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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내가 살아가는 지역에 대한 기록 : 임실읍지

 

장석현(한성대학교 인문과학연구원 학술연구원)

 


사진 : 任實邑誌(想白古915.14-Im8)

 

 

 

내가 살아가는 지역을 기록하다 : 읍지(邑誌)

 

 

읍지는 왜 만들었을까 

 

 

고을에 읍지가 있는 것은 국가에 역사가 있는 것과 같다.” (이준, 상산지(商山誌)

 

 

읍지는 우리가 살아가는 지역(고을)의 자연환경과 인문현상을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기록한 것이다. 지역의 역사와 지리 정보 및 유명 인사와 효자·충신에 대한 인물정보를 담고 있으며 동시에 당시 지역의 논밭 규모(전결수), 병사의 수 등 통치에 필요한 행정기록들도 망라하고 있다. 이처럼 다양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면, 사실상 조선시대의 읍지는 오늘날 많은 시와 군에서 편찬하는 지방지와 그 성격이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사람들은 왜 읍지를 작성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읍지의 기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선시대 지방의 관청이 주축이 되어서 편찬한 읍지(관찬읍지官撰邑誌)는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대 왕조에서 만들었던 역사서 중 지리지(地理志)로부터 유래한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의 고대국가 한나라의 역사를 담고 있는 한서(漢書)에는 최초로 지리지를 하나의 장으로 담고 있다.

한서지리지에는 중국 고대 황제(黃帝)때부터 한나라 초기까지 중국 강역의 변천 상황과 주((()등의 행정구역, 그리고 당시의 풍속과 경제 등을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한나라는 지리지의 편찬을 통해 지방을 상세히 파악하고자 했으며, 이를 기반으로 조세의 수취와 역()의 징발 등 국가의 지방통치에 활용하고자 했다.

이러한 의도로 작성되었던 지리지는 한나라 이후의 국가에서도 이어졌다. 특히 한반도의 국가에서도 여러 지리지가 작성되었는데, 대표적으로 삼국사기(三國史記)지리지와 고려사(高麗史)지리지가 있으며, 조선 초기에는 팔도지리지(八道地理誌)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가 편찬되었다. 1487(성종 18)에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발간해 전국 지역의 자연·인문관련 정보를 상세히 작성했다. 이로 볼때 중국의 고대국가부터 한반도의 조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국가에서 지리지 편찬을 상당히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읍지제작의 중요성에 대해 조선초기의 문신 김종직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천하에는 천하의 그림이 있고, 일국(一國)에는 일국의 그림이 있으며, 일읍(一邑)에는 일읍의 그림이 있는 것인데, 읍도(邑圖)가 수령에게는 매우 절실한 것이다. 대체로 그 산천(山川)의 동서남북의 길이와 호구(戶口)의 많고 적음과 간전(墾田)의 남고 모자람과 도리(道里)의 멀고 가까움을 여기에서 상고하여 백성들에게 세금을 징수하는 데 있어 조용조(租庸調)를 균평하게 매겨 받아서 공상(公上, 官家)을 받들게 하는 것이니, 어찌 이것을 하찮게 여길 수 있겠는가. ” (김종직, 점필재집(佔畢齋集)2 () 경상도지도지(慶尙道地圖誌))

 

 

이처럼 조선의 유학자들은 지방을 통치하는 것에 있어 지역의 현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림과 글을 동시에 사용하여 명확한 기록을 남기는 것을 중시했다. 김종직의 언급에 비추어 보면, 읍지편찬의 주요 목적은 호구(戶口)와 전답(田畓)의 정확한 파악으로 백성에게 균평한 세금을 징수하는 것에 있었다. 즉 읍지의 편찬은 국가의 지방통치에 있어 필수적인 것이었다.

 

조선시대의 읍지

 

조선은 건국초기 지리지를 편찬하여 전국 각 읍의 자연환경과 토산물, 그리고 지역에 거주하는 양반들의 성씨를 기록하였다. 이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다시한번 읍지가 대거 편찬되었다. 양란을 거치며 조선의 국토 대부분은 황폐화되었고, 기존 지방사회의 모습은 크게 바뀌었다. 전란 이후 국토를 재건하는 기간을 거치며 조선의 조정에서는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게 된 지방을 다시금 상세히 조사해야할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그에 따라 17세기 말 이후부터 국가가 주도하여 전국의 읍지를 편찬했다.

