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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여명에서 과거의 정치를 돌아보다

- 이건창, 당의통략(黨議通略)-

 

 

 

 

사진 : 당의통략(4250-106-v.1-2)

 
 

 

 

 

당론서의 유행과 당의통략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정치적 지지성향에 따른 많은 논의와 주장들을 접한다. 일례로 특정 정치적 성향에 입각한 언론, 혹은 해당 정치 성향을 가진 지식인의 서적, 각종 게시판의 게시글 등을 입수, 공유하며 이를 통해 정치적 상황을 이해하고 혹은 자신의 의견을 정립한다. 이와 같은 상황은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개별 당파의 지식인들은 자 당파의 정당성을 호소하기 위해 여러 저서 혹은 논설 등을 저술하게 되는데 이것을 당론서(黨論書)’라고 한다.

조선시대의 경우 현대사회와 달리 소식을 바로 접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또한 중앙정치의 동향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접근하기도 어려웠다. 일례로 지금의 우리는 승정원일기, 조선왕조실록, 비변사등록등의 중앙 사료에 접근할 수 있을뿐더러, 전산화된 결과물들을 앉아서 검색까지 할 수 있지만 과거의 사람들은 아니었다. 중앙의 조보(朝報 : 지금의 관보)와 같은 파편적 정보조차도 지방의 지식인들은 고대하며 기다려야 했다. 따라서 정보의 제한 속에서 각자가 입수하는 당론서는 현대에 비해 개인의 정치상황 이해와 시각 형성에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당의통략(黨議通略)은 소론계열 지식인의 후예인 이건창(李建昌 : 1852~1898)1890년경에 완성한 책으로 조선 후기 당론서의 전통을 이어가면서도 근대의 여명기에 가장 최종적으로 나온 당론서이다. 특히 여전히 자료나 정보 등의 제한이 여전했던 근대 초기에는 당의통략은 단순한 당론서를 넘어서 일종의 개설서, 정리서의 역할을 겸하기도 하였다. 특히 당의통략원론(原論)등은 시데하라(幣原垣)한국정쟁지와 같은 일본인 학자는 물론 이병도 등의 한국 근대 사학의 시조들에게도 중요 자료로 간주되어 현대 한국인의 당쟁관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경종의 우애혹은 당쟁을 탄식하고 비판하는 선조등과 같은 주제에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당쟁에 관련된 여러 일화와 상식 등은 국가의 공식 기록이라기보다는 당의통략에서 나온 내용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처럼 큰 영향을 미친 당의통략은 과연 어떤 책일까?

 

 

 

 

 

불편부당(不偏不黨)’ - 과연 그러한가?

 

 

이건창 가문은 계통으로는 이경석(李景奭)-이광명(李匡明)-이시원(李是遠)으로 이어지는 소론 준론 탕평파의 집안에 속한다. 일족의 이긍익(李肯翊)은 여러 정치자료와 사료를 모아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과 같은 사찬 사서를 편찬하였고, 증조 이면백(李勉伯) 역시 감서(憨書)라는 당론서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조부 이시원 역시 국조문헌(國朝文獻)100여권을 편찬하였던만큼 그의 집안과 가풍은 역사서와 당론서를 펴낼 수 있는 최적의 여건을 갖추었다.

그러나 당의통략이 단순히 기존의 당론서와 같았다면 현재의 우리에게 그렇게 큰 주목을 받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미 조선 후기에는 단순히 전반적인 당론서뿐만 아니라 개별 사건(환국, 임인옥사, 임오화변 등)에서도 자기입장을 강조하는 수많은 당론서들이 나와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의통략의 고유한 가치는 원론(原論)에서 혹은 당론의 유래로 그 득실이 서로 같으니 나는 여기에서 어느 당에 치우쳐서 말한 것이 아니다.”라는 등 나름의 공정성을 추구한다는 입장 표명에서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실제 이건창은 자신의 저서에서 공정을 추구하였을까? 1차적으로는 많은 노력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건창 이전의 당론서들은 자당의 명분과 입장을 강변하는 목적을 숨기지 않는 편이었는데, 예를 들어 서인-노론측 당론서의 대표로서 이정인(李鼎寅)형감(衡監), 남기제(南紀濟)아아록(我我錄)등은 영조시기 당파적 승리에 근거한 노론의 입장을 분명히 하거나 혹은 상대 당파가 얼마나 내적-도덕적 약점이 있었는지를 규명하려는 쪽으로 논리를 전개하였다. 상대적 약자였던 소론, 남인은 좀 더 많은 자료를 제시함으로써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하였으나, 마찬가지로 자 당의 입지 변호라는 본질을 넘어서는 것이 아니었다. 일례로 남인 측의 남하정(南夏正)동소만록(桐巢漫錄), 황덕길(黃德吉)조야신필(朝野信筆)같은 당론서는 자파 비판의 대상은 서인에게 속거나 혹은 노론과 행동을 함께한 인물에 대한 비판에 국한되었다.

