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푸터 바로가기
이전

조선의 개화를 꿈꾸었던 외로운 지식인

- 유길준, 『서유견문(西遊見聞)』 -

 

 

 

18669월 프랑스 함대사령관 피에르 로즈 제독이 이끄는 군함 3척이 인천 앞바다를 거쳐 양화진(지금의 서울 합정동)에 등장하였다. 무장한 프랑스 군함과 군인들이 서울의 지척에서 발견되자 관민은 그야말로 발칵 뒤집혔다. 조정에서는 곧장 방어태세를 갖추었고 서울에 거주하고 있던 일부 백성들은 피난길에 올랐다. 그리고 그 피난 행렬에는 11살 소년 유길준도 포함되어 있었다.

화포로 무장한 서양 군함의 위협에 서울을 떠나야만 했던 유길준은 어떠한 생각을 하였을까? 두렵고 불안한 마음이 들면서도 무기력한 현실에 분노를 느끼지 않았을까? 격변기 조선의 사상가이자 정치가 유길준에게 근대는 그렇게 다가왔다.

 

 

 

 

 

 

과거를 포기하고 개화사상에 눈뜨다

 

유년시절 유길준은 소문난 영재로 이름을 날렸다. 아마도 아버지 유진수는 아들 유길준이 문과에 합격하여 집안의 명예를 드높이길 바랐을 것이고, 유길준 역시 그런 기대에 부응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런데 1871년 박규수를 만나게 되면서 유길준의 인생은 180도 바뀌게 되었다. 유길준의 총명함을 눈여겨봤던 박규수는 1874년 정계 은퇴 후 그를 사랑방으로 초대하였다. 그곳에는 김윤식, 어윤중,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 개화파로서 향후 정국을 주도해나갈 인재들이 모여 있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유길준을 충격에 빠뜨린 것은 해국도지라는 한 권의 책이었다.

해국도지는 청나라의 사상가 위원(魏源)의 저서로 세계의 역사와 지리 정보를 담고 있다. 위원은 오랑캐의 뛰어난 기술을 본받아 오랑캐를 제압하기 위해이 책을 저술하였다고 소개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오랑캐란 서양인을 뜻하는 것으로, 아편전쟁 등 서세동점의 상황이 시대적 배경이 되었다. 당시 해국도지를 접한 조선의 지식인들은 자신들이 우물 안 개구리였음을 깨닫고 충격을 받았는데, 유길준 역시 그들 중 한 명이었다.

유길준은 이내 자신이 여태껏 해왔던 공부가 시대착오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곧장 과거 공부를 중단하고 해외에 대한 견문을 넓히는 것에 열중하기 시작하였다. 장밋빛 미래를 포기하고 새로운 시대적 흐름에 자신의 몸을 내맡긴 것이다.

 

 

 

 

 

최초의 유학생으로 개화세계를 경험하다

 

18813, 부산에 64명의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임무도 모른 채 국왕 고종으로부터 밀명을 받고 이 자리에 모인 것이었다. 부산에 도착하여 고종이 하사한 봉서를 뜯어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일본인의 조정의론, 국세형편, 풍속인물, 교빙통상 등에 대해 탐지하는 것이 좋겠다.

일본 배를 타고 그 나라로 건너가 해관이 관장하는 여러 일들을 견문하되,

시간의 길고 짧음은 신경 쓰지 말고 낱낱이 탐지해서 이를 별단으로 보고하라.

- 고종의 봉서 -

 

 

이들의 임무는 바로 일본에 가서 문물을 살펴보고 오는 것으로, 오늘날 조사시찰단이라 부른다. 고종은 개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시찰단을 파견하고자 하였지만 당시 보수파들의 반대에 직면하여 이와 같이 비밀스러운 방식을 취한 것이었다. 이 시찰단에는 박정양, 홍영식, 어윤중 등 개화파 인물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는데 유길준 역시 어윤중의 수행원으로 동참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4달 뒤 임무를 마친 시찰단원들은 본국으로 귀환하였지만 유길준과 유정수, 윤치호, 김양한 등은 일본에 남아 유학생활을 시작하였다. 최초의 일본 유학생이 된 것이다.

유길준은 매형 유정수와 함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가 운영하는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에 입학하였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1860년대 3차례에 걸쳐 미국과 유럽을 여행하면서 근대 문명을 체험하였고, 이를 토대로 문명개화론자가 되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유길준에게도 큰 영향을 미치는데 이에 대해서는 잠시 뒤에 살펴보겠다.

유길준의 첫 번째 유학생활은 임오군란과 함께 막을 내렸다. 즉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민영익의 권고로 18831월 수신사 박영효와 함께 귀국길에 오른 것이다. 서울에 도착한 유길준은 한동안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주사로서 한성순보발간의 책임자가 된다. 그리고 같은 해 7월 보빙사 민영익의 수행원으로 미국을 방문하게 되는데 민영익의 권유로 또 다시 미국에 남아 유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최초의 일본 유학생에 이어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 된 것이다.

 

 

 


<그림> 보빙사 일행. 출처 : 위키피디아.

뒷줄 왼쪽에서 3번째가 유길준이다. 

