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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입양의 모습

수양승적일기


유수지(한성대학교)



사진 : 收養承嫡日記(13038-v.1-2)

 

 

현대 사회에서 입양은 가족을 구성하는 또 다른 방법이다. 혈연적으로는 이어져 있지 않지만, 법적인 절차를 통해 부모-자식 관계를 인정받아 하나의 가족을 이룰 수 있다. 그렇게 정식으로 구성된 입양 가족은 사회의 한 축을 구성하며 사회적 권리를 보장받고 복지 혜택을 얻기도 한다.

오늘날과 의미는 다르지만 입양은 과거 조선 후기에 익숙하게 행해진 제도로 입후(立後), 수양(收養), 승적(承嫡) 등으로 말할 수 있다. 조선후기에 들어 양자(養子)를 들이는 것은 지체 높은 양반부터 중인 이하까지 광범위하게 성행했고, 그 과정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중앙정부에 의해 관리되었다. 이 같은 사회의 모습을 토대로 흔히 17세기 이후 조선 사회는 유교적 질서가 더욱 확대되었다고도 이야기된다. 입양은 가계 계승과 봉사 등 유교적 질서를 유지하거나 강화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절차로, 이러한 제도가 사회 저변에 확대되었다는 것은 조선 사회가 더욱 유교 사회에 가까워졌음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가계 계승과 입후

 

 

입후(立後)는 양부(養父)가 양자(養子)를 들여 봉사(奉祀)와 그에 따른 권리를 이어받게 해 가계를 계승하는 것을 말한다. 가계를 이을 수 있는 적자, 즉 정실부인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얻지 못하고 첩과의 사이에서도 아들이 없을경우 고려되는 것이 양자를 들이는 것이었다.

입후는 한 집안의 계승 문제로 지극히 사적인 문제였지만 동시에 공적인 문제였다. 입후 과정에 국가가 공식적으로 개입했기 때문이었다. 중앙정부는 유교적 질서가 확립되고, 실현되는 사회를 만들고자 조선 초기부터 입후제에 관한 사항들을 논의하였고, 이는 경국대전』 『입후조로 정리되었다. 이에 따라 양자를 들이기 위해서는 법전에서 규정한 입후 자격, 조건 등을 준수하고 국왕의 승인을 얻어 그 사실관계를 증명하는 입안(立案)을 받아야 했다.

가장 기본적인 입후 조건은 양자와 양부 간 혈연적 관계였다. 친자가 없다면 서자를, 서자도 없을 경우 가까운 친족의 아들, 즉 형제의 아들인 조카를 계후자(繼後子)로 정할 것을 원칙으로 삼은 것이다. 또한 양부와 생부(生父) 모두 입후 시 살아있는 것을 전제로 하였으며, 이들이 사망한 경우 양모가 관에 고해 입후가 이루어지도록 했다.

그러나 이러한 원칙이 지속적으로 지켜지기는 힘들었다. 이상적으로는 서자 다음으로 고려되는 것이 양자였지만, 양반들은 점차 서자에게 가계를 물려주는 것보다 양자를 들이는 걸 더욱 선호하였다. 양반들 사이에서 입후는 조선후기로 갈수록 일상적으로 실천하는 가계 계승 방법이었다.

또한 장자가 아닌 조카 중에도 마땅히 들일 양자가 없다면, 왕의 허락을 받아 장자인 조카를 들이거나 좀 더 먼 촌수에서 양자를 데려오기도 하였다. 이렇듯 조선후기에 이르러 양반들 사이에서 확산된 입후는 점차 사회 곳곳으로 퍼져나가 중인, 양인들 사이에서도 성행하기 시작했다

 

 

적처와 첩에 모두 아들이 없는 경우에는 관에 고하여 동종의 지자를 세워 후사로 삼도록 한다. 양가의 아버지가 함께 명하여 세우되, 아버지가 사망하였으면 어머니가 관에 고한다. 존속과 형제 및 손자는 후사로 삼지 못한다.

경국대전』 『입후




사진 : 1648(인조 26) 예조에서 유학 윤도(尹度)에게 발급된 계후입안

 

 

 

서자의 가계 계승, 승적

 

 

서자(庶子)는 사회적으로 차별당하고 여러 제약을 받았던 존재였다. 대표적으로 그들은 과거에 합격하여도 일정 이상 관직에 오르지 못했다는 경우가 그것이다. 그러나 서자는 가계를 이어갈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경국대전』 『입후조에도 나오듯 서자는 적자(嫡子)의 부재 시 가계 계승 후보 중 하나였다. 서자를 통해서 가계가 계승되는 것, 이를 승적(承嫡)이라 한다. 법적으로도 인정된 승적의 효력은 조선후기까지 유지되었으며, 입후와 마찬가지로 예조에 신청하여 허가를 받아야 시행이 가능하였다.

