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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비의 친잠례(親蠶禮)

 

김보람(가천대학교 강사)

 


사진 : 親蠶儀軌(14543)

 

 

 

왕의 친경과 왕비의 친잠

 

 

조선은 농업과 길쌈이 경제 활동의 중심이 되는 농업 사회로서, 이를 장려하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 노력을 기울였다. 나라에서는 정기적으로 농업과 곡식의 신, 그리고 양잠의 신에게 제사를 올렸다. 농업과 곡식의 신을 모신 선농단(先農壇)과 누에의 신을 모신 선잠단(先蠶壇)은 종묘와 사직 다음으로 중시되었다. 이러한 선농제 및 선잠제와 결합되어 시행되었던 국가 의례로 친경례(親耕禮)와 친잠례(親蠶禮)를 들 수 있다.

친경은 왕이 농사를 직접 짓는 것이고, ‘친잠은 왕비가 직접 누에를 치는 것을 말한다. 왕은 새싹이 돋는 늦봄에 농민들과 함께 직접 소를 몰아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의식인 친경례를 행하였고, 왕비는 내명부와 외명부 여성들을 거느리고 잠실(蠶室)에 행차하여 직접 뽕을 따고 누에를 치는 의식인 친잠례를 행하였다. 이것은 통치자로서의 국왕과 국모로서의 왕비가 농업과 양잠의 중요성을 몸소 보여주면서 이를 장려하는 동시에 백성들과 그 고락을 함께한다는 것을 상징한다. 특히 유교 국가에서 왕과 왕비가 친경과 친잠을 통해 백성과 함께하는 모습을 연출한 것은 유교적인 왕도정치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방식이었다.

농업과 길쌈을 장려하기 위해 통치자들이 모범을 보이는 행위는 중국 고대부터 그 기록이 등장한다. 고대 중국의 유교경전인 예기에는 중국 주나라의 천자가 밭을 가는 모습, 후비가 몸소 누에를 치는 모습이 기록되어 친경친잠의 역사가 2,000년이 넘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중국 최초의 정사인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중국에서 황제의 친경과 황후의 친잠이 시작된 것은 한나라 초기부터라고 한다. 그리고 그 시행 배경은 농사는 천하의 근본이기 때문에 황제가 친히 적전에서 농사지어 종묘의 제물로 쓰는 곡식을 마련하고, 황후가 친히 뽕잎을 따서 제사 의복을 마련한다라는 고전의 이념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이는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미쳐 조선시대 친경과 친잠이 시행되는 이념적 배경이 되었다.

 

 

 

여성 노동의 상징, 뽕따기와 누에치기

 

 

조선시대 왕비는 국모로서 여성이 갖추어야 할 덕을 상징하였고, 왕비가 행하는 친잠례는 여성 노동을 상징하였다. 남녀유별의 유교 윤리에 따라 남성들은 밭에 나가 땅을 갈고 곡식을 생산하는 동안, 여성들은 집에서 길쌈을 하여 의복을 생산하였다. 길쌈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누에를 쳐야 했다. 봄에 부지런히 누에를 쳐서 실을 뽑아야 그 실로 가을에 좋은 비단 옷을 만들 수 있었다.

조선에서는 건국 초부터 양잠을 진흥시키기 위해 전국에 잠실을 두었다. 태종대에는 개성부 및 5개 도, 즉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 황해도, 전라도에 잠실을 설치하였다. 이후에는 강원도, 평안도, 함경도에도 잠실이 설치되어 운영되는 등 양잠에 대한 국가적인 차원의 관심이 컸다. 잠실은 도성 밖에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었다. 한양에도 동잠실과 서잠실 등을 두어 뽕나무를 심고 누에를 쳤다. 궁궐 안에도 잠실을 세우고 수천 그루의 뽕나무를 심었는데, 세종대 기록에 의하면 경복궁 안에는 뽕나무 3,500여 그루가 있었고, 창덕궁 안에는 1,000여 그루가 있었다고 한다. 왕비의 친잠은 주로 경복궁과 창덕궁 후원에 설치된 잠실에서 시행되었다. 왕이 도성 밖에서 친경을 시행한 것과 달리 왕비는 유교적인 내외법으로 인해 궁궐의 후원에서 친잠을 시행한 것이다.