앞줄 왼쪽부터 퍼시벌 로웰, 홍영식, 민영익, 서광범 등도 보인다.

 

 

유길준은 생물학자 에드워드 모스의 개인지도를 받다가 이후 담머학교에 입학하였다. 하지만 두 번째 유학생활도 그리 길게 이어지지는 못했다. 188412월 갑신정변이 일어났는데 뜻을 같이 하던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이 이에 연루되었기 때문이다. 유길준은 대학진학을 포기한 채 이듬해 6월 귀국길에 올라 영국, 이집트, 싱가포르, 홍콩, 일본 등을 경유하여 12월 제물포에 도착하였다.

 

 

 

 

 

정치적 위기 속에 서유견문이 탄생하다

 

유길준은 귀국하자마자 개화당으로 지목되어 체포되었지만 한규설과 민영익의 보증으로 목숨만은 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사실상 정치적으로 연금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연금 생활은 1894년 갑오개혁 전까지 지속되는데 이 9년의 시간은 정치인 유길준으로서는 암흑의 시간이었지만 사상가 유길준으로서는 자신의 재능을 꽃피울 시간이었다.

유길준은 귀국 직후부터 저술활동에 전념하기 시작하였는데, 중립론(中立論), 국권(國權), 지제의(地制議), 세제의(稅制議), 어채론(漁採論)등을 차례로 발표하였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유길준을 대표하는 저작은 1889년 완성한 서유견문이었다.

유길준은 일본 유학 시절부터 자신의 견문을 책으로 저술하려 하였지만 번번이 원고를 분실하여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하지만 1887년 가을부터 남아있는 원고를 수습하고 후쿠자와 유키치의 서양사정(西洋事情)및 헨리 포셋의 부국책(富國策), 헨리 휘튼의 만국공법(萬國公法)등을 참고하여 마침내 서유견문을 완성하였다.

유길준은 서유견문속에서 다양한 참고문헌을 인용하였다. 하지만 단순히 인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외국과 우리 문화를 비교하며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는데 힘을 쏟았다. 또 국한문혼용체를 사용하였는데 이는 세종이 창조한 한글을 통해 더 많은 사람에게 자신의 주장을 전달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유길준, 진정한 개화를 외치다

 

 

 


<그림> 서유견문 14편 중 개화의 등급. 

출처 : 국립중앙도서관

 

 

서유견문은 모두 20편으로, 세계의 지리로부터 시작하여 서양의 정치, 경제, 교육, 군대, 학문, 상업, 도시 등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단순히 소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주장을 곁들이고 있다. 이를 통해 유길준이 진정으로 모색하였던 개화에 대해 살펴볼 수 있다.

사실 유길준의 개화사상을 논함에 있어 후쿠자와 유키치의 영향을 빼놓을 수 없다. 유길준은 1881년 일본 유학 시절 이미 후쿠자와로부터 학문을 배웠으며 서유견문에서도 후쿠자와의 서양사정을 다수 번역해 인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1895년 후쿠자와가 운영하고 있는 코쥰사[交詢社]에서 서유견문을 정식으로 출간하기도 하였다. 즉 유길준의 서유견문은 후쿠자와와 매우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유길준은 후쿠자와의 주장을 답습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와 차별화된 개화사상을 펼쳐나갔다.

후쿠자와는 역사를 살펴보건대 정치의 발전은 때때로 멈출 때도 있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결국 선을 향해 나아간다는 역사주의적 입장을 표방하였다. 그리하여 인류는 야만에서 반개(半開)를 거쳐 개화의 상태로 나아가야 했다. 하지만 후쿠자와는 인류 보편의 문명개화 대신 일본을 선택하였다. “우선 일본이라는 나라와 일본의 인민이 살아남아야 그 문명을 말할 수 있다. 나라도 없고 사람도 없다면 일본의 문명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렇게 국가주의로 선회한 후쿠자와에게 남겨진 진보의 길은 서양 제국주의로의 편입이었다. “오늘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우리나라가 이웃 나라(중국과 조선)의 개화를 기다려 함께 아시아를 일으키려고 머뭇거릴 시간은 없다. 오히려 그 대오에서 벗어나 서양의 문명국과 진퇴를 같이하고, 중국과 조선을 대하는 방법도 바로 서양 사람들이 이들을 대하는 방식에 따라 처분해야 할 따름이다.” 결국 후쿠자와가 도착한 종착지는 제국주의였으며, 청일전쟁은 문명국 일본이 반개상태의 중국을 물리치고 조선을 지도하는 신성한 전쟁으로 포장되었다.

 

 

개화란 인간 세상의 천만 가지 사물이 

지극히 선하고도 아름다운 경지에 이른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어떤 것이 개화된 경지라고 한정할 수 없다. (중략)

고금을 통틀어 세계 어느 나라를 살펴보더라도 

개화가 지극한 경지에까지 이른 나라는 없었다. (중략)

반쯤 개화한 자를 권하여 개화하게 만들어주고

아직 개화하지 않은 자를 가르쳐서 깨닫게 하는 것이 

개화한 자의 책임이자 직분이다.

