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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17세기 효종대 재이고(災異考)

 

경석현(국립대구과학관 선임연구원)

 


사진 : 災異考(1313)

 

 

 

재이고(災異考)

 

 

재이고(災異考)17세기 중반에 편찬된 재이(災異) 문헌이다. 재이란 수한재(水旱災)와 같이 인간 생활에 직접적인 피해를 주는 재해(災害)와 일월식이나 유성, 혜성, 햇무리·달무리와 같이 일상적이지 않은 자연현상, 즉 변이(變異)를 통칭하여 이르는 말이다. 재이고에는 이러한 재이에 관한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재이고는 여러 면이 베일에 가려져 있다. 기록의 부재로 언제, 누가, 재이고를 지었는지 알 수 없고, 본문 내용을 통해 대략적으로 추정만 할 뿐이다.

재이고에는 1624(인조 2) 2월부터 1655(효종 6) 9월까지 약 30년 간 841일치의 재이 기사가 실려 있다. 그런데 인조 대에는 2년과 5, 10년과 11, 그리고 14~27년의 기록만 있다. 재이고의 재이 기사는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되는데, 하나는 관상감 재이 기사이고(582) 다른 하나는 지방 재이 기사이다(277). 먼저 관상감 재이 기사는 관상감의 측후단자(測候單子)를 옮긴 것이다. 주지하듯 관상감에서는 매일 재이를 관측하고 관측한 내용을 단자로 작성해 보고했다. 재이고의 관상감 재이 기사는 이러한 관상감의 측후단자를 옮긴 것으로 언제 어떤 재이가 있었는지 짤막하게 적혀 있다.

관상감 재이 기사 중 수록 빈도가 가장 높은 것은 142건의 월성범식입(月星犯食入)이다. ‘이란 달과 별의 빛이 서로 한 치 이내에서 미치는 것을 말하고, ‘이란 별이 달 가운데로 들어가 형체가 보이지 않는 것을 말하며, ‘이란 별이 달 가운데로 들어갔으나 형체는 보이는 것을 말한다. 다음으로 많은 현상은 141건의 태백주현(太白晝見)이다. 태백주현은 금성이 낮에 보이는 현상을 말한다. 이 밖에도 햇무리, 달무리 등의 기록이 있다. 한편, 관상감 재이 기사 중에서는 도형이 그려져 있는 것도 35건 있다. 관상감의 관서지(官署志) 서운관지(書雲觀志)(고려의 서운관이 조선으로 계승되었고, 세조 12년 관제 개편 때 관상감으로 개칭되었다.)에 따르면, 흰 무지개가 해나 달을 꿰뚫는 현상[白虹貫日白虹貫月], 일월식(日月蝕)은 반드시 그림을 그려 보고하도록 했다. 재이고의 재이 도형은 이러한 규정에 의해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지방 재이 기사는 각 도에서 보고한 재이 장계(狀啓)를 압축하여 실은 것이다. 각 도에서는 매월 관할 지역에서 발생한 재이를 정리해서 보고했는데 재이고의 지방 재이 기록은 이러한 각 도의 재이 장계를 요약하여 수록한 것이다. 지방 재이 기사 중에서는 우박(雨雹)에 관한 것이 72건으로 가장 많다. 다음으로 풍재(風災)와 서리, 지진 등에 관한 기록이 있다. 계절별로는 여름이 118건으로 가장 많고, 다음 가을(72), (52), 겨울(34) 순인데, 대부분이 농업 생산과 관련된 기상이변이나 자연재해에 관한 것이라 이러한 양상을 보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재이고에는 재이 외에 인사(人事)와 관련된 기사도 16건이 수록되어 있다. 가령, 인조 대의 재이 기사는 원년이 아닌 2년부터 시작하는데, 그 첫 기사는 국왕 인조가 이괄(李适)의 난()’으로 남천(南遷)했다가 다시 환도했다는 내용이다. 재이고의 인사 관련 기사는 모두 이렇게 17세기 전반의 국가적 변란(變亂)에 관한 것이다. 인사 관련 기사는 재이고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로, 인조~효종 대의 재이가 이렇게 국가적 변란과 함께 실려 있다는 점에서 재이고가 단순한 재이 모음집이 아니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연장에서 인조 대 기록의 연대 배치도 주목된다. 인조 대의 기록은 2년과 5, 10년과 11, 그리고 14년 이후의 것인데, 이러한 연대 배치를 통해 지은이가 재이고를 작성하는 처음부터 인사 문제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인조 2년에는 이괄의 난이 있었고, 5년에는 정묘호란(丁卯胡亂), 14년에는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있었다. 만약 언제 어떤 재이가 있었는지 순수한의도로 재이고를 편찬했다면, 인조 대 연대 배치를 이와 같이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인조 대의 재이를 국가적 변란을 염두에 두고 정리했기 때문에 인조 대 기록이 이와 같이 정리되었던 것이다. , 재이고는 이러한 국가적 변란이 있을 때 일어났던 재이를 모은 문헌인 것이다.

