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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와 척사의 대격돌

조선책략(朝鮮策略)이 가져온 파문

 

 

 


사진 : 조선책략(한은 91)

 

 

 

 

 

조선, 쇄국에서 개항으로 나아가다


  19세기 말 조선은 쇄국과 개화 두 가지 사이에서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다. 1864년 고종이 즉위하면서 정치 실권을 장악하는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은 전제왕권의 확립을 위한 개혁정치를 단행하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천주교 박해 등 쇄국정책을 고수하였다.

그런데 1873년 국왕 고종이 친정(親政)을 시작하면서 대외정책에 변화가 일기 시작하였다. 고종과 친정 지지 세력은 일본측 서계(書契) 수리 문제를 타협하면서 조선·일본간 국교 중단사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1876년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의 체결은 일본의 운요호(雲揚號) 사건 도발과 협상 강요에 굴복한 결과로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조정 내부에 개방 의지도 어느 정도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때 청나라는 일본이 조선으로 진출하는 것을 불안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것은 일본이 청나라의 안보와 직결되어 있는 조선을 침략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이러한 우려는 1879년 일본이 류큐(琉球)를 병합하자 현실적인 문제로 대두하였고, 이에 따른 시급한 대책이 요청되었다. 그 결과 북양대신(北洋大臣) 이홍장(李鴻章)은 조선에 대해 서양 여러 나라와도 수교할 것을 권고하였다. 한반도에서 열강간의 세력균형을 이룩하여 일본이나 러시아의 침략까지도 견제하자는 의도였다.

 

 

 

 

수신사 파견과 조선책략의 등장

 

조선은 일단 중국의 수교 권고를 거부하였지만, 일본의 상황과 침략 의도 등을 살피기 위하여 1880년 여름 제2차 수신사로 김홍집(金弘集)을 일본으로 파견하였다. 그리고 김홍집의 일본 도착을 기다려왔던 주일청국공사 하여장(何如璋), 참찬관 황준헌(黃遵憲) 등은 그에게 조선은 미국과 수교하여 한반도에서 세력균형을 이룩함으로써 러시아의 남하 혹은 침략을 견제하여야 한다는 이른바 연미론(聯美論)’을 권고하였다. 그리고 황준헌이 김홍집에게 향후 조선의 외교 전략 수립에 참고할 만한 자료라고 준 것이 자신이 저술한 사의조선책략(私擬朝鮮策略, 이하 조선책략)이었다.

황준헌은 국제 사정, 특히 일본 형편에 매우 밝은 인물이었다. 그는 187712월부터 18822월까지 만 4년 정도를 주일공사관 참찬관으로 일하면서 일본의 근대화된 정치, 경제, 문화의 현상을 직간접적으로 체험하였다. 이후 청나라로 돌아가 일본국지(日本國誌)(1898)를 저술해 일본의 문물을 자세히 소개하기도 하였다. 그가 김홍집에게 건넨 사의조선책략이란 내가 본 조선의 책략이라는 의미로, 황준헌 개인의 의견임을 표방하였지만, 사실상 청나라 정부가 조선 정부에 대해 비공식적으로 외교 지침을 전달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김홍집은 귀국할 때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가지고 들어와 청국이 권고한 사항을 고종에게 보고하였다. 일개 외교관이 쓴 이 책이 조선사회에 던진 파장은 엄청난 것이었다.

 

 

 

 

 

조선은 친중국, 결일본, 연미국하여 러시아를 방비하라


황준헌이 조선책략에서 말한 핵심 주장은 조선이 친중국(親中國), 결일본(結日本), 연미국(聯美國)하여 러시아를 방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중국과 친하고(친중국), 일본과 맺고(결일본), 미국과 이음(연미국)으로써 선진문화를 학습하고 외국과 통상해야 외세의 침략을 방어하고 자강(自强)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진 : 조선책략(한은 91, 첫 페이지)

 

 

러시아에 대한 경계심은 책의 첫 문장에서부터 드러난다. “지구상에 비할 데 없이 큰 나라가 있는데 러시아(아라사)라고 한다. 그 땅이 넓어 세 대륙에 걸쳐 있고, 육군 정예병사가 100여만 명이나 되며, 해군의 거함이 200여 척이나 된다.” 러시아는 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영토를 계속 확장해 왔으며, 최근 서구로의 진출이 녹록치 않게 되자 동양으로 눈길을 돌려 남하를 추진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어서 황준헌은 러시아의 동양 진출에서 조선이 얼마나 위태로운 상황인지를 강조하였다. 조선이라는 땅덩어리는 실로 아시아의 요충을 차지하고 있어 그 형세가 반드시 다툼을 가져오게 되어 있으며, 조선이 위태로워지면 동아시아의 형세도 날로 위급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러시아가 아시아의 강토를 공략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조선부터 공략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이처럼 강대한 러시아를 방비하기 위한 조선의 책략이란 것은 반드시 친중국, 결일본, 연미국으로써 자강을 도모하는 길밖에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조선인들은 친중국에 대해서는 전통적으로 지속되어 온 조공책봉관계가 있어 의심하지 않지만, ‘결일본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품고 있으며 연미국에 대해서는 더욱 깊이 의심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이에 친중국, 결일본, 연미국해야 하는 이유를 하나하나 들어 아래와 같이 설명하였다.