17세기 말~18세기 초에 해당하는 숙종조는 전란으로 피폐해진 국토를 재건한 이후 재정과 법전, 관방(關防) 등 문물제도의 정비와 통치질서의 확립이 이루어진 시기였다. 또한 청과의 긴장관계가 일정정도 해소되는 가운데 전란의 위험이 사라지면서 백성들은 두만강변과 내륙 산악지대로 진출해 농경지를 개척했다. 이처럼 17세기 말의 시기에는 조선의 영토 내에서 새로운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이러한 변화에 대처하고자 전국 지리지와 읍지를 편찬했다.

전국적인 읍지 편찬 작업은 전국의 각 고을을 동일한 원칙에 따라 파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특히 전국의 고을들은 이미 조선전기에 편찬된 관찬 지리지(읍지) 편찬한 경험이 누적되어 있고, 16~17세기를 중심으로 유형원의 동국여지지(東國輿地誌), 한백겸의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등 각 지방의 양반들과 수령을 중심으로 사적으로 읍지가 발간되었기 때문에 전국적인 관찬읍지의 편찬으로 이러한 사찬읍지를 국가차원으로 단일화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숙종조에는 전국 단위의 읍지인 여지승람(輿地勝覺)을 증보·개간하여 조선후기 국가의 행정과 재정상황을 반영하고자 했으며 지역 향리 및 노비의 수와 문과·무과 등 과거출신자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정보를 담고자 했다. 이러한 의도에서 조정에서는 읍지편찬을 지시했으며, 그 작업을 실제로 담당한 지방의 양반들은 읍지를 편찬하면서 자신들의 조상을 인물과 효자, 열녀 등에 수록해 향촌에서의 권위를 확보하고자 했다. 그에 따라 지방의 양반들은 중앙에서 하달한 범례와 사목(事目, 작성규칙)에 따라 관찬읍지를 편찬하는 동시에, 이것과는 다른 형태의 사찬읍지를 편찬하기도 했다. 여기에서 주목하려는 임실읍지는 중앙의 요구에 따라 임실지역 양반들이 수령과 함께 작성한 관찬읍지이며, 그들은 별도로 운수지(雲水誌)라는 이름의 사찬읍지를 발간했다.

한편 숙종대에 간행하고자 했던 여지승람의 증보판은 현실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숙종 재위기간 내에 완성하지 못했다. 전국적인 읍지의 편찬은 영조대에 이르러서야 가능했다. 영조와 정조 시기에는 국왕을 중심으로 관료제를 강화하고, 탕평책을 통해 신하를 통제했으며, 임금이 직접 성리학의 스승(군사君師)이 되어 정국을 주도했다. 이러한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영조는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한 의도에서 다시금 전국의 읍지 편찬을 추진했다. 1759(영조 35) 홍문관에서는 읍지의 표준 양식을 작성해 각 고을에 내렸는데, 이 시기 이후 지방에서 작성된 읍지는 대체로 이 형식을 따르고 있다.

조선시대에 작성된 읍지는 지역의 역사를 고찰하고 능묘와 비각 등 사적을 정비하며, 충신과 효자, 열녀를 포상하기 위한 근거자료로 활용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는 각 고을의 지방행정을 파악하기 위한 각종 장부의 내용과 고을지도, 호구수와 전결수 등이 명확하게 기재되어 있었다. 이러한 관찬읍지와 사찬읍지는 지방 수령이 자신이 맡은 고을의 역사와 지리정보, 행정 사항 등을 확인하는 등 지방통치의 주요한 자료였다. 또한 각 지방의 양반들은 읍지에 자신의 선조를 실음으로써 지방사회에서 양반으로서의 사회적 권위를 확보하고, 이를 기반으로 지방사회를 통제하고자 하였다.

 

 

 

임실지역에 대한 모든 것을 기록하다 : 임실읍지

 

 

지금까지 조선시대에 전국적으로 읍지가 작성되었던 이유와 그 과정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실제 읍지의 내용은 어떻게 이루어져 있을까?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오늘날 전라북도 임실군과 관련한 읍지 임실읍지(任實邑誌)(청구기호: 想白古915.14-Im8)를 통해 알아보자.

임실읍지1865(고종 2) 즈음에 작성된 관찬읍지로 전라도 임실현(任實縣)에 대한 많은 내용이 수락되어 있다. 임실읍지에 수록되어 있는 항목은 다음과 같다.