이 점은 재이고의 재이 기사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재이고에는 월성범식입현상이 142건으로 가장 많다. 이것은 다분히 편찬자의 의도가 반영된 결과이다. 매일의 날씨와 재이를 기록한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동궁일기(東宮日記)를 살펴보면, 인조~효종 대에 가장 많았던 재이는 햇무리·달무리였다. 그래서 만약 재이고가 단순히 당시에 많았던 재이를 모은 것이라면 응당 햇무리달무리가 다량으로 수록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햇무리나 달무리 기록이 아닌 월성범식입이 다량으로 수록되었다는 것은 다분히 지은이의 의도가 반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관상감의 천문학 교과서 천문유초(天文類抄)에 따르면, 월성범식입의 점성적(占星的) 의미는 내란(內亂병란(兵亂기근(饑饉)이다. , 재이고는 인조반정 이후의 재이를 국가적 변란과 함께 정리한 문헌으로서, ‘내란, 병란, 기근의 의미가 있는 월성범식입 현상을 다량으로 수록하여 17세기 조선이 직면한 국가적 위기-내란병란기근을 당대의 재이를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재이고는 언제, 누가, 왜 작성했을까. 우선 작성 시점을 보면, 재이고의 가장 마지막 기사는 1655(효종 6) 927일의 것이다. 이로 보아 재이고가 작성된 시점은 165510월 초로 추정된다. 10월을 한참 더 지나서 작성했다면 10월 이후의 재이 기록을 굳이 수록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을 것이므로 10월 초에 9월까지의 기록을 확인하고 나서 재이고를 작성했을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작성 주체인데, 재이고는 관상감에서 작성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매일같이 재이의 관측 및 기록 업무를 수행했고, 측후단자 또한 관상감에 보관되어 있었다. 다만, 관상감에서 자체적으로 작성한 것인지, 아니면 국왕 효종의 지시로 작성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참고로 관상감에서는, 현재는 전하지 않지만, 매일같이 관측한 내용을 풍운기(風雲紀)라는 책으로 엮었다. 풍운기에는 오전과 오후, 그리고 매경(每更)에 어떤 현상이 있었는지 조목별로 적고, 훗날의 고증을 위해 해당 현상을 관측한 관상감 관원의 이름도 아래에 함께 적었다. 또 관측 기록을 6개월 단위로 묶은 천변초록(天變抄錄)을 매년 정월과 7월에 춘추관(春秋館)으로 따로 보내기도 했다. 또 연대기 사료에는 관상초결(觀象抄訣), 관상감재이단자(觀象監災異單子), 천변책(天變冊)등이 확인된다. 이 문헌들의 구체적인 내용과 성격은 알 수 없지만 관상감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재이 관련 문헌을 편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재이고또한 이와 같은 맥락에서 편찬된 문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끝으로 역사적으로 재이고의 편찬은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재이를 관측하고 기록하고 정리하는 일련의 활동은 군주로 하여금 재이를 정치·도덕적 반성과 성찰의 계기로 삼으라는 뜻에서 수행되었다. 특히, 일정한 체계를 갖춘 재이 문헌의 편찬으로 일회성에 그치는 재이상소와 달리 항구적으로 군주수신론(君主修身論)을 개진할 수가 있었다. 대체로 경서(經書)나 중국의 정사(正史), 혹은 자국(自國)의 역사 속에서 재이 기사를 발췌하여 당대의 정치적 변란(變亂)과 함께 정리하는 방식이 선호되었다.