이에 반해 당의통략의 경우는 상당수의 판단을 독자에게 미루는 서술방식을 취하면서도, 나름대로 자 당파뿐만이 아닌 다른 당파의 공훈과 주장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이는 편이다. 일례로 선조대의 동서분당과 임진왜란 대응을 평하면서 서인은 절의를 지켜 죽은 자가 많았으나, 실제 공훈은 동인에 미치지 못하였다.”라며 자신의 당색인 소론-서인을 상대적으로 객관화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또한 장희빈의 아들(경종)의 세자 책봉에서는 노-소론이 함께 명분과 의리를 지켰다고 바라보면서도, 갑술환국 후 남인에 대한 처벌 완화를 주장한 소론 정사신의 상소를 인용하는 등 장희빈의 편에 선 남인의 완전 배제에 반대하는 입장을 투영하기도 하였다. 또한 노론 대신들의 조카와 아들들이 경종 음해 음모를 꾸몄다는 소론의 주장을 수용하면서도, 노론 대신들은 이들이 하는 일을 다 알지 못하였다며 자칫 노론 모두를 역적으로 몰 수 있는 부분에는 선을 긋고 있다. 또한 임인옥사를 주도한 소론 김일경에 대해서는 환관과의 결탁을 비판한 것, 또한 임인옥사의 서술에 대해서도 노론 측 인물들의 공초 역시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나온 것이라며 옥사를 주도한 소론 측의 신빙성을 의심할 수 있는 여지를 거론하는 등등, 나름의 공정을 추구한 노력은 책 곳곳에서 나타난다. 따라서 소론측의 입장을 보다 강변하기를 바랬던 이건창의 종제 이건방(李建芳)의 발문에서 공평을 추구하다가 공평을 잃었다.’고 불평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서술을 통해서 과연 이건창은 진정 공정한 서술을 이루었는가? 엄밀하게 검토한다면 아니다. 예를 들어 정여립의 옥사에서 성혼 등이 동인을 나름 살리려 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은 많은 서인-소론의 비조로 거론될 수 있는 성혼에 대한 비호로 해석될 수 있으며, 김익훈 음모사건, 회니시비, 병신처분 등의 일련의 과정에 대한 서술 끝에 소론은 관대하고 공평함[寬平]을 유지하려 하였으나 노론 측의 공세에 결국 포기하였다.’는 자기 정당화가 개입된 평가, 또한 경종이 세제(영조)와의 대립구도를 분명히 하였음에도 일화의 삽입을 통해 그래도 경종과 소론이 세제를 보호하려 했다는 인상의 부여 등은 분명 소론의 시각에서 소론의 입장을 정당화하는 서술이 연속되는 한계는 자명하다.

또한 당의통략에서 한 가지의 문제는 군주의 역할과 책임이 당쟁에서 강조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현대의 많은 정치사 연구는 선조, 인조, 효종, 현종, 숙종 등이 단순한 당쟁의 방관자 혹은 수동적 추인자가 아닌 적극적인 참여자임을 밝히고 있다. 일례로 선조의 붕당 비판 시()”를 강조하여 선조는 당쟁 자체를 멀리하였다는 입장을 강조하며 정여립 옥사를 주도한 선조의 역할을 강조하지 않다보니, 역으로 정철, 성혼 등이 옥사를 주도하면서도 사람을 살리려 하였다는 서인-소론 측의 시각-변론을 삽입하면서도, “그럼 이렇게 많은 이들을 죽게 만든 이는 결국 누구인가?”라는 모순이 발생하게 된다. 경종의 경우도 적극적인 임인옥사의 설계자였지만 끝끝내 노론측의 지지를 받은 아우 연잉군(영조)를 비호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렇다면 이건창은 왜 이렇게 군주를 당쟁으로부터 거리가 있는 것으로 설정하는 서술을 하였던 것일까? 이는 아직 조선왕조 통치 하에서 선대임금을 비판할 수 없다는 현실적 사정이 존재하기도 하였지만, 사실 여기에 이건창의 큰 그림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사진 : 당의통략(4250-106, 1)

