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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선(東文選)

동국(東國) 문장의 정수(精髓)를 담다

 

황향주(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객원연구원)

 


사진 : 東文選(1188)

 

 

 

동국의 문장을 알고 싶은 자, 동문선을 보라

 

 

 

지금 눈앞에 한국의 문화와 역사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 외국인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한국의 학문적 수준과 사상, 예술성을 온전히 보여줄 수 있는 한 편의 책을 추천해달라고 요청해온다면, 현대 한국인은 어떠한 답변을 내놓게 될까. 필시 백이면 백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채 깊은 고민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제각기 서로 다른 답변을 내놓게 될 것이다. 각 답변 속에 언급된 책들이 진정 대표성을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한 갑론을박 또한 부수될 것임은 분명하다.

한국의 학문적 수준과 사상, 예술성을 모두 담아내면서 강력한 대표성을 지닐 수 있는 책, 그런 것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그 존재 가능성을 상상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 되지는 않을까. 그런데 적어도 조선시대 사람들에게 이 질문은 유효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695(숙종 21) 조선을 찾은 청나라 사신이 동국(東國)’의 시문(詩文)을 보여달라고 요청하자 조선에서는 큰 고민 없이 사신의 요청에 응하였다. 조선은 청나라 사신 앞에 동문선(東文選)청구풍아(靑丘風雅)라는 두 종의 책을 내놓았다.

당시 청나라 사신은 굳이 동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조선으로 이어지는 장대한 동국의 역사, 그 역사가 빚어낸 최고의 문장들을 일람해보고자 하는 욕망을 청나라 사신은 노골적으로 드러낸 셈이었고, 조선은 이에 동문선청구풍아라는 책으로 화답하였다. 1713(숙종 39) 청나라 황제가 다량의 서책을 선물하며 동국의 시부(詩賦)를 보여줄 것을 요청해왔을 때에도 조선이 선택한 답은 동문선이었다. 비록 1713년의 동문선은 청나라와 조선 사이의 불미스러운 외교적 마찰을 예방하기 위하여 일부 시문의 재선별 및 개작 작업을 거쳐 급조된 책이었으나, 선별된 시문 및 작가들의 목록, 전체적인 체제 등을 보았을 때 조선전기 최초 간행된 동문선의 연장선상에 있었던 것임은 확실해 보인다. 이처럼 동문선은 그것을 편찬한 조선과 그것을 소개받은 청나라 모두 인정한, 명실상부 동국 문장의 정수를 집대성한 책이었다.

 

 

 

동문선이 존재하기까지의 전사(前史)

 

 

 

동문선은 동국의 문선(文選)을 의미한다. 이 서명은 중국의 문선이라는 책을 염두에 두고 지어졌다고 이야기된다. 공자 이래로 중국의 문인들은 고금의 명문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후대에 전하는 것을 중요한 과업으로 여겼다. 공자는 3(三代) 이래로 전수된 시문을 평가하고 그 정수만을 모아 시경(詩經)서경(書經)을 편찬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이후 남북조시대 양()나라의 소명태자(昭明太子) 소통(蕭統)은 방대한 분량의 시문을 선별하여 성책(成冊)한 뒤 문선으로 명명하였다.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문선은 시문선집(詩文選集)의 전범으로 인식되어 시대와 국경을 초월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한국은 고려시대에 이르러 중국·한국의 역대 문인들이 남긴 시문을 총망라해 우수한 작품을 선별하고 찬집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고려중·후기에는 저자 미상의 십초시(十抄詩; 名賢十抄詩, 夾注名賢十抄詩), 김태현(金台鉉; 1261~1330)동국문감(東國文鑑), 최해(崔瀣; 1287~1340)동인지문(東人之文)과 같은 다양한 시문선집이 등장하였다. 이 가운데 무신집권기 발간된 것으로 추정되는 십초시는 중국과 신라 문인 30인의 7언율시만을 담았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한국 최초의 시문선집으로 평가받는 것은 동국문감이다.