친잠례에 앞서 양잠의 신인 선잠에게 제사를 올리는 의식이 행해졌다. 선잠은 중국의 전설적인 인물인 황제의 부인 서릉(西陵)이다. 서릉은 처음으로 인간에게 누에치는 법을 가르쳤다고 알려져 있다. 선잠제는 1400(정종 2)에 처음 시행된 이후 조선시대 동안 지속적으로 시행되었다. 선잠제는 제사의 대상은 여성이지만 왕비가 직접 주관한 것은 아니었다. 제사는 관원들이 대신 주관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는데, 이는 제사를 지내는 장소인 선잠단이 궁궐 밖에 위치해 있어 현실적으로 왕비가 참여하는 데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친경의 경우 왕이 직접 선농제를 지낸 후 친경을 시행하다가 선조대 이후에야 선농제와 친경이 분리되는 방식으로 전개된 반면, 친잠은 처음부터 선잠제와 분리되어 시행되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친잠례 시행의 배경

 

 

친잠례는 왕비가 중심이 되어 직접 뽕잎을 따고, 누에에게 뽕잎을 먹이고, 성충이 된 누에에서 고치를 거두던 일련의 의식을 의미한다. 조선에서 친잠례는 성종대, 연산군대, 중종대, 선조대, 광해군대, 영조대에 시행되었다. 최초의 친잠례는 1477(성종 8)에 시행되었고, 1767(영조 43)의 친잠례까지 모두 8차례 치러졌다. 조선시대 친잠의 사례 중에서 성종대와 영조대의 친잠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성종은 친경과 함께 친잠을 처음 시행했을 뿐 아니라 제도적으로 정립시킨 왕이었다. 그리고 영조는 오랫동안 시행되지 않았던 친잠례를 근 200년 만에 부활시켰다.

최초로 친잠례를 시행했던 성종대의 경우, 1474(성종 5) 공혜왕후 한씨가 승하하자 숙의 윤씨가 중전으로 책봉되었고, 윤씨는 1476(성종 7)에 아들, 즉 연산군을 출산하였다. 그러므로 1477년에 시행된 친잠례는 아들을 낳은 당시 중전 폐비 윤씨의 위상을 강화해주는 의미를 지닐 수 있었다. 이처럼 친잠례는 왕비가 누에치기의 모범을 보여서 양잠을 장려하는 의미를 갖는 동시에 왕비가 내외명부를 거느리고 의례를 시행한 만큼 왕비와 왕실의 위상을 강화하는 의미도 가지고 있었다.

친잠례는 광해군대 이래 전쟁을 비롯한 시대적 상황들로 거의 200년간 단절되었다가 영조대에 다시 시행되었다. 여기에는 영조대의 특별한 상황이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첫째, 고대 경전에 따라 고례를 회복하려는 영조의 의지가 배경이 되었다. 고대 중국의 유교 경전 가운데 주례예기에서는 친잠을 기록하면서, 왕후가 친잠을 주관하며, 누에치기가 여성이 해야 할 일이자 덕목임을 강조하였다. 영조는 이러한 고전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고례를 회복하기 위해 친잠례를 시행하도록 했다. 이는 유교적 이상정치를 구현하려는 영조의 목적과 관련된다.

둘째, 영조년간 꾸준히 추진된 국가제도의 정비가 친잠례 시행의 배경이 되었다. 영조는 조선왕조 창업 이래의 국가 제도와 문물에 대한 정비를 유교의 이상적인 정치인 요순의 정치를 구현하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영조대에 속대전국조속오례의를 간행한 것은 이러한 국제 정비의 결과물이자 역대 국왕들을 계승했다는 영조의 정통성을 과시한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친잠례 역시 친경례대사례양로연 등의 의례와 함께 국제 정비의 일환으로 중시되어 거행되었다. , 조선 전기 이래 시행이 중단된 것을 복원하여 왕조의 체제와 의례를 계승하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마지막으로, 중전의 위상과 왕실의 위상을 강화하기 위해 친잠례를 시행하게 되었다. 1759(영조 35), 66세인 영조는 15세가 된 김한구의 딸을 두 번째 왕비로 맞아들이게 된다. 영조는 어린 나이에 중전이 된 정순왕후를 중심으로 친잠례를 시행하여 왕비의 위상을 높이려 하였다. 나이가 어린 중전이지만 내명부의 수장으로 그보다 연장자인 왕실 여성들을 거느리고 의례를 주관하도록 함으로써 정순왕후의 위상을 과시하고자 한 것이다.

 

 

 

1767년 친잠례의 내용과 절차



영조대 시행된 친잠례에 대해서는 그 내용을 정리한 친잠의궤라는 기록물이 남아 있어 전체 진행 과정을 상세히 알 수 있다. 1767년의 친잠례는 310일 경복궁 옛 터에서 시행되었다. 당시 친잠은 약 200년 만에 재현되는 것이어서 먼저 과거의 선례부터 살펴야 했다. 영조는 조선왕조실록의 편찬을 담당한 부서인 예문관의 관원을 강화도로 보내어 친잠과 관련된 기록들을 실록에서 뽑아오도록 했다. 이때 영조가 주목했던 사례는 성종대에 이루어진 친잠이었고, 이를 바탕으로 준비를 하도록 명하였다. 가장 가까운 시기인 광해군의 사례는 그가 폐군(廢君)이라는 점에서 인정받지 못하였다.