하지만 법적으로 승적이 보호받는다고 하여 이들의 권리가 반드시 지켜진 것은 아니었다. 승적은 양반들 사이에서 양자를 통한 가계 계승보다 선호되지 않은 방법이 되어갔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양반들은 승적보다 입후를 통한 가계 계승을 더 우선시했다. 분명 법적으로는 승적이 가능했지만, 사회적으로는 서자와 적자 간의 구분으로 인해 제한적으로 서자의 가계 계승이 이루어진 것이다.

설령 승적이 이루어졌더라도 서자 가계 계승에 대해 적자손들이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들은 서자가 가계를 계승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여겼다. 또한 서자를 계승자로 세우려다 번복하고 입후를 진행하려고도 하였다. 이에 서자들은 자신들이 적절한 절차를 거쳐 승적이 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또 확실히 하고자 승적입안(承嫡立案)을 받아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자손을 양자로 들여 가계를 계승하고자 하는 사회적 분위기와, 서자에 대한 차별적 인식 등에 의해 서자의 가계 계승이 그리 쉽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유교적 사회질서의 확장과 수양

 

수양자(收養子)는 동성 혹은 비동성에 상관없이 3세 전에 거두어져 길러진 자식을 말하며, 이들은 친자처럼 부모의 3년상을 치를 수 있었다. 수양자는 조선후기에 들어 양란(兩亂)이나 자연재해 등으로 부모를 잃거나 버림당한 아이를 구제하기 위해 국가에서 적극 권장하는 방법이 되었다. 국가가 권장하고 민간 차원에서 실시되는 일종의 사회적 복지 제도였던 것이다.

중앙정부는 유기아 수양을 위해 이와 관련한 법안을 마련하기도 했다. 1695(숙종 21) 입법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1783(정조 7) 자휼전칙(字恤典則)이 반포되면서 유기아 수양에 대한 본격적인 행정적 관리체계가 갖추어졌다.

 

 

그 하나는 구걸하는 아이나 유기한 아이를 막론하고 만일에 수양하기를 자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한결같이 속전(續典)의 사목(事目)에 의거하여 진휼청에서 입안(立案)을 만들어 주고, 자녀가 되기 원하거나 노비(奴婢)가 되기 원하는 자가 있으면 각각 그 소원에 따라 시행하되, 양인(良人)과 공사천(公私賤)을 헤아리지 않고 몰아서 수양을 허락한 자와, 집지(執持)한 지 60일이 되지 못하여 시작만 있고 결말이 없게 된 자는 물시해야 한다.

정조실록16, 1783(정조 7) 115일 임진.

 

 

수양은 주로 일반 양인층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그 시행은 초기에 입후나 승적처럼 가계의 봉사를 위한 것보다는 노동력 확보나 노후 봉양에 그 목적이 더 컸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사회 전반에 확산된 유교적 의식에 따라 수양의 목적 역시 가계를 계승하는데 점차 초점이 맞춰지고 있었다. 일반 양인층 사이에서도 가급적이면 부계 혈연의 양자를 들이고자 하였으며, 비부계 혹은 비혈연의 아이를 양자로 두는 것은 점차 지양되고 있었다. 여전히 수양으로 표현되었지만, 양반들의 입후관행이 이입된 것이다.

 

 

 

입양에 관한 정부의 다양한 기록들

 

 

조선시대 양자를 들이는 것에 대해 정부는 가능한 빠짐없이 개입하여 철저하게 관리하고자 하였고, 이러한 정부의 태도는 조선 후기 입후와 관련한 다양한 기록들을 만들어냈다. 계후등록(繼後謄錄)별개후등록(別繼後謄錄)그리고 수양시양등록(收養侍養謄錄)이 바로 그것이다. 세 기록물은 모두 정부가 개인의 입양에 대해 관리하고자 한 동일한 목적을 갖고 만들어졌지만 각자 기록하는 목적과 입양의 의미가 조금씩 달랐다.

계후등록1618(광해군 10)부터 1862(철종 13)까지 입후 당사자들이 입후를 허락받고자 올린 문서를 예조 계제사(稽制司)에서 정리하여 기록으로 만든 것이다. 계후등록에는 입후가 허가된 사례를 모아놓은 것이기 때문에 그 내용들은 앞서 살펴본대로 기본 조건에 맞게 양부와 같은 동성 중 항렬이 낮은 이를 계후하길 요청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물론 당대의 봉사만을 위해 입후하는 사례 역시 들어가 있다.