안타깝게도 동국문감은 현전하지 않는다. 현재로서는 한국 최초의 시문선집이 누구의 글을 수록하였으며 어떠한 체제를 갖추었는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하지만 동국문감은 적어도 조선전기까지 전해지고 있었고, 동인지문과 더불어 동문선편찬자들의 참고자료로 십분 활용되었다. 서거정(徐居正; 1420~1488)동문선서문에서 특별히 동국문감동인지문을 언급하고 각각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후대인의 시각에서 볼 때 동국문감은 최초의 시문선집이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소략하고 거칠다는 단점이 있었고, 동인지문은 산일된 부분이 많아 후대로 온전히 전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로부터 동문선간행의 계기가 무엇이었는지, 동문선의 체제는 무엇을 근거로 갖추어졌는지 등등을 추론해볼 수 있다. 물론 동문선과 같은 방대한 자료를 상기 두 가지 책에만 의거하여 완성하였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최소한 동문선의 큰 틀이 형성되는 데 동국문감동인지문이 미친 영향이 지대하였음은 부정할 수 없다.

 

 

 

 

동문선, 그 위대한 탄생

 

 

앞서 살펴보았듯 동문선은 국가가 공인한 최고의 시문선집이었다. 동문선이전의 시문선집들은 조선전기 문인 사회에서 방대한 고금의 시문을 충분히 섭렵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체제의 완결성 또한 떨어진다는 평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은 기존의 한계를 극복하고 동국 문장의 정수를 담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품은 채 국가적 차원에서 동문선편찬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러한 명성이 무색할 만큼 동문선의 시작과 구체적인 편찬 과정에 관한 기록은 소략하다.

성종의 묘지문[誌文]에서는 1478(성종 9) 성종이 고금의 시문을 모으도록 명하고 그 책을 동문선으로 이름한 것을 중요한 업적 가운데 하나로 꼽는다. 최초 발간된 정편(正編) 동문선서두에 편찬자를 대표하는 서거정과 양성지(梁誠之; 1415~1482)의 서문 및 전문(箋文)이 수록되었는데 그 작성 시점 또한 1478년이고, 현전하는 을해자(乙亥字)동문선의 간기(刊記)에서도 같은 해가 언급된 것을 볼 때, 동문선은 1478년 완성과 동시에 활자로 인간(印刊)되었던 것이 확실해 보인다.

문제는 조선에서 언제부터 동문선편찬 작업에 착수하였는가다. 이와 관련하여 1475(성종 6) 성종과 서거정이 나눈 대화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당시 서거정은 세상이 경박해짐에 따라 조선의 문장은 결코 고려에 미치지 못하고 명 또한 원의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비판적인 평을 내놓으면서 자신과 몇몇 사람이 뜻을 모아 신라 이래의 시문을 선별해놓았으나 아직 책으로 완성하지 못하였다고 이야기하였다. 이에 성종은 시문선집의 필요성에 공감하며 반드시 찬집하여 반포해야 한다고 답변하였고, 이듬해에는 노사신(盧思愼; 1427~1498) 등에게 동국 문인들의 시문을 모아 양성지가 바친 지리지(地理志)에 첨부하도록 하였다. 노사신은 훗날 서거정·양성지·강희맹(姜希孟; 1424~1483)과 더불어 동문선편찬 사업의 주역이 된 인물이다.

상기 사료를 통하여, 한국 고유의 시문을 비평·선별하여 찬집하는 작업은 처음부터 왕명에 따라 이루어졌던 것이 아니라 조선전기 국가전적의 발간과 보존, 유통을 담당한 관료들의 자발적인 움직임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수준 높은 시문을 보존하여 후세에 전하고 이로부터 가르침을 얻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기실 전근대 동아시아 국가에서 시문이란 단순히 작가의 개인적 영감을 구현한 것에 그치지 않았다. 물론 개인의 소회를 담은 시문 또한 예술 작품으로서 가치를 인정받았으나, 당시 시문에는 예술품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국가 의례를 위한 제문·축문·표문·조서, 관료제 운영 과정에서 생산되는 공문서, 국가 간 관계를 형성·유지하기 위한 각종 외교문서가 모두 선별·보존해야 하는 시문의 범주에 들었으며, 이를 총망라하여 시문선집을 발간하는 행위는 곧 국가의 대체(大體)를 확립하기 위한 문물 정비 행위와 다름없었다. 따라서 서거정 등의 자발적인 시문 수집과 선별 작업에 대하여 성종이 반색을 표하고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서거정·노사신·양성지·강희맹 등이 찬집한 동문선1478년에 을해자로 최초 인간되었다. 이를 정편 동문선이라고 부른다. 현전하는 정편 동문선의 판본들 가운데 1482(성종 13)년 인간된 것으로 추정되는 갑인자(甲寅字)본 또한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동문선은 국가적 차원에서 여러 차례 재간·반포된 것으로 추정된다. 1518(중종 13)에는 신용개(申用漑; 1463~1519)·남곤(南袞; 1471~1527) 등의 주도 하에 정편 출간 이후 생산된 우수한 시문을 보존·전수하려는 목적에서 속편이 발간되었는데, 이를 속동문선이라는 별칭으로 구별하기도 한다. 정편은 133(목록 3권 포함), 속편은 23(목록 2권 포함)으로 구성되어, 현전하는 동문선은 총 156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을 자랑한다.

