 홍응(洪應), 판내시부사 전균(田畇)을 상원사에 보내어 다시 깊은 마음으로 공양하도록 하였다.

 

 

 

불교 상서 기록의 행간을 읽다

 

 

세조 대의 불교 상서는 이 사건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이후로 다양한 불교적 상서가 지속적으로 발생한다. 세조실록과 기타 문헌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록으로 본다면 관음 현상 이후로부터 세조가 승하하는 14689월까지 약 510개월의 기간 동안 무려 40여 회의 불교 상서가 출현하였다. 대략 2달에 한두 번씩 이적이 나타난 셈이다. 양상은 아주 다양하였다. ·보살을 친견(親見)하는 일부터 사리(舍利)가 저절로 나뉘어 개수가 늘어난다거나 신이한 빛을 발하고, 천상계의 음식이라는 수타미(須陀味)가 나무에 열리고,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거나 상서로운 기운이 일어나는 등 갖가지 일이 반복하였다.

예로부터 아주 좋은 일이 생길 때 특정한 신비 현상이 나타나 미리 그 징조를 알려준다고 생각했다. 특히 왕이 덕을 가지고 나라를 다스리고 있어 태평성대가 실현될 때, 하늘이 이를 보증하여 축복의 표시를 내린다고 믿었다. 예컨대 해와 달이 평소와 다르게 크게 빛난다거나, 기이한 천문현상이 일어난다거나, 진귀한 동식물이 나타나는 등 일반적인 자연현상으로는 일어나기 힘든 일이 생겨날 때 상서로 인식하였다. 어떠한 현상이 일어났을 때 길한 징조냐 흉한 징조냐 판단하는 것이 중요했다. 상서로 판단하고 해석하는 방식은 기반하는 사상이 무엇이냐에 따라 달랐다.

관음현상과 같은 이적은 조선시대 역사에서의 통설적인 인식으로 비추어보자면 매우 이례적이고 독특하다. 유교 사회를 지향한 조선에서 불교 상서라니. 세조대 불교 상서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이적을 모티브로 <광대들 : 풍문조작단>(2019)이라는 영화가 제작되기도 하였다. 영화에서는 상상력을 가미해 역사 배경을 추측하고 불교 상서는 인위적으로 조작된 일이었을 것이라 생각하며 극화하였다.

세조대 불교 상서 기록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가. 이를 해명하기 위하여 학계에서는 일찍이 논의를 이루어 왔다. 대체로 정치적 측면에서 해석하여 세조를 비롯한 위정자들이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불교 상서를 활용하였다고 본다. 상서가 출현할 때마다 신하들은 국가와 왕실에 길한 일이 생길 조짐이라며 축하하는 전문(箋文)을 지어 올렸다. 국왕인 세조는 불교 상서를 공공연히 인정하는 것을 넘어서, 이를 기념하여서 특별 사면을 명하거나 백성들에게 은전을 베풀어 공식화시켰다. 불교 상서가 출현한 데에 수반하여 각종의 세리머니가 상례화되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일련의 상황에 모종의 정치적 함의가 깃들었던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조가 불교 상서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까닭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견해는 매우 다양하다. 우선 세조가 왕위를 찬탈한 후 통치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하여 불교 상서를 이용하였다는 연구가 있다. 혹은 불교 상서가 세조 8년을 기점으로 출현하기 시작하였으므로 정권 초반에는 유교적 이념에 기반하여 통치하다가 불교적 요소를 적극 이용하는 노선으로 급변하였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또 다른 연구에서는 불교 상서로부터 발생한 이미지가 확대, 재생산되어가는 과정에 관심을 가졌다. 일반 백성들에게 익숙하게 알려진 불교 상서를 이용하여 권위를 초월적으로 이미지화시키고, 사면과 은전을 통해 부처와 같이 자비로운 모습을 강조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대내적으로 중앙집권정책을 보완하는 수단이었고, 대외적으로는 왜()와 같은 불교를 신앙하는 세력과 통교하는 데에도 활용되었다.

최근에는 세조대 불교 상서를 정치적 조작이라고만 보는 인식을 다시 생각해보자는 문제 제기가 있었다. 세조의 사적인 신앙심이 반영된 것인가, 모종의 의도를 가지고 정치적으로 조작한 것인가. 혹은 또 다른 의도와 배경이 있었는가. 이는 다른 왕대의 실록에 실린 불교 관련 기사들을 해석하는 문제로도 확장된다. 조선 초기에는 국왕을 위시로 하여 매우 다양한 불교적 행위가 이루어졌다. 그 양상은 매우 복합적이고, 행위 이면의 상황이 명확히 드러나 있지도 않다. 이들 역사 기록 행간에 깃든 의미를 읽어 내고 이면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하여 치밀한 분석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권연웅, 1993, 세조대(世祖代)의 불교정책(佛敎政策), 진단학보75, 진단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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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연, 2011, 조선초기(朝鮮初期) 세조대(世祖代) 불교적(佛敎的) 상서(祥瑞)의 정치적(政治的) 의미(意味), 사총74,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홍광표황민하, 2013, 관음현상기(觀音現相記)를 통해서 살펴본 조선 초기 상원사의 경관연구, 한국전통조경학회지31, 한국전통조경학회

이정주, 2022, 세조 후반기 순행과 불교, 사총105,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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