 
 

 

 

 

국가와 공적 권위의 복구와 단결을 희망하다

 

이건창이 살았던 시대는 서세동점의 시기를 맞이하여 외세의 침입과 사회적 변화가 함께 이루어지고 있는 시기였다. 국가적 위기를 맞이하여 국가아래서 단합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구가 점차 고조되고 있던 시기였다. 특히 이건창의 조부 이시원은 병인양요에서 강화도 함락 소식을 듣고는 재상으로서의 책임 및 국가적 위기에 대한 사람들의 의분을 일으키고자 스스로 자결을 택한 인물이었으며, 그런 조부를 추도하기 위한 별시에 급제했던 이건창은 그 무게를 충분히 자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근대 시기의 위기를 맞이한다고 해서 바로 사람들의 시각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지금의 우리는 국가(state)의 정당성과 공적 권위, 공공성의 기반을 인민(people) 혹은 민족(nation) 등에서 찾지만, 전근대 사회의 마지막을 장식하던 인물에게는 국가의 공적 권위와 공공성의 상징이자 최종적인 귀결은 국왕에게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건창 역시 그 중 하나로서 국가적 위기를 맞이해 국가의 공공성을 회복하고 붕당을 넘어서는 공적 권위를 확보해, 궁극적으로 국가적 단결을 이끌 주체 혹은 상징으로서의 국왕이란 존재가 필요했으며, 따라서 당쟁에서 국왕의 존재는 적극적인 주동자가 아닌 당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거나 혹은 조정하려는 초당적(超黨的)인 존재로 그려져야만했던 것이다. 이건창의 이와 같은 설정이 두드러지는 것은 선조가 동인과 서인 모두를 시를 통해서 비판하는모습으로 그려지면서 정작 정여립 옥사에서의 주동 책임이 희석되는 모순적 서술을 불러온 근본 요인이었다. 또한 인조가 서인의 옹립을 받았음에도 소북계열을 사돈으로 삼으려 한 점을 강조하거나, 숙종대 환국정치에서 숙종의 역할이 두드러지지 않는 것으로 서술하는 것, 그리고 의리서를 통해 노론이라는 특정 붕당의 의리가 국시임을 천명한 영조대의 서술이 상대적으로 적은 것 등등은, 궁극적으로는 당쟁으로부터 초탈해야만 하는 국가 군주의 상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이와 같은 이건창의 설정이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우리가 붕당의 주요 사건으로 주목하는 예송논쟁에 대한 입장이다. 이건창이 주장하는 예송논쟁에서의 최종적 우선 논리는 송대 유학의 예론을 수용한 송시열의 논리도 아니오, 고대 유학의 예론을 중시하는 윤휴(尹鑴) 등의 논리도 아닌, 오로지 조선의 국제(國制)’를 준수하느냐의 여부임을 사건 서술의 처음부터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 즉 정치적-사회적-예법적 논란은 오로지 국가의 권위와 논리에 따라야 하며 사적 붕당의 의견은 우선되지 않아야 할 것으로 분명하게 한 것이다. 또한 국제를 시행하고 준수하는 위치로서의 국왕의 상을 그려내기 위해, 이건창은 2차 예송논쟁에서 현종의 모습을 그간의 수동적-방관적 비판자로서의 군주 묘사에서 끌어내 적극적인 개입자로 그려내고 있다. 이는 현종이 서인 김수흥(金壽興) 등을 불러 국제에 따라 일관성 있게 상례를 수정하기를 요구하며 4번이나 질의하고 또 질의하는 적극성을 보이다가 끝내 서인을 처벌하고 개각을 단행하는 주체로서 강조하는 것에서 드러난다.