별개후등록1637(인조 15)부터 1753(영조 53)까지 정부가 계후등록의 일반적인 사례들과는 다르다고 판단해, 왕이 특별히 허가해준 입후 사례를 기록해둔 것이다. “특별 허가라 하면 완전히 예외적인 사례를 생각하기 쉽지만 양친의 사망, 장자를 양자로 들이는 등 기본적인 입후 조건 중 하나라도 충족하지 못한 경우를 말한다. 왕의 최종 허가를 통해 입후의 허가가 이루어지는 만큼 입후와 관련한 국왕과 대신들의 논의 내용이 실려있기도 하다.

수양시양등록1684(숙종 10)부터 1750(영조 26)까지 수양자와 시양자를 허가했던 사례들을 예조에서 정리한 기록이다. 앞서 보았듯 수양은 혈연 혹은 비혈연에 상관없이 3세 이전의 아이를 데려다 기르는 것을 말했으며, 시양은 3세 이상의 아이를 데려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수양시양등록에서 점차 단어들의 의미가 변화해갔다. 수양의 경우 양부의 아들 항렬(조카)을 입양하는 것, 즉 유교적 가계 계승에 따른 것으로 의미가 변하여 사용되었다. 반면 시양의 경우 손자항렬(조카 손자)을 입양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부계 혈연을 통한 가계 계승의 의식이 점차 사회 전반에 굳어지면서 양반 이하의 계층에서도 비혈연보다 혈연관계의 아이를 입양하며, 단어의 사용 또한 그에 따라 달라진 것이다.

 

 

 

수양승적일기의 구성과 특징

 

 

수양승적일기(13038) 역시 1843(헌종 9)부터 1894(고종 31)까지 중앙정부에 의해 작성된 전국의 입양 허가 사례들이 실려있다. 각자의 사례들은 거주지와 직책 그리고 양부 이름, 입양이나 승적하는 이유, 입양 및 승적 하는 자와 양부 간 기존 친족 관계 및 이름이 간략하게 기술되어 있다. 또한 허가 기록은 연월로 최소 한 건부터 세 건씩 작성되어 있다. 양반부터 지방 향리에 이르기까지. 수양승적일기19세기 중후반 다양한 계층에서 이루어진 이들의 사례는 조선후기 입양의 모습을 잘 말해준다.

다만 수양승적일기수양시양등록과 같이 그 단어의 사용의미가 다른 뜻으로 풀이된다. 수양이 3세 이하의 아이를 들여 기르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닌, 양자를 들이는 입후 그 자체로 쓰인 것이다. 이는 실제 기재방식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를테면 양부인 죽산의 이철원(李哲源)이 양자인 상길(尙吉)과의 본래 친족관계를 32촌 사이인 정원(貞源)의 자로 표현하였듯 양부와 양자가 본래부터 친족관계임을 반드시 명시하였다. 또한 그 관계를 명시할 수 없다면 동성 또는 동족으로 표기하여 친족임을 반드시 밝혔다. 이와 다르게 수양승적일기에서의 승적은 기존의 의미인 서자가 가계를 계승하는 것 그대로 사용되었다.




사진 : 收養承嫡日記(13038-v.1-2) 1045a

 

 

수양승적일기는 총 2개의 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제1책은 1843(헌종 9)부터 1863(철종 14)까지, 2책은 1854(고종 원년)부터 1894(고종 31)까지의 기록이 실려있다. 모두 52년간의 기록인데, 전체 건수는 입양이 309, 승적이 466건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 신청자는 지방의 향리나 유학 일반 양민으로 나누어져 있다. 주목되는 부분은 시기에 따른 입양과 승적의 비중이다. 전체 비중에서 승적 사례가 더 많기도 하지만 19세기 후반으로 갈수록 승적의 비중이 더욱 많이 차지하고 있으며, 특히 고종 연간에는 승적이 입양에 3배나 되었다. 한편 향리와 호장(戶長) 등의 입양사례는 21건에 이르며, 대게 서자를 통해 가계를 계승하는 승적 사례이다.

 

 

 

 

참고문헌

 

경국대전

정조실록

수양승적일기

수양시양등록

계후등록

별계후등록

마르티나 도이힐러 지음, 이훈상 옮김, 2013 한국의 유교화 과정, 너머북스

고민정, 2014 「『계후등록의 기술방식과 법외계후에 대한 재검토, 사학연구113

고민정, 2016 17세기 입후의 요건과 첩자계승, 한국학39(3)

권내현, 2008 조선후기 입양의 시점과 범위에 대한 분석, 대동문화연구62

박종천, 2012 조선후기 유교적 가족질서의 확산과 의례적 양상-입후와 입양을 중심으로-, 퇴계학보132

이종서, 2015 조선후기 평민층 입양관행의 변화와 그 의미-수양시양등록을 중심으로, 고문서연구47

한상우, 2017 「『계후등록과 족보의 비교를 통해 본 조선후기 입후의 특징, 고문서연구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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