개화하는 일은 남의 장점을 취하는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훌륭하고 아름다운 것을 보전하는 데에도 있다. (중략)

지나친 자는 아무런 분별도 없이 외국의 것이라면 모두 다 좋다고 생각하고,

자기 나라 것이라면 무엇이든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외국을 칭찬하는 나머지 

자기 나라를 업신여기는 폐단까지 있으니

이들은 개화의 죄인이다.

모자라는 자는 완고한 성품으로 사물을 분별치 못하고

외국 사람이면 모두 오랑캐라 하고 

외국 물건이면 모두 쓸데없는 물건이라 하며,

외국 문자는 천주학이라 하여 가까이하지도 않으니 이들은 개화의 원수다. (중략)

개화하는 것에 있어서 지나친 자의 폐해가 모자라는 자보다 더 심하다.

그 까닭은 지나친 자가 더 빨리 나라를 위태롭게 하고,

모자란 자는 더디게 위태롭게 하기 때문이다.

- 서유견문14-

 

 

한편 유길준은 개화를 지극히 선하면서 아름다운 경지라고 정의하였다. 그러면서도 지극한 개화란 사실상 달성 불가능한 이상향의 세계로 규정하였다. 즉 상대적으로 개화되었다 하더라도 끊임없는 자기 발전에 대한 모색을 강조한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개화는 분별없이 다른 문명을 베껴오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고유의 문명과 결합시키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 과정에서 지나치게 다른 문명을 옹호하는 자는 개화의 죄인이며, 지나치게 다른 문명을 배척하는 자는 개화의 원수라고 명명하였다. 그러나 두 가지 잘못 중에선 주체를 상실해버린 전자를 보다 큰 폐해로 보았다.

유길준의 입장에서 개화란 끊임없는 자기 혁신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또한 상대적으로 앞서 개화한 자들은 개화되지 못한 자들을 도와 함께 개화해야만 하는 의무를 가지게 된다. 여기에서 유길준은 후쿠자와의 국가주의와 결별하고 인류 보편의 문명개화를 도모한다. 또한 다른 문명의 장점만 취하려 하는 자를 개화의 죄인으로 규정하고 각기 고유한 문화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끝내 이루지 못한 이야기

 

서유견문을 통해 독자적인 문명개화론을 주장하였던 유길준이었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역설적이게도 유길준은 동학농민전쟁이 발발하고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면서 정치권에 복귀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경력으로 인해 유길준은 친일파로 몰리기도 하였지만 실제 유길준의 정치적 행보를 살펴보면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유길준은 일본이 내정개혁을 강요하자 일본군이 철병해야 개혁에 착수할 것이라고 항의하였다. 또한 갑오개혁의 추진 과정에서 일본의 원조에 의존해야만 하는 상황을 항상 부끄러워하였다. 즉 유길준은 정치적 고결성 대신 조선의 개혁을 선택했던 것이다.

하지만 유길준의 의도와는 별개로 1896년 고종의 아관파천이 이루어지면서 기존 내각 구성원들의 입지는 위태로워졌다. 유길준은 은신생활을 하며 후일을 도모하려 했지만 고종은 이들을 역적으로 규정하고 모조리 잡아들일 것을 명령하였다. 결국 유길준은 일본으로의 망명을 결정하였고 10년 이상 일본에 체류하게 되었다.

유길준은 일본에서도 조선의 내정 개혁을 기획하였다. 유길준이 꿈꾸었던 새로운 정부는 입헌군주제로서 고종 황제의 지위를 인정하되 이용익과 강석호 등 간신배들을 제거하고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유길준의 시도는 사전에 발각되었고, 유길준은 일본 내에서도 오지에 위치한 섬에 송치되었다.

유길준은 1907년에 이르러서야 조선으로 귀국하였다. 이때 조선은 고종이 강제 퇴위되고 순종이 즉위한 상태로, 이미 일본의 보호국화된 후였다. 유길준의 귀국 역시 일본 외무성의 결정에 의해 추진되었으며, 유길준은 귀국 이후에서야 조선 조정의 사면을 받게 되었다. 귀국 후 유길준은 조선과 일본 정부 양측에서 견제를 받았기 때문에 공직에 복귀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구국을 향한 그의 신념은 멈추지 않았다. 유길준은 제한된 상황에도 흥사단융희학교한성부민회 등을 조직하며 조선의 국력을 신장시키기 위한 계몽운동에 전념한 것이다. 하지만 1910년 유길준의 노력과는 별개로 조선은 일본에 병합되었고, 일제는 그에게 남작의 작위를 수여하였다. 유길준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은 일본의 작위를 거부하는 것이었다.

 

 

 

 

 

 

 

 

참고문헌

 

유길준 지음, 허경진 옮김, 서유견문, 서해문집, 2004.

한철호, 俞吉濬生涯思想, 韓日關係史硏究36, 2000.

최덕수, 서거 100주년 유길준 연구의 현황과 과제, 韓國史學報53, 2013.

박근갑, 역사문명진보 - 후쿠자와 유키치와 유길준의 시간 인식, 史叢83, 2014.

양진아, 유길준의 일본 망명과 귀국 과정, 韓日關係史硏究72, 202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