즉 이건창이 그리는 국왕의 상은 국제와 같이 붕당을 넘어선 공적 권위와 국가제도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이를 적극적으로 수호하거나 혹은 적어도 붕당 등에서 거리를 둠으로써, 붕당 등이 대표하는 사의(私義)에 휩쓸리지 않고 다가오는 위기 속에서 공적 권위를 수호하는 주체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건창이 붕당정치 전반에 대해서 원론의 파악과 같이 도학을 너무 존중하는 것이 첫째요, 명분과 의리가 너무 엄격한 것이 둘째이고,”라고 평가하면서 단순히 특정 당파를 비판하는 수준을 넘어 당쟁 전반을 비판하고 주자학적 명분론이 붕당과 폐단의 근원이라고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은 여기서도 분명해진다. 단순히 그가 양명학(陽明學)을 중시하는 강화학파(江華學派)의 후계자로서 허학(虛學)과 실학(實學)을 나누는 수준의 인식이 아니라, 명분과 의리는 실상의 변화에 따라 수시로 실질에 힘써야[隨時務實]하는데, 정작 도학적 풍토에서 붕당의 명분, 의리론 등 허학국제로 대표되는 국가의 공적 권위와 공공성 등을 혼란시키거나 폐단을 끼치고 있다는 인식에서 가능하였던 것이다.

 

 

 

 

 

공공정치되살리기

 

하지만 붕당을 넘어서는 존재로서의 국제, 국가권위와 그 상징으로서의 국왕이란 것만으로는 실제 정치운영의 건전성을 담보할 수 없다. 정치운영의 건전성은 결국 서로 지킬 것은 지켜야 한다는 일종의 신뢰 안에서 움직여야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건창의 비판은 단순히 국제와 국왕으로 대표되는 공적 권위와 상징의 강조에 그친 것이 아니라, 실제 공공성을 되살리기 위한 공공정치의 복구로 이어진다.

이에 대한 인식은 소위 숙종대에 당쟁의 심화와 함께 나타난 정탐정치에 대한 인식에서 나타난다. 즉 김익훈 음모사건 이래로 단순히 정보수집 등을 넘어 상대 당파를 몰아내고 함정에 빠트리기 위한 공작, 음모 등이 횡행하고 있었다. 이는 공공정치가 아닌 사적 결탁과 음모의 영역으로 정치가 추락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따라서 이건창의 논리는 정탐정치의 근절을 통한 공공정치와 신뢰의 복구가 주요한 관심사이며, 그를 위해서는 자 당파인 소론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할 수 있었다. 일례로 갑술환국 이후 이건창은 소론측이 노론측 이사명(李師命) 등 공작정치의 선봉장들에 대한 신원을 반대한 것이나, (소론 원로 남구만의 중립성을 최대한 강조하면서) 남구만이 정탐정치의 근절을 위해 갑술환국의 공작 공훈자인 노론 김춘택(金春澤) 등을 숙청하고자, 자 당인 소론 한중혁(韓重爀)을 먼저 숙청하는 양상에 상당부분을 할애하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또한 여기서도 실제로는 갑술환국의 공작에 개입한 숙종의 역할은 축소되어, ‘공적 권위의 대표-상징으로서 공작정치와 거리를 두어야 하는 모습으로 서술된다.

이와 같은 양상은 같은 소론 중에서도 임인옥사의 주요 인물인 김일경에 대한 서술에서도 나타난다. 특히 김일경이 영변부사일 때 영변출신인 환관 박상검과 사적인 관계를 맺었다고 비판하며 박상검, 문유도의 악행을 나열하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공적 정치의 영역을 벗어난 사적 결탁과 공작, 음모 정치는 같은 당색이라 해도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으며, 이는 환관과의 사적 결탁 근절, 공론정치 등을 중시하는 유교지식인의 전통이기도 했다.

결국 당의통략은 소론 지식인으로서의 한계, 유교적 정치관점의 유지, 그리고 이건창 자신도 중앙의 정치사료를 참고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비판의 여지가 있다. 따라서 우리는 당의통략불편부당(不偏不黨)”이라는 슬로건을 서술과 시각 하나 하나를 모두 신뢰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근대의 여명과 국가적 위기를 맞이해 국가 차원의 단결과 각성을 요구하던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자신의 방식으로 국가의 공적 권위, 공공성, 정파 초월성 등은 물론 건전한 정치운영을 희구하던 한 지식인의 지적 산물로서 당의통략의 역사적 가치를 살펴 볼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김용흠, 총론 : 조선후기 당론서의 객관적 연구는 가능한가 , 역사와 현실85, 2012.

이상식, 이건창과 당의통략, 내일을 여는 역사4, 2001.

이정섭, 「『당의통략소고, 서지학보13, 1994.

이정식, 「『파벌정치이론의 재조명: 이건창의 당의통략제독을 위한 파라다임 모색, 사회과학연구5, 1992..

최성환, 이건창 가문의 당론과 당의통략서술, 대동문화연구104,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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