우선, 16세기의 사례를 보면, 1517(중종 12) 329일과 30일 평안도에 눈과 서리가 내려, 보리가 얼어 죽었다는 보고가 있었다. 그리고 41일에는 경상도에서 알에서 깬 병아리가 갈비뼈에 다리 2개를 더 달고 태어났다는 장계가 올라왔다. 또 서울을 포함하여 전국적으로 눈이 내렸다는 보고도 있었다. 그러자 중종은 재이를 그치게 할 수성(修省)의 도리(道理)를 듣고 싶다며 대신들을 불렀고, 이 자리에서 영의정 정광필(鄭光弼, 1462~1538), 재이는 모두 음이 왕성하고 양이 미약하여 발생한 것이라며 중종에게 반성하고 유념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다음날 시강관 이자(李耔, 1480~1533)는 근래 재이가 겹쳐 나오니 두려워하고 조심하며 삼가 수성하여 천견(天譴)에 답해야 한다고 했다. 특히, 말만 하는 것보다는 글로 써 두는 것이 좋다면서 반정 이후로 일어난 재이는 모두 적어 옆에 두고 마음에서 잊지 말라고도 했다. 그러자 중종은 이자의 의견에 따라 반정(反正) 이후의 재이를 빠짐없이 정리해서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재이를 통해 반정 이후의 국정을 되돌아보고 이를 수성(修省)의 계기로 삼겠다는 의미였다. 명종 대에도 유사한 사례가 있었다. 1554(명종 9) 527일 밤 혜성이 북두칠성 괴성(魁星) 앞에 출현했다는 보고가 있자 명종은 홍문관과 관상감에 일러 옛일을 상고하여 보고하라고 했다. 역대로 어떠한 혜성이 있었는지 살펴본 뒤 이를 쇄신과 수성의 기회로 삼겠다는 의도였다. 이처럼 16세기 중종·명종 대에도 재이가 출현하면 관련된 재이를 별도로 정리하고, 군주는 이를 공구수성(恐懼修省)의 계기로 삼곤 했다.

17세기 초 인조 대에는 장현광(張顯光, 1554~1637)이 응지상소(應志上疏)를 올리면서 십육괘배진(十六卦排陳)을 함께 지어 바쳤다. 십육괘배진주역(周易)64괘 가운데 진괘(震卦)가 들어 있는 열여섯 괘를 뽑아 정리한 문헌이다. 괘를 진괘(震卦)가 아래에 있는 정진(貞震) 8괘와 위에 있는 회진(悔震) 8괘로 나누고, 정진에는 무망(无妄)()서합(噬嗑()()()(() 괘를, 그리고 회진에는 대장(大壯)귀매(歸妹)()()()()소과(小過)() 괘를 두어 각각에 자신의 생각을 덧붙였다. 또 허목(許穆, 1595~1682)춘추재이(春秋災異)를 지어 춘추에 모든 재이를 반드시 기록한 이유는 군주에게 하늘의 경계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경계시키기 위해서였다. 천도(天道)가 재이를 내린 것과 성인이 특별히 기록한 것이라는 의미를 밝혔다.

재이고이후인 현종 대에는 두 권의 재이 문헌이 출간되었는데, 김익렴(金益廉, 1622~?)역대요성록(歷代妖星錄)과 이옥(李沃, 1641~1698)역대수성편람(歷代修省便覽)이 그것이다. 역대요성록은 노() 문공(文公) 14(기원전 613)부터 명() 만력(萬曆) 5(1577)까지의 혜성 기록을 모은 문헌이고, 역대수성편람은 노() 장공(莊公) 11(기원전 683)부터 송() 효종 7(1168)까지의 다양한 재이를 모은 문헌이다. 두 문헌의 세부적인 내용에는 차이가 있지만, ‘군주로 하여금 옆에 두고 틈나는 대로 보고 고열(攷閱)하여 항상 경계하고 두려워하라는 뜻에서 편찬한 점은 같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장현광의 십육괘배진, 허목의 춘추재이, 효종 대의 재이고, 그리고 현종 대의 역대요성록역대수성편람은 단순히 언제 어떤 재이가 있었는지 알아보기 위해 편찬된 것이 아니었다. 군주에게 공구수성(恐舊修省)을 요청하기 위해 작성된 것이고, 특히 군주가 항상 옆에 두고 보며 수신(修身)에 전념하라는 의미에서 문헌의 형태로 편찬된 것이었다. 17세기 재이고편찬의 역사적 의미는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진 : 災異考(17세기 중반)의 재이 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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