우선 중국은 러시아와 지리적으로 가장 밀접해 있는 국가일 뿐만 아니라, 땅이 크고 물자가 풍부하며 아시아의 땅을 많이 차지하고 있기에, 러시아를 제어할 나라는 중국만한 것이 없다. 아울러 중국은 조선을 매우 사랑하는 나라로서, 그동안 덕과 은혜로써 소국인 조선을 품어왔으되 한번도 그 토지와 인민을 탐내는 마음을 가진 적이 없다. 따라서 친중국해야 러시아가 감히 범접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이어서 결일본에 대해서는 지리상의 특수성과 조선과 일본의 이해관계를 들어 설명하였다. 중국 외에 조선과 가장 가까운 나라는 일본으로, 조선에 어떤 변고가 생기면 일본도 무사히 그 영토를 보전할 수 없으며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하며, 중국 전국시대의 예를 들어 설득하려 했다. 전국시대에 비록 진()나라가 강대했어도 한((()가 합종(合從)하자 감히 동쪽을 넘보지 못했고, ()와 촉()이 연맹을 맺었을 때는 위나라가 감히 남쪽으로 침략해 오지 못했던 것처럼, 일본과 연맹을 맺는다면 강대한 러시아로서도 조선을 넘보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

연미국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미국은 지리적으로 조선과 멀리 떨어져 있고 역사를 돌이켜 보아도 믿을 만한 나라임을 강조하였다. 미국은 매우 강성한 나라이지만 남의 토지와 인민을 탐하거나 정사에 간여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약소한 자를 도와주는 신의 있는 나라라는 것이다. 미국은 중국과도 약속을 잘 지켜나가고 있고 일본과도 통상을 하고 있으니, 조선이 미국을 우방으로 삼는다면 다른 나라의 침략을 방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황준헌은 조선에서 결일본은 반신반의할 것이고 연미국은 깊이 의심할 것임을 대비하여, 거듭 설득을 더하였다. 일본의 침략 의도에 대해 경계심을 품는 조선인들이 많겠지만, 이미 옛날 이야기이며, 미국에 대해서는 그들이 중국이나 일본에 보인 태도를 보아서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은 러시아에 병합되기 전에, 그리고 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 같은 서양 여러 나라들이 먼저 병선을 보내 강제로 맹약을 요구하기 전에 먼저 미국과 공평한 조약체결을 의논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하였다.

책의 말미에서 황준헌은 은근한 협박도 빼놓지 않았다. “시세의 절박함은 위태롭고도 위태로우며 기회가 오는 것은 은미하고도 은미하다. ... 오대부(五大部)의 종족들이 모두 조선을 위태한 나라로 보는데도 조선 저만이 절박한 재앙을 도리어 알지 못하고 있을 터이니, 이것이야말로 처마의 제비가 불이 붙은 것도 모른 채 아무 근심 없이 즐겁게 지저귀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라고 말이다.

 

 

 

 

조선책략, 조선보다는 청나라를 위한 외교정책


  『조선책략은 황준헌 개인의 저작이지만, 황준헌으로 대표되는 청나라 외교관들의 정세 분석을 담고 있는 책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책에서 특징적인 것은 미국을 대단히 미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당시 하와이·필리핀 침략 등 태평양 방면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던 미국을 영토적 야욕이 없는 나라로 잘못 인식하고 있었다. 이는 황준헌이 정말 그렇게 믿었다기보다, 조선을 설득하기 위해 일부러 과장한 측면이 컸다고 할 수 있다. 청나라의 외교관들은 이미 서구 열강의 폭력적 실체를 잘 알고 있었으나, 조선이 서구와의 교섭을 피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부러 거짓과 과장을 늘어놓았을 것이다. 미국 역시 하나의 제국주의 국가였을 뿐이지만, 청나라는 자국의 국익을 방어하기 위해 한반도에 미국을 끌어들이려 한 것 뿐이었다.

또한 황준헌은 상당수 조선 사람들이 통상에 반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한 나머지, 통상의 장점을 과장하였다. 아편전쟁 때만 해도 중국은 쇄국정책을 고집했으나 현재는 여러 나라와 통상을 하면서 서양을 배우고 있으며, 통상은 중국의 발전에 도움이 될 뿐 전혀 해롭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중국은 아편전쟁 이후 서구 열강의 이권 침탈에 시달리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를 방어하기 위한 문호개방, 미국으로 대표되는 서구 열강과의 수교 주장 등은 당시 조선인들의 생각보다 한 걸음 앞선 이론이었다. 1876년 개항 후 서구 문화의 수용 여부를 고민하며 외세침략에 대처하려는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조선책략은 개화적 입장을 정책화하기 위한 명분을 제시해 주었다. 김홍집이 수신사 결과를 보고하며 이 조선책략을 고종에게 바친 것은 조선 조정에서 서양과의 직접적인 문호개방이 공식적으로 거론되는 첫 순간이었다. 고종도 김홍집이 보고한 취지에 동의하였고 조선책략을 널리 배포하라는 명을 내렸다.