 

 

임실읍지40여 개의 항목으로 구성되어 작성된 당시의 현황을 세부적으로 명시되어 있다. 이 내용을 구분해서 살펴보면 크게 4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임실지역의 역사와 자연환경




사진 : 임실읍지5

 

 

수령이 지방을 통치하는 데에 있어 그 지역의 산천과 연혁을 살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자신이 다스리는 고을의 인문적 배경과 자연적 환경을 명확히 인지하는 것은 지방의 수령이 수월하게 지방을 통치할 수 있는 배경이 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임실읍지에는 임실현의 연혁과 자연환경에 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우선 이 지역의 역사에 대해 삼국시대 백제의 청웅현(靑雄縣)이 통일신라 때에는 임실군으로 개칭되었고 이후 고려시대에는 남원에 속하는 지역으로 감무를 파견했으며, 조선시대에는 현감을 두었음을 밝히고 있다. 또한 이 지역의 자연환경으로 성수산(聖壽山)과 고달산(高達山), 용요산(用繞山) 등의 여러 산과 오원천(烏原川) 등의 천이 흐르고 있음을 명시했다.

 

임실지역의 행정




사진 : 임실읍지13, 14

 

 

임실읍지에는 수령이 지역을 다스리기 위한 수많은 행정관련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우선 지역의 지리와 관련해 임실지역에 존재하는 18개의 면과 도로, 교량(다리), 역원(驛院)이 기록되어 있다. 특히 역원의 경우 임실지역이 주요 교통로 중 어디에 속해있으며 그 역을 관리하는 관리와 말의 수, 노비의 수도 상세히 적혀있다. 또한 읍지에는 임실지역의 관청과 객사, 향교와 제사공간의 위치 및 관리인의 수 등이 명시되어 있다.

한편 임실읍지에 적혀있는 행정관련 기록 중 가장 중요하면서 상세한 기록은 바로 부세(賦稅)와 관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는 매년 4차례에 걸쳐 중앙에 제례용으로 바치는 진공품(進貢品)의 목록과 병조와 훈련도감·어영청·수어청·금위영 등 중앙의 군문 및 지방 감영에 상납하는 돈과 포의 수도 상세히 적어놓고 있다. 또한 읍지가 작성된 당시의 호구수(6,418)와 논밭의 총면적인 전총(田總)’, 그리고 그 논밭에서 거두는 세액인 전세(田稅)’, 대동세와 균역세의 납세액 등이 세부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행정과 관련된 구체적인 수치 및 기록들은 수령이 지역민에 대해 부세를 수취하는 데에 있어 근거자료로 활용되었다.

 

임실지역의 군사



사진 : 임실읍지17

 

 

수령이 지역을 통치하는 데에 있어 경제적인 요인만큼 중요한 것이 군사적 요인이다. 임실읍지에는 읍지가 작성되던 당시 임실지역의 군사 현황도 상세히 명시하고 있다. 우선 임실현 관청에서 보관하고 있는 군기와 임실현 내 위봉산성(威鳳山城)에서 보관 중인 군기를 나누어서 기록하였고, 관군과 보병, 속오병, 수군 등 여러 분류로 구분해 군역을 징발할 수 있는 백성의 수를 적어놓았다.

 

임실지역 역대 수령의 명단




사진 : 임실읍지21

 

 

임실읍지의 마지막에는 역대 임실현감을 지낸 이들의 이름과 본관, 부임일자와 체직일자를 적어놓은 선생안(先生案)이 자리하고 있다. 1445(세종 27)에 부임한 이사겸(李思謙)부터 1805(순조 5)에 부임한 서증보(徐曾輔)까지 154명이 수록되어 있다. 선생안은 역대 임실현감(군수)를 역임한 이들의 명부로 책임 있는 지방통치를 수행하려는 목적에서 작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임실문화원, 2012 운수지(雲水誌).

이재두, 2021 조선후기 관찬읍지 연구, 경북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김철배, 2022 18세기 임실현 관아의 규모와 변천- 1730운수지(雲水誌)를 중심으로-」 『전북사학64, 전북사학회.

이재두, 2022 조선후기 읍지 편찬 흐름과 읍지 통합 작업 - 경산지역 경산·자인·하양 세 고을을 중심으로」 『영남학81,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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