이전과 구별되는 영조대 친잠의 특징은 선잠단 친제와 친잠을 결합시켰다는 것이다. 영조는 경복궁 근정전 근처에 2개의 단을 설치하도록 했는데, 하나는 제사를 지내는 선잠단이고 다른 하나는 친잠을 거행하는 채상단이었다. 보통은 신하들이 대신 선잠제를 지내고 왕비가 친잠을 하여 양자가 분리되었지만, 영조는 왕비가 직접 제사와 의식을 모두 주관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방식에 대해 신하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영조는 왕비가 친제를 하지 않은 채 친잠만 시행할 경우 남들에게 보이는 형식적인 행사에 그쳐 그 의미가 떨어진다고 보았다. 다만 그 방식은 경복궁의 단에서 선잠에게 술을 올리는 작헌례를 시행하도록 하였다. 작헌례이기는 하지만 중전이 직접 의식을 진행한 것은 국모로서 중전의 위상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1767년의 친잠 의식은 행사 준비, 왕비의 출궁, 선잠단에서의 작헌례, 친잠 의식, 조현 의식, 왕비의 환궁의 단계로 진행되었다. 친잠례에서 핵심이 되는 의식은 선잠제와 친잠 의식이었다. 선잠제는 중전의 작헌례로 시행되었다. 아래 그림과 같이 작헌례를 위해 설치한 단에 신위를 남쪽 방향으로 세우고, 축판, 향로와 향합, 제기 등 제사 관련 물품들을 신위 앞에 올려놓았다. 작헌례에 올려진 제수는 사슴고기로 만든 포와 사슴고기로 담은 젓이었다.




사진 : 親蠶儀軌(14543) 1158

 

 

친잠 의식은 참여자들이 뽕잎을 따서 누에에다 먹이는 의식이다. 뽕잎을 따는 단을 채상단이라고 하는데, 중전은 단 위에서 뽕잎을 따고, 혜빈(혜경궁 홍씨) 이하는 단 아래에서 뽕잎을 따도록 하였다. 뽕잎을 따는데 필요한 갈고리와 광주리는 유교 경전인 시경을 바탕으로 제작하고, 아래와 같이 그림을 통해 이해를 돕도록 했다.




사진 : 親蠶儀軌(14543) 1161-162

 

 

먼저 중전이 갈고리를 이용해 뽕잎 5가지를 따서 광주리에 넣는다. 중전이 뽕잎 따기를 마치면 혜빈과 왕세손빈 및 내외명부가 차례로 뽕잎을 따는데, 혜빈과 왕세손빈은 각기 7가지의 뽕잎을 따고, 외명부는 9가지의 뽕잎을 딴다. 중전과 혜빈 이하 참여자들이 딴 뽕잎의 가지는 성종대 친잠의 선례를 따른 것으로 철저한 위계질서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 행사의 주관자인 중궁이 만민의 국모라는 의식을 공식적인 행사를 통해 부각시켰던 것이다. 이후 혜빈 이하는 잠실로 가서 잘게 썬 뽕잎을 누에에게 뿌려서 먹게 하고 다시 자리로 돌아오면 의식이 끝난다.

 

 

 

친잠례의 역사적 의의



친경과 친잠은 조선시대 일상적인 의례로 시행되지는 않았다. 조선시대 친경의 사례는 15차례에 불과했고, 친잠은 더 적은 8차례에 불과했다. 이것은 종묘나 왕릉에 대한 제사와 비교하면 상당히 적은 편이다. 왕이 친경친잠을 행하면 드문 경사라고 말하면서 반드시 축하연을 베풀고 백성에게 사면령을 내렸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이런 점에서 친경친잠은 국왕의 입장에서 볼 때 왕권 강화라는 정치적인 측면에서의 활용도가 높았다. 실제로 친경친잠 의례를 통해 국왕과 왕실의 위상을 재정립할 수 있었고, 백성들에게는 그들의 생업을 걱정하고 윤택한 삶을 위해 왕실이 모범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천명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 대부분의 국가 의례에서 일반 백성들의 참여는 배제되어 있었다. 그러나 친경친잠례는 일반 백성도 참여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친잠례의 경우, 뽕잎을 따는 사람은 왕비로부터 내외명부까지로 한정되었지만, 딴 뽕잎을 잘게 잘라서 누에를 치는 존재인 잠모(蠶母)는 일반 농민 아낙네들이었다. 이들은 왕비가 친잠할 때 직접 눈앞에서 옥안을 볼 수 있었고, 의식이 끝난 후에는 왕비가 하사하는 음식을 먹는 특권을 누렸다. 친잠례를 통해 왕실과 일반 백성들이 소통하는 장이 마련될 수 있었다.

 

 

 

참고문헌

 

 

신명호, 조선 왕실의 의례와 생활, 궁중 문화, 돌베개, 2002.

임혜련, 조선 영조대 親蠶禮 시행과 의의-1767(영조 43) ‘丁亥蠶禮을 중심으로, 규장각25,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11.

한형주, 밭 가는 영조와 누에 치는 정순왕후,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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