 

 

 

 

조선책략이 가져온 파장, 만인소 사건

 

조선책략이 조선에 전래된 후에 개화운동을 촉진시키고 개화정책을 실천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지만, 개화와 서구문명의 수용을 주장하는 이 책은 위정척사를 주장하는 전국 유생들의 반발을 일으켰다.

일본과 국교를 맺고 미국과 연합해야 한다는 조선책략의 내용이 전국 각지로 전파되자, 1881226일에는 퇴계 이황의 후손인 영남 유생 이만손(李晩孫)이 무려 1만여 명의 서명을 받아 조선책략의 허구성을 비난하며 이를 들고 들어온 김홍집 등을 처벌하라는 집단 상소를 올렸다. 이른바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이다.

 


사진 : “이만손 등 만 명이 연명으로 사의조선책략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다

고종실록18, 1881(고종 18) 226일 기사 중 일부

(출처 :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 sillok.history.go.kr)

 

 

 

경상도 유생 이만손 등 만 명이 올린 연명 상소에서는, “방금 수신사 김홍집이 가지고 온 황준헌의 사의조선책략이라는 1권의 책이 유포된 것을 보니, 저도 모르게 머리털이 곤두서고 가슴이 떨렸으며 이어서 통곡하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단(異端)으로 사람들을 미혹시킨 자에 대한 처벌은 왕법(王法)에 나타나 있고 그 무리에 가담한 자를 먼저 다스려야 한다는 가르침은 춘추(春秋)에 실려 있으니, 이것을 따르면 다스려지고 이와 반대로 하면 혼란해진다는 사실은 영원히 어길 수 없는 것입니다.”라면서, 조선책략을 가져온 김홍집의 처벌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특히 만인소에서는 조선책략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여 비판하였다. 첫째, 친중국이라 하지만 중국과는 이미 친밀한 관계이다. 둘째, 일본은 본래 조선의 속국이었고 사나운 나라이며, 이미 병자수호조약을 맺었으니 더 나아갈 것이 없다. 셋째, 미국은 잘 알지도 못하는 오랑캐 나라이니, 조약이 체결되면 감당하지 못할 요구를 할 것이다. 넷째, 러시아는 지금까지 우리와 한 번도 다툰 일이 없는데, 갑자기 러시아를 막겠다고 소란을 피우면 오히려 자극하는 꼴이 된다. 다섯째, 러시아와 일본, 미국은 모두 오랑캐이니 통상조약은 조선의 산업에 피해를 줄 것이다. 여섯째, 일본이나 미국같은 나라는 세상에 수도 없이 많으니 한번 통상의 문이 열리면 다들 조선에서 이익을 얻고자 날뛸 것이다. 일곱째, 오랑캐의 본성은 탐욕스러운 법이니 안팎에서 이익을 도모하면 처지가 곤란해진다. 여덟째, 미국과 연대를 한다고 해도, 정작 나라에 급한 일이 생겼을 때 그들이 먼 거리를 달려와 도울 수는 없을 것이다.

비록 고종이 개화의 의지가 강력했어도 만인소의 주장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고종은 일단 회유하며 퇴거를 명하였으나, 운동이 다시 재연의 기세가 보이자 단호한 강압책을 썼고, 이만손 등은 518일자로 유배에 처해졌다. 그러나 영남만인소의 영향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고, 전국 유생들의 상소는 계속해서 올라왔다. 이처럼 영남만인소는 위정척사운동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책략의 유입으로 전국적인 위정척사운동이 발생하였으며, 이는 조선정부의 근대화 정책에 제동을 거는 중대한 요인이 되었다. 이와 같은 개화정책에 대한 노골적인 반발은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는 원인으로까지 작용하게 된다.

위정척사론이 들끓는 와중에도 고종은 대미 수교라는 정책적 기조를 그대로 고수하였다. 이듬해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으로 건너가는 어윤중을 통해 하여장 공사에게 미국과 수교할 뜻을 밝혔다. 어윤중으로 하여금 아예 중국 천진으로 건너가 영선사로 그곳에 머무르고 있던 김윤식과 함께 청국의 북양대신 이홍장과 그의 막료이자 해관총독이었던 주복(周馥)을 통해 이 문제를 구체화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사전 작업을 바탕으로 18824월 제물포에서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될 수 있었다.

 

 

 

 

 

참고문헌

 

백승종, 금서, 시대를 읽다 문화투쟁으로 보는 한국 근현대사, 산처럼, 2012.

于明燕, 근대 중국지식인의 조선인식과 그 영향: 황준헌, 양계초, 황염배를 중심으로,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7.

이헌주, 2修信使의 활동과 朝鮮策略의 도입, 韓國史學報25,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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