동문선에 수록된 시문은 삼국부터 조선전기까지를 망라한다. 고구려의 을지문덕(乙支文德; ?~?), 신라 하대의 최치원(崔致遠; 857~?)을 비롯하여 각 시대별 대표 문인과 그들의 작품을 담고 있다. 동문선에 수록된 문체 또한 50종을 상회하는데, 편찬자들은 문체를 시문 분류의 중요한 기준으로 삼아 문체별로 편목을 구성하였다. 이처럼 동문선은 한국의 시문 역사를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자료다.

 

 

 

동문선의 권위와 사료적 가치

 

 

실록에는 최숙정(崔淑精; 1433~1480)동문선편찬 작업을 총지휘하던 서거정에게 작고한 자기 동생의 시문을 실어달라고 청탁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동문선찬집이 이루어지던 당시의 문인 사회에서는 동문선에 글을 올린 이력이 개인 나아가 가문의 영광으로 받아들여졌다. 동문선에 들어갈 시문을 선별하는 행위 자체가 문인들의 역량 또는 시문의 가치에 대한 국가적 공인과 다름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 동문선은 조선시대 전시기에 걸쳐 전장서와 같은 수준의 권위 있는 책으로 인식되었다. 국가 의례나 행정, 외교 등의 각 분야마다 미묘한 논쟁이 발생할 때 조선시대 사람들은 동문선에 수록된 시문 속에서 전례(前例)를 찾고 해결방안을 모색하였다. 따라서 1592(선조 25) 임진왜란 발발 시 선조는 실록과 역대의 각종 역사서, 그리고 동문선이 전소 또는 유실될 것을 우려하여 험지와 산 속에 나누어 깊이 매장할 것을 명하였다. 전쟁이 소강상태에 이른 후에는 반드시 도성으로 가져와 보존해야 할 서책으로 실록, 고려사(高麗史)·동국통감(東國通鑑)·여지승람(輿地勝覽)과 함께 동문선을 언급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동문선은 조선이 국가를 운영하며 고찰해보아야 할, 역대 왕조들의 제도·사상·학문을 총망라한 책이었다. 조선이 사라진 지금 이 시점까지도 동문선은 그 가치를 높게 평가받는다. 한국 고·중세 사료가 극히 빈약한 현실 속에서 고·중세 당대인들의 문화와 심성을 오롯이 전하고 있는 동문선은 한 줄기 빛과 같은 존재다.

물론 동문선에 사료적 한계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기본적으로 동문선은 후대인의 시각에서 시문을 선별하고 분류한 결과물이다. 성리학이 등장하고 동아시아의 일원적 국제질서가 확립된 이후의 세계에서 그 이전 세계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조선 중·후기 유학자들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유연하게 사고하였다고 알려진 서거정일지라도 다원적 국제질서 속에 존재하며 불교·도교 및 각종 토속신앙의 권위 또한 인정하였던 이전 왕조를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반드시 후세에 전해져야 했으나 동문선편집자들의 선택을 받지 못하여 전해지지 못한 귀중한 시문들도 존재할 것이다.

그럼에도 동문선은 현 시점에서 가장 방대한 분량의 일차사료를 담고 있는 책이기에 상당히 큰 사료적 가치를 갖는다. 시문선집이라는 특성상 각 시문별 고유의 문체를 존중해야 하였기에 후대의 개작이 상대적으로 적었고, 그 덕분에 현대에는 동문선을 통하여 일부나마 한국 고·중세 사람들의 직접적인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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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흥식, 1983 東文選編纂動機史料價値」 『진단학보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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